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혁신, 민중의나라

가난의 대물림 넘어 가난의 대올림

소한마리-화절령- 2018. 8. 19. 10:12

가난의 대물림 넘어 가난의 대올림

김태훈 기자 입력 2018.08.19. 09:35

[경향신문] 자녀의 가난이 부모로 전이되는 시대… 청년세대 소득감소가 부모 부담 키워일자리를 잃은 한 노인이 아파트 경로당 복도를 지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일자리를 잃은 한 노인이 아파트 경로당 복도를 지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가난은 전염된다. 가난한 부모의 자녀는 자라서도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다. 부모세대에서 자녀세대로 이어지는 이 가난의 ‘낙수효과’는 이미 한국 사회의 익숙한 자화상이 됐다. 그리고 이제는 방향이 뒤바뀐 새로운 전염이 나타나고 있다. 자녀세대의 가난이 부모세대에까지 옮겨가는 모습이다. 청년세대의 소득감소 때문에 부모세대의 주머니도 빠르게 가벼워지는 양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청년층의 낮은 소득과 실업, 고용 안정성이 낮은 일자리 문제가 청년세대의 문제를 넘어 부모세대의 가처분소득 감소로 거슬러 올라가는 마이너스의 ‘분수효과’로까지 번지고 있다.

또래의 적잖은 청년들이 그랬듯 김범석씨(29)도 한때 열풍이 불었던 가상화폐 투자에 빠졌다. 결과는 신통찮았다. 마이너스 30%가 넘는 손실을 보고 눈물을 머금으며 손절매했다. 한동안 ‘멘탈 붕괴’에 시달리던 김씨는 그나마 비교적 빠른 손절매로 더 큰 손해를 막았다는 점을 위안 삼아 마음을 추슬렀다. 전 직장에서 퇴사하며 받은 퇴직금 전부를 쏟아붓지 않아 적으나마 통장 잔액이 남아있다는 점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김씨는 “친구들이 (가상화폐 투자로) 돈을 벌었다는 소리가 마음에 불을 댕겼던 것처럼, 친구 누구는 대출까지 내서 투자했다가 폭락해 빈손이 됐다는 소식이 기쁘진 않아도 묘한 위로를 준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투자에 성공해 부모님댁 냉장고를 바꿔드리기로 한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주식투자도 해본 적 없는 김씨와 주변의 친구들이 너나 없이 가상화폐거래소 계정을 만들게 한 것은 ‘사정이 좀 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작은 전자기기와 부품 유통업체에 다니던 김씨는 오르지 않는 월급과 점점 높아져만 가는 노동강도를 버티기 힘들어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 후 잠시 숨을 고르며 업종을 바꾸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던 차에 가상화폐 열풍이 불었다. 평소 같았으면 쥐꼬리만한 월급 때문에 적금 넣을 생각도 못하던 김씨도 큰 액수는 아니지만 퇴직금이라는 약간의 여윳돈이 생기니 욕심이 났던 것이다. 김씨는 수중에 남아있던 퇴직금을 쪼개 가상화폐를 샀고, 잠깐은 가격 상승으로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지없이 폭락함에 따라 손실을 봐야 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자신보다도 더 딱한 사정들이었다. 집안사정도, 직장 월급도 엇비슷한 친구들 중에서 가상화폐 투자로 돈을 날려 온집안이 거덜나게 됐다는 얘기를 김씨는 여러 번 들었다. 김씨는 “한 친구는 부모님이 이사 잔금 치르려고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을 자기 은행계좌에 넣어뒀다가 투자를 해서 거의 다 잃었다. 결국 부모님 전세계약금까지 손해보고 좁은 집으로 옮겼다”며 “남의 일 같지가 않은 게, 그냥 투자에 실패해서 손해본 것보다는 주변의 우리 나이대 애들이 온종일 회사에서 일해서 얼마 안되는 월급 모아둔 걸 날렸으니 더 마음이 짠하다”고 말했다.


현재 20~30대와 은퇴 앞둔 50~60대 투자 실패처럼 한 방에 가진 돈을 털리는 일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청년세대는 이미 가난하다. 오히려 투자에 눈을 돌릴 정도의 여유도 없는 탓에 부모세대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부모세대라고 마냥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20~30대 청년층의 부모세대인 50~60대는 은퇴를 코앞에 두고 있거나 이미 이전 직장에서 퇴직해 새로운 살 길을 찾아야 하는 시점에 있다. 소득이 늘거나 적어도 안정돼 있는 다른 연령대에 비해 가장 큰 소득감소를 겪는 두 연령대가 바로 청년세대와 그들의 부모세대인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청년층 경제활동 제약의 5대 특징과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두 세대가 함께 처한 현실과 ‘소득감소의 전이현상’이 잘 나타나 있다. 30세 미만 청년가구주의 가처분소득은 2013년 2963만원에서 2016년 2814만원으로 5% 감소했다. 전체가구 평균이 같은 기간 3833만원에서 4118만원으로 7.4% 증가한 데 비하면 사회에 진출하는 시기의 청년층 경제사정은 날이 갈수록 악화돼 왔던 것이다. 여기엔 소득감소와 함께 대출이자 등으로 대표되는 비소비지출이 늘어난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청년가구주의 평균 부채는 2013년 1401만원에서 지난해에는 2385만원까지 늘었다. 같은 기간 전체 가구의 평균 부채 증가속도보다 3배가량 빠르게 부채가 늘어난 것이다.

