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의 종말 |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재위 1494∼1506)은 유년기에 어머니가 사사되는 비운을 겪었다. 왕이 되기까지 12년을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며 세상에 대한 불신감으로 정서 불안과 방어적 태도를 갖게 된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한편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에게 맹목적으로 의존했다. 그런 그가 권력을 쥐고, 또 생모 윤씨의 사사 사건 전모를 알게 되면서 관련 인물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다. 폐출과 사사에 관련된 사람이면 명신거유라 하더라도 극형과 부관참시로 응징하였고, 어머니의 복위 문제에 토를 단 선비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화(士禍)의 시대에서도 시류를 잘 이용하며 호가호위하는 사람이 있었다. 초야의 직언으로 벌어진 국정토론에서
연산군 3년(1497) 단성(丹城) 훈도(訓導) 송헌동(宋獻仝)은 17조에 달하는 상소를 올려 국정 전반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초야의
선비 송헌동이 상소의 형태로 국정에 참여하게 된 것은 왕이 재이(災異)를 계기로 전국의 선비들에게서 직언(直言)을 구하고자 교서를 내렸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선정전(宣政殿) 기둥에 큰 벼락이 떨어진 일을 인간사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해석한 결과이다. 송헌동은 속출하는 이변 현상을
젊은 과부들의 원한이 화기(和氣)를 손상하고 재변(災變)을 불러 생긴 것으로 보았다. 그는 여자의 재혼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식색(食色)이
인간본성’이라고 한 유교 경전의 말씀과도 배치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젊은 과부를 성폭력적 상황에 방치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경국대전』의
‘과부 개가 금지’ 조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정확히는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이다. 정유속혁(政由俗革):정치는 일상 개혁으로부터
혼자 사는 과부들의 고독과 고통에 주목한 법 개정론자들은 “국가의 전장(典章)이란 유통에 폐단이 없어야 영원할 수 있다” 고 하고, “재가녀의
소생 중에 능력 있고 어진 자가 있어도 일체 서용(敍用)하지 않는” 이 법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 10세에서 20세 사이에 시집을
가는 추세에서 혼인한 지 3, 4년 내에 과부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 집안의 명예나 자손의 벼슬길이 막힐까 봐 과부와의 혼인을 꺼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개정론자들은 “도(道)는 오르내림이 있고 정치는 속(俗)으로 말미암아 개혁된다”는 『서경』의 말을 인용하며 주장에 권위를
더하였다. 권력의 오장육부를 자임했지만 왕과 의정부 및 육조의 대신들이 ‘과부 개가’의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발언권을 얻은 그는 토론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데,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세상 사람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국왕에게 이창신(李昌臣)은 충성을 다짐했다.
이창신의 충성 서약은 연산군의 고독한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이창신은 예조 참의에 임명된다. 심술이 간사하여 써서는 안 된다는
대신들의 빗발친 반대가 잇따랐지만 이창신에 대한 왕의 믿음은 확고했다. 왕의 내전에까지 들락거리는 사이가 되었는데, “어젯밤 신의 부자를 불러
내전에 들게 하시니, 성상의 은혜가 높고 중하시어 너무나 감동스럽습니다”(『연산군일기』 9년(1503) 11월 22일)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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