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산악인 오은선이 히말라야 칸첸중가봉을 마지막으로 하여 여성 산악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일이 있었다. 1997년 가셔브롬 2봉을 시작으로 한 등정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는데, 아다시피 산악계와 일부 언론의 ‘등정 실패 의혹 제기’에 대해 오은선은 제대로 항변하지 못한 채 사안이 일단락되었다. 기억하건대, 과연 칸첸중가의 정상을 제대로 밟기는 했느냐 하는 사실 그 자체의 확인도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히말라야 고봉 14좌를 경쟁하듯이 ‘누구보다 빠르게’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한국 산악계의 일부 경향에 대한 비판도 크게 일었었다.
그 무렵 나는 오은선은 물론이고 그 높은 곳에 오른 대부분의 산악인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인의 기상’ 같은 것을 말할 때 몹시 안타까웠고 대부분의 언론 역시 ‘의지의 한국인 세계 정상에 서다’라는 식으로 보도할 때 너무도 씁쓸하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말하기야 쉬운 얘기지 어디 8000m 히말라야가 인간이 범접할 만한 세계란 말인가. 혹자는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에베레스트에 줄을 서서 순서대로 올라갔다 내려온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대다수는 4000m의 베이스캠프에서부터 탈수에 체력 저하로 누워 있기 십상인 곳이다.
그런 곳! 인간이 도저히 오르기 힘든 곳, 아마도 날카로운 바람과 무서운 눈이 엄습하고 햇빛조차 공포스러운 그 곳! 누구나 오를 수 없기에 당연히 주목받아 마땅한 고봉! 신의 선택에 의하여 극소수의 한 명으로 그런 곳에 발을 디딘 사람이라면 ‘한국인의 기상’ 같은 판에 박은 말보다는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고 디디지 못한 그 곳의 공기와 풍경의 압도적인 세계를 한마디라도 말해줄 만하지 않은가. 국내의 이렇다 할 산도 제대로 올라가보지 못한 나는 그 아득한 히말라야 고봉을 오른 사람들로부터 경이적이고 숭고한 그 높은 세계에 대해 듣고 싶었다. 그러나 좀처럼 듣기 어려웠다. 그게 아쉬웠다.
‘동계스포츠는 공포와의 싸움’
며칠 후면 개막하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도 다를 게 없다. 스포츠는 쏙 빠져 있다. 동계스포츠 각 종목의 독창적인 세계, 그 미학, 그 종목만이 가지고 있는 경이로운 순간들. 이런 것에 대한 기사나 인터뷰를 좀처럼 보기 어렵다.
그러던 중 지난해 말 <경향신문>의 양승남 기자가 쓴 ‘동계스포츠는 공포와의 싸움’을 인상 깊게 읽었다. 신문지면이라는 제한된 매수 안에서 이 기사는 동계스포츠 그 자체에 내재된 운동원리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의 순간들, 그리고 그 공포와 격렬함을 이겨내야 하는 선수들의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기술에 대해 짧게나마 다뤘다. 반가웠다. 기사에 따르면, 쇼트트랙의 새뮤얼 지라드 선수는 “스키점프는 많은 연습을 해야 하고 하늘을 난다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도 어렵다”면서 “그건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 것이다. 사람이 그 어떤 추진체에 의지하지 않고, 더욱이 그 어떤 안전장구도 없이 점프대를 신속하게 미끄러져 내려와서는 100여m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다. 세계신기록은 2015년 스키점프 월드컵에서 페테르 브레브치(슬로베니아)가 기록한 250m다. 게다가 스키점프는 무조건 멀리 날아간다고 해서 순위가 좋은 게 아니다. 도약, 비행, 착지의 전 동작 과정에서 선수가 취하는 미세한 손끝 하나, 양발의 모양 등이 다 채점 대상이다. 그런 세부 사항을 최고 수준으로 지키면서 저 멀리 날아가야 한다.
썰매 종목은 어떤가. 봅슬레이와 루지와 스켈레톤이 있다. 평균적인 수치로 보면 봅슬레이가 가장 빠르다. 시속 150㎞를 넘나든다. 그러나 어쨌든 썰매 안에 들어간다. 루지와 스켈레톤은 작은 썰매 위에 눕거나(루지) 엎드려서(스켈레톤) 시속 130㎞에서 140㎞를 넘나들며 내려가야 한다.
