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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의 종말

소한마리-화절령- 2016. 10. 28. 08:46
아부의 종말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재위 1494∼1506)은 유년기에 어머니가 사사되는 비운을 겪었다. 왕이 되기까지 12년을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며 세상에 대한 불신감으로 정서 불안과 방어적 태도를 갖게 된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한편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에게 맹목적으로 의존했다. 그런 그가 권력을 쥐고, 또 생모 윤씨의 사사 사건 전모를 알게 되면서 관련 인물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다. 폐출과 사사에 관련된 사람이면 명신거유라 하더라도 극형과 부관참시로 응징하였고, 어머니의 복위 문제에 토를 단 선비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화(士禍)의 시대에서도 시류를 잘 이용하며 호가호위하는 사람이 있었다.

초야의 직언으로 벌어진 국정토론에서

   연산군 3년(1497) 단성(丹城) 훈도(訓導) 송헌동(宋獻仝)은 17조에 달하는 상소를 올려 국정 전반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초야의 선비 송헌동이 상소의 형태로 국정에 참여하게 된 것은 왕이 재이(災異)를 계기로 전국의 선비들에게서 직언(直言)을 구하고자 교서를 내렸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선정전(宣政殿) 기둥에 큰 벼락이 떨어진 일을 인간사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해석한 결과이다. 송헌동은 속출하는 이변 현상을 젊은 과부들의 원한이 화기(和氣)를 손상하고 재변(災變)을 불러 생긴 것으로 보았다. 그는 여자의 재혼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식색(食色)이 인간본성’이라고 한 유교 경전의 말씀과도 배치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젊은 과부를 성폭력적 상황에 방치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경국대전』의 ‘과부 개가 금지’ 조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정확히는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이다.

   국왕은 송헌동의 상소를 바탕으로 대신들을 불러 이른바 국정 회의를 개최하는데, 모두 29명이 모였다. 논의할 주제는 법전에 실린 ‘과부 개가 금지’ 조항을 존속시킬 것인가 개정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기존의 법은 많은 문제가 있으므로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34.5%였고, 문제가 있다고 해서 쉽게 법을 고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65.5%였다.

정유속혁(政由俗革):정치는 일상 개혁으로부터

   혼자 사는 과부들의 고독과 고통에 주목한 법 개정론자들은 “국가의 전장(典章)이란 유통에 폐단이 없어야 영원할 수 있다” 고 하고, “재가녀의 소생 중에 능력 있고 어진 자가 있어도 일체 서용(敍用)하지 않는” 이 법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 10세에서 20세 사이에 시집을 가는 추세에서 혼인한 지 3, 4년 내에 과부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 집안의 명예나 자손의 벼슬길이 막힐까 봐 과부와의 혼인을 꺼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개정론자들은 “도(道)는 오르내림이 있고 정치는 속(俗)으로 말미암아 개혁된다”는 『서경』의 말을 인용하며 주장에 권위를 더하였다.

   기존 법 존치를 주장하는 대신들은 “현실적인 문제가 많지만 절의를 권장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고 또 “대전의 조항은 경솔히 손댈 수 없다”고 한다. 연산군의 부왕(父王) 성종조에서 이 법을 입안할 때 참여했던 원로 대신들은 주로 ‘소극적 현상 유지론’에 머물렀다. 이들은 “송헌동이 세상사에는 노련할지 모르나 이론과 법전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국왕을 향하여 “일개 시골 서생의 말에 법전의 개정 여부를 논의하라 하시니 심히 불가하옵니다” 라고 한다. 민중의 요구를 야비하게 짓밟고 그들의 고통을 현란한 언어로 희석시키는 높은 자리들이 유독 우매한 왕조 연산조에만 있었겠는가.

권력의 오장육부를 자임했지만

   왕과 의정부 및 육조의 대신들이 ‘과부 개가’의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발언권을 얻은 그는 토론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데,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세상 사람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국왕에게 이창신(李昌臣)은 충성을 다짐했다.

  중국 오대(五代) 때 풍도(馮道)는 여러 임금을 섬기며 오래도록 영화를 누렸으나 선유(先儒)들의 평가는 냉혹했습니다. 과부가 재가한다면 삶의 길은 열리겠지만 의리상 하나의 풍도에 불과합니다. 과부로 살다 보면 담장을 넘어온 자의 위협으로 마침내 실절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절개가 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혹 담장을 넘은 자에게 위협을 당하여 실절하게 된다면 이는 하나의 음부(淫婦)이오니 통렬하게 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제왕이 어찌 한 음부를 위하여 고치지 못할 법전을 경솔히 고친단 말입니까? 아내가 한 남편을 섬기고, 신하가 임금을 섬겨 죽을지언정 두 마음이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큰 윤리입니다. (『연산군일기』3년(1497) 12월 12일)

   이창신의 충성 서약은 연산군의 고독한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이창신은 예조 참의에 임명된다. 심술이 간사하여 써서는 안 된다는 대신들의 빗발친 반대가 잇따랐지만 이창신에 대한 왕의 믿음은 확고했다. 왕의 내전에까지 들락거리는 사이가 되었는데, “어젯밤 신의 부자를 불러 내전에 들게 하시니, 성상의 은혜가 높고 중하시어 너무나 감동스럽습니다”(『연산군일기』 9년(1503) 11월 22일) 라고 하였다.

   여기에 이르자 이창신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궁금해졌다. 성종과 연산군의 조정에서 벼슬한 그를 많은 사람은 “행위에 거짓이 많고 구변이 좋아 임금의 비위를 맞추고, 총애를 견고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는 늘 탐욕과 간사함, 아첨과 약삭빠름의 대명사로 불리었다. 그의 아내는 남의 재산을 탈취한 죄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는데, 그때마다 이창신은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며 발뺌을 하였다.

   변덕스러운 권력은 영원하지 않았다. 생모 윤씨가 폐위될 때 이창신이 한 짓을 왕이 알아버린 것이다. 대비가 언문으로 내린 폐비의 죄상을 이창신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죄가 되었다. 직책상의 일이지만 우매한 왕은 그게 괘씸했고, 자신의 오장육부였기에 그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누구보다 컸다. 이창신은 장 70대를 맞고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가 다시 극변으로 이배되고 다시 섬으로 이배되었다는 기록을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곳에서 죽은 것이다. 이렇게 죽을걸! 이창신은 의학에 조예가 깊었고, 한어와 이두 등의 언어에도 탁월한 실력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동료들이 던지는 굴욕적인 시선을 마다않고 병든 권력에 빌붙어 영화를 누리고자 애쓴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 그에게 영혼이 있다면 이 기록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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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숙인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한국 철학

· 저서
〈정절의 역사〉푸른역사, 2014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 도서출판 여이연, 2005
〈노년의 풍경〉글항아리, 2014 (공저)
〈일기로 본 조선〉글항아리, 2013 (공저)
〈선비의 멋, 규방의 맛〉글항아리, 2012 (공저) 등 다수

· 역서
〈열녀전〉글항아리, 2013
〈여사서〉도서출판 여이연,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