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공간에서의 표현의 자유
- 유해사이트 규제와 그 정당성 문제에 부쳐 -
김은경(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 사회학박사)
1. 논의의 시작
21세기 벽두부터 전 세계는 '정보화'로 떠들썩하다. 미국을 선두로 선진 각국들은 정보산업 구축을 통해 새로운 패권을 다투고 있다. 인터넷 및 다른 텔레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로 인한 디지털 혁명은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새로운 사회영역을 등장시켰다. 이와 함께 각국은 사이버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범죄 및 분쟁문제의 조정과 해결을 위해 각종 규제 입법을 서두르고 있다.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정보통신망 규제와 관련한 법률로는 전기통신기본법·시행령·시행규칙, 전기통신사업법·시행령·시행규칙, 개정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등에 관한 법률·시행령 등이 있으며, 규제기구로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이하 정통윤), 정보통신부장관 등이 있다.
각종 규제입법을 통한 네트(net)에 대한 개입전략 중 가장 설득력있게 설파되고 있는 것은 바로 '청소년 보호'이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2001년 7월 1일부터 청소년 유해매체물에 대해 인터넷 내용 등급제가 시행된다. 이 제도는 정통윤의 법적 성격 및 규제대상으로서의 '불온통신' 규정의 모호성, 그리고 등급제의 구체적 내용이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있는 등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사상과 표현의 자유' 문제와 상당한 긴장과 갈등을 예고한다.1) 물론 이미 김인규씨 홈페이지 일부 삭제2), 아이노스쿨넷(iNoSchool.Net)3) 및 남성 동성애자 최대사이트 이반시티닷컴(www.ivancity.com) 등의 폐쇄조치4) 등 소위 '유해사이트'에 대한 규제 조치를 행한 '정통윤'의 활동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 나아가 네트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도 높다.5) 이와 같이 소위 "유해사이트" 규제와 관련하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대체로 정보사회에 대한 실용적 접근은 정책론적 틀속에서 제기되어 왔다. 정책분야에서 가장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문제는 정보사회의 핵심적 변화에 대한 과학적 분석틀과 방법론이 미비하여, 오늘날 정보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현상과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과연, 불건전한 사이트공간을 적절히 "통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다 근본적으로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컨텐츠의 "규제·통제"의 권한이 과연 국가에게 있는 것인가?6) 표현의 자유 문제는 차지하고서라도, 과연 사이버 스페이스상에서 일국적 문화지배를 구축하려는 전략이 실현가능한 시도인가? 타당성과 실효성이 지극히 의심스러운 네트의 개입 전략들을 통해서 얻게 되는 실제 규제목표는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디지털혁명과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이해로부터 거꾸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2. 사이버 스페이스는 현실세계의 덤인가?
여러 사회학자들은 최근의 사회변화를 과거 '산업혁명'에 비견하여 '디지털혁명'이라고 칭한다. 과연 디지털 혁명은 인류의 미래에 어떤 빛을 던져주게 될까? 정보사회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명암이 교차되는데, 낙관론자는 디지털 혁명이 '탈중심화', '전자민주주의의 실현(사이버테모크라시)'를 가져오게 될 희망을 보지만, 비관론자는 '판옵티콘의 전자감옥'의 현실화와 자본의 지배확장(cybernetics capitalism)을 목도한다.7) 분명, 디지털 혁명은 정보와 지식 자체가 생산요소로 등장하는 새로운 경제의 하부구조와 긴밀하게 연관된 문제이며, 디지털 혁명은 인간의 삶과 문화, 의식 전반에 새로운 사회구성양식의 변환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심리계와 사회계는 동화와 조절의 관계에서 상호의존적이며 동시에 상호작용적이다. 전통사회에서는 변화가 비교적 완만하여, 개인-사회의 homeostasis를 안정된 형태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사회로의 전환과 더불어 와해되었고, 다시금 산업사회 특성에 걸맞는 생산문법에 따라 생활문화와 인격의 재구성이 일어났다. 그러나 앞으로 정보화사회에서는 산업사회형 생활양식과 심리구조가 더 이상 적합성을 가질 수 없는 시스템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정보화' 또는 '정보사회'란 단순히 산업시대의 연장으로 파악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직은 산업사회형 문화 및 심리 코드를 대치할 만한 정보화사회형 코드가 안정적 형태도 현실화되지는 않은 상태며, 상당히 전환기적 공존시대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혁명과 함께 등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권력은 어디로 이동하는가? 과연 거대권력의 획일적 지배가 무너지고, 네트워크적 자유로운 소통구조에 힘을 얻은 자율적이고 독립된 주체들의 합의에 기반한 다원주의적 민주사회가 도래할까? 사이버스페이스의 출현이 실제로 권력이동을 준비하고 있는가?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는 권력이동의 조짐은 매스미디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PC통신은 즉각성과 현장성, 쌍방향성이라는 특성에 힘입어 매스미디어를 견제하고 이를 대체하는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매스미디어의 독점적 생산수단과 유통구조를 뒤흔들도록 미디어 생산소비자라는 새로운 사용자가 등장한다.
