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롱 · 넘기스트..우리가 잘 몰랐던 무대 뒤 '배후자들'
입력 2017.12.18. 11:46 수정 2017.12.18. 14:26
[한겨레]
오케스트라 소속 ‘악보전문위원’
구입·내용 수정에 저작권 살펴야 연주자 매니저 구실 ‘스테이지맘’
불편사항 처리하고 행정지원도 공연장서 아역배우 관리 ‘샤프롱’
음식·건강·심리 챙기는 부모 역할 공연때 악보 넘기는 ‘페이지터너’
튀지 않고 연주자와 호흡 맞아야 악기상태 관리하는 ‘악기테크니션’
온도·습도 맞추고 조율·운반까지
공연장에서 제작 스태프는 ‘무대 뒤 유령’이다. 깜깜한 곳에서 더 까만 옷을 입고 일하며, 조명이 비추지 않는 곳에 없는 듯 서 있다. 화려한 무대를 위해 더 일찍 나오고 더 늦게 들어가지만 커튼콜 때 쏟아지는 박수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완벽한 무대의 배후자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무대의 완성도에 필수적인 역할들을 소개한다.
■ ‘악보’를 관리하는 ‘악보전문위원’ 클래식 공연에서 악보는 드라마 대본과 같다. 지휘자가 공연 프로그램을 결정하면 그에 맞는 악보가 준비돼 연습실과 공연장에 배치된다. 이때 악보를 관리하는 이가 악보전문위원이다. 김보람 서울시향 악보전문위원은 “악보의 구매와 렌털부터 연습과 공연장에서 수정되는 내용까지 반영해 악보를 챙기고 연주자들에게 설명해주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연주자가 무대에 오르기 전 보면대에 악보를 펼쳐놓기도 하고, 콘솔에서 요청이 있으면 악보를 보다가 합창단이 조명을 받아야 하는 순간을 알려주기도 한다. 음악 전공자로 악보전문위원이 된 지 12년이 됐다는 김 위원은 “악보 관리자라고 하면 악보 꺼내주고 복사하는 일이라 생각하는데 저작권부터 챙겨야 할 일이 많다”며 “악보를 읽을 줄 아는 것은 물론 악기를 하나 이상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나 초연하는 현대음악은 표기법이 난해해 악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다. “탁구공을 피아노 현에 떨어트리거나 쇠사슬을 차르르 소리 내게 하는 기법을 그림이나 글로 표시해 놓은 악보를 보면 연주자들이 난감해한다. 이럴 때 작곡가를 대신해 설명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휘자나 솔리스트의 요구에 따라 악보를 새로 그릴 때도 있다.”
오랜 기간 일하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다. “해외에서 악보를 주문했는데 북한으로 보내기도 하고, 사우스(South)만 보고 사우스아프리카로 악보가 간 일도 있다. 야외공연의 경우 비와 바람이 제일 두려운데 경회루에서 악보가 날아가 연못에 빠지면서 연주자가 앞사람 악보를 보며 연주하는 아찔한 일도 있었다.”
서울시향의 악보위원은 단 두 명뿐이다. 서울시향처럼 규모가 크지 않은 곳은 악보전문위원이 없는 경우도 많다. 김 위원은 “단원 100명을 혼자 상대해야 하는 일”이라며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도 자격 조건 중 하나”라고 말했다.
■ 연주자들 컨디션 살피는 ‘스테이지 맘’ 무대 뒤에서 엄마처럼, 매니저처럼 연주자를 챙겨주는 스태프를 외국에선 ‘스테이지 맘’이라고 부른다. 서울시향엔 ‘퍼스널 매니저’라고 해서 스테이지 맘의 역할을 하는 스태프가 있다. 이들은 단원들의 출석 관리부터 객원 연주자 섭외, 휴가원 처리 같은 행정 지원을 도맡는다. 공연장에서는 무대 뒤편에서 입장 시간 공지, 무대 위 빈자리들을 확인하고, 인터미션 시간에 공연자들의 불편사항을 접수해 처리해준다. 공연이 끝나면 단원들에게 공연에 대해 설문조사도 한다. 퍼스널 매니저인 기획팀 윤수연 대리는 “외국에서는 독립적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며 “서울시향은 단원도 많고 공연 횟수도 많다 보니 퍼스널 매니저를 두고 있지만 순환보직이어서 전문적으로 이 일만을 하고 있진 않다”고 말했다.