여기에는 청년층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데 더해 취업을 하더라도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청년들이 늘어난 영향이 크다. 비정규직 일자리에서의 청년 채용이 확대되고 있지만, 비정규직의 전체 임금 대비 청년층 임금수준은 정규직에 비해 하락폭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신규 채용된 청년층 가운데 비정규직 비중은 2007년 54.1%에서 2015년 64.0%로 확대됐다. 반면 비정규직 부문에서 전체 임금 대비 청년층 임금 비율은 2011년 78.3%에서 2016년 75.9%로 줄었다. 정규직에서는 같은 기간 하락폭이 72.2%에서 71.2%로 소폭이었던 것을 보면 청년층이 비정규직으로 더 많이 유입되고 있지만 오히려 1인당 임금수준은 더 낮아지고 있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좋은 일자리를 구하고 적정한 소득을 받는 데 실패한 청년층이 늘면서 이들 세대를 부양하는 부모세대의 가처분소득 또한 줄어드는 데 있다. 청년세대에서는 본인의 소득이 줄어들수록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이른바 ‘캥거루족’ 비율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월평균소득이 301만원 이상인 고소득 청년취업자의 캥거루족 비율은 12.0%에 그쳤지만, 100만원 이하 저소득 청년취업자 중 캥거루족 비율은 81.9%로 크게 차이가 났다.

게다가 가난한 청년세대를 부양하는 부모세대는 은퇴 후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면서도 오히려 소득은 청년세대처럼 줄어드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현대경제연구원의 홍준표 연구위원은 “60대 이상 취업자 수는 2015~2016년 1년 동안 366만명에서 388만명으로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이들 가구의 월평균 경상소득은 283만원에서 281만원으로 감소했다”면서 “이들 연령층의 일자리가 ‘화이트칼라’에서 ‘단순노무직’으로 대체되면서 일자리의 질적인 측면이 악화되고 소득도 줄어드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가난한 청년세대를 자녀로 둬 부양부담이 커지게 된 부모세대에 가난이 전이된 결과는 결국 소비를 줄이는 쪽으로 나타난다. 특히 청년세대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부모 집에 얹혀 살면서 위기를 버텨내고 있다. 청년가구의 소비지출 액수는 2013년 2299만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16년 1869만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집값 상승에 따른 주거비나 원리금 상환부담이 늘어났기 때문에 정작 식음료비나 보건비용처럼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소비를 줄인 것이다.


독립했던 청년들도 다시 부모 집으로 주거빈곤 문제를 겪는 청년층이 점차 좁고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몰리다 못해 부모 집으로 되돌아가는 세태도 이러한 양상을 반영한다. 이미 독립생활을 하던 청년들이 교통 불편과 시간 부족을 감수하고 주거비용 절약에 나선 것이다. 직장인 조모씨(32·여)는 하루 왕복 4시간을 출퇴근하기 위해 길에서 보낸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집에서 서울에 있는 직장까지 왔다갔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2년 전까지 서울에서 함께 살던 조씨의 가족들은 조씨 아버지의 퇴직과 함께 주거비용도 아낄 겸 아버지와 연고가 있는 안산으로 이사했다. 이사 후 서울의 직장까지 출퇴근이 쉽지 않던 조씨는 혼자 나와 직장 주변의 원룸을 구했다. 그러나 다니던 직장이 문을 닫고, 이어서 옮긴 직장에서도 나와야 할 일이 생겨 비싼 월세를 감당하기 어렵게 됐다. 새롭게 구한 지금의 일자리는 오후 6시 정시퇴근이 보장되는 곳이지만 월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조씨는 결국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본가에서 출퇴근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줄일 수 있는 것은 다 줄여서 생활하고 있는 조씨지만 지금 가장 답답한 것은 ‘시간빈곤’과 장래에 대한 불안이다. 퇴근 후 새로운 업종에 필요한 자격증 준비 때문에 학원에 갔다가 집까지 돌아오면 말 그대로 누워 자기 바쁘다. 하루 4시간에 달하는 출퇴근시간은 줄일 수가 없는데 당분간은 서울로 이사하는 것도 꿈꾸기 어렵다. 부모님이 결혼을 앞둔 언니의 결혼자금을 마련하기에 바빠 조씨의 월세를 도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씨는 “당장 내가 버스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지금 내가 버는 월급 수준으로 장래를 생각해보면 딸 둘뿐인 부모님의 노후자금 마련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지 않을까 싶어 더욱 마음이 편치 않다”고 말했다.