애초 상호소통의 공동체에서 출발한 네트의 공동체적 성격에 주목한 허번(Hauben)은 네트워크 사용자들이 자신들만의 생각, 제도, 공동체적 지향과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들을 네트의 시민(Net Citizen) 곧 네티즌이라 불렀다. 그는 '참여'와 그에 기반한 '공동체'라는 것이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허번의 네티즌은 공동체적 지향이 강한 개념이다. 공동체적 입장에서 볼 때, 네트는 서비스가 아니라 '권리'이다. 새로운 권력의 '씨앗'은 '지배', '통치'가 아닌 '협동'과 '나눔'의 평등사회를 지향한다(http://bulam.snut.ac.kr/~wipaik/essays/ junguni.html). 시민들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민주적 사회를 건설하는 초석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표현의 자유'가 그토록 중요해지는 이유는 바로 전자 민주주의 실현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어떤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최우선적 가치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전자프론티어재단(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의 공동설립자인 바를로의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A Cyberspace Independence Declaration)]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네트는 아주 빨리 상업화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의 상업적 도구화는 네트의 공동체적 성격을 퇴색시키면서 네트를 개인화(privatization)하고 있다. 이러한 상업적 탈정치화는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은폐되는 과정이며 자본의 지배가 자리잡는 과정이기도 하다. 점차 거대기업과 상업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사업가들이 새로운 네트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함과 동시에 네티즌의 영향력은 약화되고 단순한 서비스 이용자로 축소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의 지배영역이 가상의 공간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분명 디지털 혁명은 '사회적 테일러리즘'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측면을 갖고 있다. 자본이 주도하는 네트의 상업화와 각종 입법을 통한 국가의 네트 개입전략은 이러한 경향을 촉진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다. 과거 VTR 보급에 포르노영화가 일조한 것처럼, 인터넷 대중화에는 성과 관련된 정보가 한몫하고 있다. 자본에 의한 네트 상업화는 바로 성과 관련된 주제에서 가장 빨리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동시에 국가권력역시 '공공질서유지 또는 선량한 성풍속 기타 사회질서유지라는 명목'으로 네트 상품화의 일등공신인 "성"에 대한 통제를 통하여 개입망을 넓히고 있다. '성'은 자본이나 국가권력 모두 네트에 대한 개입·지배전략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성'을 매개로 절묘하게 제휴를 맺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트는 정보사용과 정보에 대한 접근권(access)과 소통(communication)에 대한 통제권을 누가 갖고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그야말로 혁명에 가까운 변화를 몰고 온다. 매스미디어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지배가 완성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틀을 형성한다. 텔리비젼은 '일대다(one-to-many)' 방식의 소통구조로서 자본주의적 지배방식이 미디어와 이데올로기 분야에서 재생산된 것이다. 거대방송사와 언론사의 의사소통공간의 단일화와 지배·독점은 시민사회의 공적 공간을 위협, 미디어를 통한 자본과 권력 지배가 안정화되었다. 기존의 매스미디어 모델에서 사용자는 정보의 사용과 대상에 대해 간접적이고 제한적 권한만을 갖는다. 정보전달 내용과 시간 및 전달의도를 "공공복리"라는 명분하에 사전, 사후로 검열하는 심의기관이 존재하는 매스미디어 시대의 사용자는 정보소비자에 불과할 뿐이다. 네트는 이러한 중앙집권적 매스미디어의 통제와 지배를 해체할 또 다른 힘을 가지고 있지만, 현행 국가권력의 개입과 자본의 지배를 통해서 일개의 매스 미디어로 전락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현재 유해사이트 규제를 둘러싼 담론들은 이러한 대립과 갈등의 국면을 단적으로 표상한다.8)
사이버 공간(소위 비트사회 또는 네트사회)에서의 사회구성방식과 소통방식, 그리고 가치정향성 등은 현실 세계와는 일정한 특유성과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으나, 이러한 개방성과 자율성, 그리고 창조성에 주목하지 않은 채, 기존의 형법적 체계나 원리를 그대로 적용한 범죄화 전략이나 규제는 사이버 공간의 자칫 현실세계(자본주의세계)의 덤으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짙다. 네트에서 이루어지는 상품화추세와 공동체화 추세는 이미 결정난 싸움이 아니라, 진행중이 과정이다. 우리의 실천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화되기 때문에, 아직 닫혀진 틀이 아니라 열린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3. 표현의 "유해성"과 검열