퍼스널 매니저는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외국인 단원과의 대화를 위해 영어 능력이 필수다. 무대 세트업 할 때 아픈 연주자가 있으면 대타를 구할지 빠르게 판단해 대책을 마련하고, 악기나 악보를 추가로 준비하는 일도 맡는다. 윤 대리는 “예술조직에 특화된 직업이나 해외에는 다 있는 직업”이라며 “오케스트라가 성장하는 과정이라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꼭 필요한 포지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아역배우들의 공연장 부모 ‘샤프롱’ ‘샤프롱’은 과거 젊은 여성이 사교장에 나갈 때 따라가 보살펴주던 사람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현재 공연계에서는 아역배우를 관리하는 스태프를 일컫는다. 강제 조항은 아니지만 <빌리 엘리어트> <킹키부츠> <서편제> 등 아역배우가 나오는 뮤지컬은 샤프롱을 고용해 아이들을 관리하는 추세다. 아역배우의 부모는 원칙적으로 연습실과 분장실 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공연장에서 아이를 보호하는 것은 샤프롱의 몫이다. 부모는 콜타임에 맞춰 아이를 샤프롱에게 인계하고, 연습 및 공연이 끝나면 다시 샤프롱이 부모에게 아이를 인계한다.
다음달 공연을 앞둔 <킹키부츠>엔 9~12살 4명의 아역배우가 있다. 배우이자 영어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으로 샤프롱이 된 현재은씨는 “연습과 공연 때 아이들의 밥도 챙기고, 건강 상태 등을 살피는 등 공연장에서의 부모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빌리만 5명으로 아역배우의 비중이 큰 <빌리 엘리어트>엔 샤프롱이 6명이다. 모두 의상, 소품 등 공연 관련 경력을 1년 이상 갖춘 이들이다. 배인숙 샤프롱 팀장의 경우 보육교사와 정교사 자격증도 갖고 있다. 배 팀장은 “작품에서 아이들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대본 숙지, 무대 위 동선, 소품 등은 물론 심리 상태까지 신경 쓰고 있다”며 “아이들에게 설명할 때 공연 경험이 도움 된다”고 말했다. “개막 첫날 공연을 무사히 끝낸 아이가 무대에서 내려와 와락 껴안아줬을 때 울컥했다”는 그는 부모들과 소통하는 일을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로 꼽았다.
■ 무대 위 숨은 연주자 ‘페이지터너’ 주인공과 함께 무대 위에 서지만 ‘그림자’여야 하는 스태프도 있다. 실내악 같은 클래식 공연에서 연주자 옆에서 악보를 넘기는 ‘페이지터너’다. 국내에서는 쉽게 ‘넘순이’ ‘넘돌이’ ‘넘기스트’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주로 음악 전공자나 공연기획사에서 악보를 읽을 줄 아는 이들이 이 역할을 맡는다.
페이지터너는 연주자와의 호흡이 중요하다. 연주자만큼 악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제대로 악보를 넘길 수 있다. 페이지터너의 실수가 공연 전체의 실수로 이어질 수 있어 연주자들은 페이지터너를 신중하게 고른다. 한 클래식 기획사 관계자는 “공연을 앞두고 소속 아티스트가 페이지터너와의 호흡이 맞지 않는다며 부탁을 해 갑자기 검은 재킷을 빌려 입고 무대에 오른 적도 있다”고 말했다.
숨은 연주자로 불릴 만큼 중요한 역할이지만 주인공이 아니기에 무대 위에서 튀는 건 금물이다. 연주자보다 늦게 입장하고 늦게 퇴장하며, 관객의 눈에 띄지 않게 연주자의 왼편 후방에 앉아 왼손으로 악보를 넘긴다. 무대가 끝난 뒤 쏟아지는 박수에 답례해서도 안 된다. 음악에 취해 악보를 놓치는 건 최악의 실수다.
연주에 방해되는 요소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요즘은 태블릿피시나 전자악보를 사용하는 연주자들도 있다. 국내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종종 아이패드를 사용한다. 그러나 아직 클래식 공연 현장 전반에 대중화되지는 않았다. 클래식 공연장의 한 관계자는 “디지털 제품은 에러가 나거나 갑자기 방전되는 경우도 있어 연주자들이 아직은 종이 악보를 더 선호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 악기 컨디션을 관리하는 ‘악기테크니션’ 현재 공연 중인 작품은 아니지만 음악을 소재로 한 뮤지컬 <원스>는 악기도 주인공이었다. 별도의 오케스트라 없이 배우 12명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다 보니 피아노·기타·만돌린 등 악기 종류만 16종, 여분 포함 50대가 공연에 쓰였다. 악기 대부분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데다 겨울에 작품이 개막하면서 악기 보관을 위해 온도와 습도를 맞추는 게 중요했다. 제작사인 신시컴퍼니 관계자는 “악기의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악기방을 따로 마련하고, 악기 상태를 수시로 관리하는 악기테크니션을 두었다”고 말했다. 당시 악기테크니션으로 일한 기타리스트 경현석씨는 “외국 록 밴드의 공연에서는 상주하는 스태프인데 우리나라에는 없어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내가 그 일을 맡게 됐다”며 “악기 관리, 조율, 악기 운반까지 맡아 했다”고 말했다. 공연이 시작되면 그도 무대 위 연주자와 같은 처지다. 악기 튜닝이 잘못되면 공연을 망칠 수도 있고, 공연 중 줄이 끊어지는 상황도 대비해야 한다. 경씨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실연자의 위치로 접근할 수 있어 유리했다”며 “악기가 주인공이 되는 무대에선 꼭 필요한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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