조씨는 경제적 사정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결혼을 준비하는 언니를 보며 결혼에 필요한 돈을 모을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된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고 부모님과 계속 사는 것은 더 큰 고민이다. 조씨의 아버지는 은퇴 전 직장에서의 인맥으로 잡았던 일자리를 최근 잃게 됐다. 자녀세대의 경제적 불안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모세대의 어려움이 갑작스레 닥친 것이다. 지금까지는 조씨의 사정이 어려워질 때마다 부모님이 적게나마 도움을 주곤 했지만 이제는 유일하게 수입이 있는 조씨가 부모님을 부양하는 모습이 됐다. 하지만 조씨가 다니는 직장 또한 장래가 불투명하고, 건강이 안 좋은 어머니가 큰 병으로 도지면 목돈이 들어갈 병원비와 간호비도 걱정이 된다. 조씨는 “부모님은 걱정 말고 결혼이나 하라시는데 지난번 엄마가 입원했을 때 옆에서 돌볼 사람 챙길 돈도 없어서 내가 직장에 휴직계 냈던 걸 생각하면 마음 놓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조씨의 경우처럼 한국 사회에서는 청년들이 부모와 함께 사는 비율이 높기 때문에 청년층의 빈곤문제는 그간 다소 가려진 측면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청년층의 저소득과 빈곤에 처한 현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문제와 더불어 최고 수준의 노인빈곤 문제까지 겹치면 향후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우리나라 청년의 다차원적 빈곤 실태와 함의’ 보고서를 보면 2014년 기준 한국의 청년빈곤율은 9.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청년빈곤율 13.9%보다 낮다. 주로 문제가 되는 노인빈곤율(48.8%)보다 훨씬 낮다. 그러나 빈곤율은 가구소득을 기준으로 집계되기 때문에 부모와 동거하는 청년의 비율이 84.9%에 달하는 한국의 현실을 보지 않으면 청년층 빈곤문제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착시현상을 부를 수 있다.

청년세대 빈곤이 결국 집안 빈곤으로 보고서를 쓴 보건사회연구원 김문길 부연구위원이 “한국의 청년빈곤율은 과소 추정돼 있다”며 “실제 OECD 자료를 이용해서 청년빈곤율과 부모와 동거하는 청년의 비율을 비교해보면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위원이 설계한 ‘다차원적 빈곤 측정’ 모델에 따르면 청년층 다차원 빈곤율은 3.2%로, 전체 빈곤율(2.9%)보다 높다. 청년층 빈곤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해 경제력·주거·건강·고용 등에 걸친 19개 지표를 통해 빈곤율을 다차원적으로 측정해 보면 청년층의 경제적 현실은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나온다는 분석이다.

김 위원은 “청년층의 경제력과 안정성 등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취약성은 향후 안정적인 성인으로 이행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적 관심이 필요하다”며 “다차원적 빈곤율은 청년이 다른 세대에 비해 열악한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소득빈곤율보다 더 잘 보여주는데, 이는 현재의 청년세대가 미래의 빈곤세대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시사한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청년층이 미래의 빈곤세대로 이어지는 문제는 OECD에서 가장 높게 나타나는 노인빈곤 문제와도 직결된다. 가구 단위를 중심으로 집계되는 빈곤 통계에서 그간 노인빈곤 문제가 두드러진 것은 자녀세대와 떨어져 홀로 사는 노인 1인가구의 비중이 높았던 것과도 연관이 있다. 하지만 자녀세대와 함께 살고 있는 60대의 소득감소가 두드러지는 추세와 함께 이들을 부양해야 할 자녀 청년세대의 소득감소까지 겹쳐지면 이들 가구에서의 실제 빈곤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여지가 커진다. 청년세대의 빈곤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고령화 추세와 함께 늘어나는 노인 부모세대에 빈곤이 전이되고, 결국 부모와 자녀세대가 동반 빈곤에 빠지는 위기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소득감소에 대비해 60대 이상 세대에서도 비교적 질이 낮은 일자리로 몰리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상황은 이러한 위기를 반영한다. 청년과 부모세대를 중심으로 가처분소득이 정체되고 있는 와중에 특히 저소득층에서 근로소득 비중이 낮아지는 추세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세대를 통틀어 저소득층에서 특히 일자리 경쟁이 심해진 결과다.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은 복합적이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현대경제연구원 김천구 연구위원은 “가계부채 이자부담 증가에 대비해 가구에 대한 채무조정 및 회생제도를 확충하는 한편, 저소득층이 자립할 수 있도록 근로소득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건사회연구원 김문길 부연구위원도 “문제의 근원인 청년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재의 고용 위주 청년정책에서 벗어나 포괄적인 정책 접근과 함께, 부처별로 분산돼 있는 다양한 청년정책들을 통합적으로 관장할 수 있는 거버넌스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