이 셋 중 무엇이 가장 무서울까. 다른 종목 선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스켈레톤이 가장 두렵게 느껴진다. 루지는 동료도 있고 하다못해 자기 발끝이라도 보면서 내려가지만 스켈레톤은 머리로 밀면서 내려가야 한다. 눈 앞에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한 코스와 그 위험천만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공기들뿐이다. 그것을 시속 140㎞로 얼굴로 들이밀면서 내려가야 한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동시에, 그런 세계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수많은 선수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평창올림픽이 갖는 다양한 의미들, 무엇보다 남북한 단일팀으로 집중된 평화에 대한 갈망을 비롯하여 강원도의 경제적 발전이나 선수 개개인의 소망 등이 바로 이러한 개별 종목의 특수한 미학 위에서 이뤄진다. 그러니 개막 이후 각 종목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휴먼스토리나 폐막할 때 남북한 단일팀이 가져다 준 여러 차원의 의미 등을 다루더라도 우선 며칠 후 개막하게 되면 무엇보다 개별 종목 그 자체의 원리와 미학이 널리 알려져야 한다. 아마도 실제 경기가 진행되면 방송이나 시청자 모두 우리로서는 조금 낯선 ‘동계 종목’의 놀라운 세계에 자연스레 빠져들 것이다. 이럴 때 덮어놓고 ‘한국인의 기상’보다는 그 세계 자체의 원리와 그 세계에 몸을 던진 선수들의 미학에 우리는 더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두 권쯤 책이 필요하다. 동계올림픽을 위해서 책까지 읽어야 하나 싶지만, 꼭 읽지 않더라도 스포츠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으며 미학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 정도는 생각해봄직하다.
우선, 근대 스포츠의 비밀을 파헤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수제자인 에릭 더닝이 쓴 <스포츠의 문명화>가 있다. 스포츠는 문명화 과정에서 억압된 공격성을 비적대적이며 합법적인 경쟁으로 제한적이나마 표출하는 영역이다. 그 감정과 행위가 때로는 국가, 기업, 미디어에 의해 억지로 생산되거나 강제로 차단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열광에는 현대의 억압에 도전하는 다양한 열망이 뒤엉켜 있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조금 낯선 ‘동계 종목’의 놀라운 세계
그러나 이 꼭지의 의도에 따르면, 이 책의 서문은 더닝이 엘리아스의 지도를 받아 수십 년에 걸쳐 스포츠라는 중요한 ‘사회적 사실’을 분석해 나가는 지적 여정이 품위 있게 묘사되어 있다. 더닝은 스승이 어떻게 자신을 사회학으로 인도하고 또 스포츠(특히 축구)라는 학문적 과제를 함께 탐색하였는가를 감동적으로 술회한다. 무엇보다 엘리아스는 자신의 한계마저 뛰어넘으려는 제자의 놀라운 상상과 제안을 승인한다.
그리고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한스 굼브레히티의 <매혹과 열광>이다. 이 책은 스포츠와 스포츠 선수들을 철학적·미학적·문학적 분석을 활용하여 독자들을 제목 그대로 매혹과 열광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 자신 열렬한 스포츠광인 한스 굼브레히트는 서문 격인 ‘프롤로그’에서 스포츠에 열광했던 자신이 이력을 회상하며 ‘그’라는 화자를 앞세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스포츠는 상황이 전개되고 몸을 통해 어떤 형태가 드러나는 그 실제 시간과 실제 장소에 참여하는 경험이다. 물론 자기 마음에, 심지어 몸속에 깊이 각인된 스포츠의 기억도 있다. 처음에는 절대 할 수 없었던 어떤 동작을 다시 재연해보고자 하는 충동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런 기억들이 늘 배경에 머물러 있다가 가끔씩 갑작스럽게 떠오르면 실제로 스포츠 경기를 보는 순간보다 더 강렬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은 없다는 확신이 기분 좋은 그리움이 되어 그에게 생겨났다.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그러한 기억이 다시 울려나오면서 그 경험은 좀 더 복합적이 되고 더욱 다채로운 소리와 리듬이 더해지며, 나이가 들수록 왠지 더 강렬해졌다.”
어떠한가. 우리 모두의 경험들, 스포츠를 통하여 우리 각자의 몸이 치렀던 성장의 순간들, 세속의 숭고했던 순간들, 열렬했던 감동의 순간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더욱이 이제 막 개막식을 하려는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말이다.
*2018.2.7. 주간경향 [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에 실린 글로 공유하고자 올립니다. 에릭 더닝의 <스포츠의 문명화>와 한스 굼브레히티의 <매혹과 열광>-썰매 종목, 봅슬레이와 루지와 스켈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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