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은 크롬웰인가? |
노 관 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
서기 642년 고구려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고관 귀족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보장왕을 옹립한 연개소문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구려의 실질적인 최고 지배자였고,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의 세 아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국망에 이르기까지 26년간 연씨
가문이 고구려를 지배하는 사태가 계속되었다. 집권한 연개소문, 중국에 강경책으로 고구려 권력을 독차지한 연씨 가문이 외세의 침입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내분에 빠져 고구려의 국망에 이르렀으니 고구려
국망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연씨 가문에게 있다. 연개소문 사후 세 아들 중 연남건은 끝까지 당나라와 싸웠으나 연남생은 국내성을 기반으로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연남산은 평양성이 포위되자 당나라에 투항하였으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 역시 신라에 투항하였다. 나라를 망친 반역자인가, 당태종에 맞선 영웅인가
연개소문은 한국보다는 중국에서 더 유명해졌다. 연개소문 사후 곧이어 고구려가 멸망했고, 그의 세 아들을 위시해 상당수 연씨 일족이 당나라에
갔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연개소문에 관한 별다른 전승이 없다. 반면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연개소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데,
예를 들어 연개소문이 몸집이 크고 다섯 자루의 큰 칼을 차고 다녔고 말을 탈 때 반드시 사람을 받침대로 삼아 밟고 탔다는 이야기는 송대에 편찬된
역사책 『신당서』에 나온다. 송나라 신종이 왕안석에게 당 태종이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 이유를 묻자 왕안석이 연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사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사론에 실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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