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항저우 악왕묘(岳王廟)에서- 사실(史實)과 해석 |
이 만 열(숙명여대 명예교수) |
지난달 말에 〈2018 유홍준과 함께하는 창비 중국답사〉에 동행, 상하이(上海), 자싱(嘉興), 항저우(杭州), 하이옌(海鹽)과 사오싱(紹興) 등을 다녀왔다. 이곳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도 관련 있는 지역이어서 중국의 인문 기행과 독립운동 답사가 겹쳐졌다. 노신(魯迅)·채원배(蔡元培)의 고향에다 육유(陸游)·당완(唐婉)의 애환을 담은 심원(沈園), 왕희지(王羲之)와 관련된 난정(蘭亭)이 있는 사오싱은 처음 가보는 곳이라, 호기심도 없지 않았다. 참가한 분들이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이어서 3박 4일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주전파 악비와 주화파 진회의 대조적 운명 항저우의 관광 코스에는 악비(岳飛, 1103~1142)의 사당 악왕묘(岳王廟)가 빠지지 않는다. 악비는 남송(南宋, 1127~1279) 때 북쪽 여진족 금(金, 1115~1234)나라의 침략에 맞선 용맹한 장군이다. 그는 20세가 될 즈음(1122) 의용군으로 송(宋, 北宋 960~1126)의 수도 가이펑(開封) 방어에 공을 세웠다. 그의 활동은 북송의 멸망과 남송(南宋, 1127~1279)의 개창 시기에 걸쳐 있다. 1126년 ‘정강의 변’(靖康之變)으로 송의 두 황제 휘종(徽宗)·흠종(欽宗)과 왕족·관료들이 포로가 되어 만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수도 가이펑에 있지 않았던 휘종의 아홉째 아들 조구(趙構)는 남쪽으로 옮아가 송나라를 재건했다. 이가 남송의 고종(高宗)이다. 현재적 요구에 따라 역사 해석 달라져 필자는 대학 시절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 선생의 동양사 강독을 통해 악비의 구국활동에 접했다. 노학자께서는 악비와 진회에 대해 역사적 포폄(褒貶)을 엄격히 했는데 필자의 역사의식은 그쯤에서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악왕묘 앞에서 전문가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역사인식의 변화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필자의 둔감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 변화가 한족이 아닌 원(元)·청(淸) 시대에 이뤄졌다면 이해할 만하지만, 현재 중국 학술계의 ‘악비논쟁’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듣고는 필자의 둔감을 실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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