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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은 크롬웰인가?

소한마리-화절령- 2016. 9. 25. 13:47
연개소문은 크롬웰인가?
노 관 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서기 642년 고구려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고관 귀족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보장왕을 옹립한 연개소문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구려의 실질적인 최고 지배자였고,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의 세 아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국망에 이르기까지 26년간 연씨 가문이 고구려를 지배하는 사태가 계속되었다.

   고려중기 무신들이 거듭 정변을 일으킨 끝에 최충헌을 필두로 최씨 가문이 사대에 걸쳐 고려를 지배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다만 고구려 연씨 정권이 연개소문 사후 세 아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곧바로 무너져 버렸다면, 고려 최씨 정권은 몽골의 침입을 겪었지만 비교적 오래갔다는 차이가 있다.

집권한 연개소문, 중국에 강경책으로

     고구려 권력을 독차지한 연씨 가문이 외세의 침입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내분에 빠져 고구려의 국망에 이르렀으니 고구려 국망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연씨 가문에게 있다. 연개소문 사후 세 아들 중 연남건은 끝까지 당나라와 싸웠으나 연남생은 국내성을 기반으로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연남산은 평양성이 포위되자 당나라에 투항하였으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 역시 신라에 투항하였다.

  연개소문의 집권이 고구려에 다행이었을지 불행이었을지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다. 연개소문이 시해한 영류왕은 사실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을지문덕과 더불어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건무라는 인물이었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육군을 살수에서 대파하였다면, 건무는 수나라 수군을 평양에서 격파하였다.

   고구려-수나라 전쟁의 주역이었기에 영류왕은 중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할 수도 있었지만, 중국에서 수나라가 무너지고 당나라가 일어서는 국제 정세의 변동기에 그는 당나라와 화평을 유지하여 고구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연개소문이 일으킨 정변은 그 자체로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 대역 행위가 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영류왕의 시대가 끝나고 연개소문의 시대가 됨으로써 고구려의 대중국 관계가 온건에서 강경으로 급변하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역사를 바라본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영류왕은 당나라에 대한 비열한 정책을 추구한 임금이고, 영류왕을 처단한 연개소문은 영국사에서 청교도혁명을 일으켜 찰스 1세를 처형한 크롬웰과 같은 인물이라고 비유했는데, 이것은 연개소문이 반역자가 아니라 혁명가라는 새로운 주장이었다.

나라를 망친 반역자인가, 당태종에 맞선 영웅인가

     연개소문은 한국보다는 중국에서 더 유명해졌다. 연개소문 사후 곧이어 고구려가 멸망했고, 그의 세 아들을 위시해 상당수 연씨 일족이 당나라에 갔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연개소문에 관한 별다른 전승이 없다. 반면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연개소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데, 예를 들어 연개소문이 몸집이 크고 다섯 자루의 큰 칼을 차고 다녔고 말을 탈 때 반드시 사람을 받침대로 삼아 밟고 탔다는 이야기는 송대에 편찬된 역사책 『신당서』에 나온다. 송나라 신종이 왕안석에게 당 태종이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 이유를 묻자 왕안석이 연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사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사론에 실렸다.

   연개소문은 중국의 소설책에도 등장하였다. 당나라를 일으킨 영웅적인 인물인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에 쳐들어갔다가 연개소문에 패하였다는 사실은 중국에서 연개소문을 당 태종과 필적하는 영웅으로 인식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원나라 때 소설 『설인귀정요사략』, 청나라 때 소설 『설당후전』의 주요 등장 인물은 연개소문, 당나라 태종, 그리고 설인귀라는 요동 출신 당나라 무장이다. 소설 속에서 연개소문의 위세와 당나라 태종의 굴욕은 글자 그대로 점입가경으로 알려져 있다.

   전통적으로 반역자라고 부정적으로 평가된 연개소문이 근대에 들어와 민족주의 역사가에 의해 독립자주를 추구한 영웅으로 새롭게 평가받은 데에는 혹시 이와 같은 중국 소설의 영향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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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노관범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 논저
〈고전통변〉김영사, 2014
〈대한제국기 실학 개념의 역사적 이해〉한국실학연구 제25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