'표현의 자유'와 '유해성' 규정간의 딜레마와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포르노 검열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The Feminists Anti-Censorship Task Force or Feminists for Free expression)의 주장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들은 표현의 자유라는 명제가 포르노 규제에 우선한다는 입장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적 원칙과 관심에도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표현물의 복합적 의미가능성과 언어의 다의미성(multiplicity)으로 인해, 포르노는 여성 혐오만이 아닌 다른 메시지들도 전달한다. 그 안에는 여성에 대한 대상화, 상품화와 함께 환상도 있고 반항도 있으며 이 의미들은 실제의 세계와 허구의 세계를 넘나든다. 모든 여성들이 포르노로부터 같은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불법화하는 것은 성적 탐험 등과 관련한 성적 자유를 부정하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성적인 기쁨은 욕구의 억제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을 갖게 할 수 있고 종속의 판타지도 해방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포르노그라피가 다만 여성의 억압을 표현하는 일원적 담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애들러(Adler, 1996)에 의하면 포르노그라피의 규제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언어의 복합적인 성격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언어와 표현의 해석에 대한 매우 초보적인 이론에만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은 언어의 불확정성(indeterminacy)을 무시하고 모든 피해자들이 유해한 표현과 그렇지 않은 표현을 구분할 수 있고, '유해한' 표현은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도 가질 수 없으며 언어가 단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요컨대, 검열반대 페미니스트들은 맥키넌 등9)이 단순한 [자극-반응이론(SR Theory)]에만 기초하여 언어의 다의미성, 환상으로서의 포르노의 역할을 무시하고, 젠더(gender)의 문제에 집착한 나머지 인간의 본능적인 섹슈얼리티(sexuality)의 복잡성을 다소 비현실적으로 다루고 있고 비판한다.10) 그렇다면 이러한 페미니스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성의 해방과 권력증대(empowerment)를 주장하고자 하는 행위예술이나 비평 역시 규제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아이러니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특정 표현매체에 대한 규제와 이에 관한 실질적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유해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유해사이트로서 상징되는 포르노의 경우를 살펴보자. 흔히 포르노의 영향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과연 유해한가 아닌가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연구자들에게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Yes or No 식의 질문은 학문적으로 만족스러운 대답을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1) 첫째는 포르노적 서술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표현물은 미묘하게 절제된 성표현으로부터 노골적인 성표현, 더 나아가 성적 학대나 에로틱화된 성폭력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각 표현물이 통일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며, 작은 차이가 다양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한 점을 주의하지 않으면 모든 노골적인 성표현물을 한 그릇에 담게 되고, 그로 인해 그릇된 결론으로 나갈 수도 있다. 따라서 유해 표현요소들을 변별하여 분석적인 수준에서 경험적 연구를 추진하고 그 결과를 축적할 필요가 있다. '과연 어떠한 표현이 유해한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의 핵심이다. (2) 둘째, 영향력에 대한 연구가 어려운 이유는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대중매체의 영향력을 보더라도, 그림이라든지 말 또는 톤을 포함한 영화, 문학작품들은 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수용자들에게 다양한 영향력을 끼친다. 그 이외에도 영향력 분석에서는 사회인구학적 배경 및 인성, 그리고 접촉상황 등도 고려해야 한다. 변수들은 거의 무한이어어서 실제 조사에서는 제한된 수의 변수를 고려하게 된다. 영향력 연구의 가장 큰 어려움은 포르노 소비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차이가 매우 크다는 점이다. 개인의 도덕적 편향에 따라서 영향력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영향력의 연구결과를 절대화할 수는 없고 또한 그 변수들을 단순화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실험결과들의 일관성과 항상성은 주목할 만하다. 이제까지 도달된 實證的硏究結果를 보면, '性的 露骨性' 그 자체가 '有害性'을 곧바로 保證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포르노의 문제는 폭력의 강화이지 노골성이 아니다.11) 결국 포르노의 有害性 論議에서 중요한 것은 성적 노골성이 어느 정도인가(얼마나 벗었는가)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表現의 主題와 內容이 얼마나 暴力的이고, 反社會的·非人間的인가에 있다고 보여진다. 요컨대, 유해적인 영향의 문제를 고려하게 되면, 포르노 또는 '淫亂物'은 단지 性的 露骨性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性的攻擊性과 性的 物化의 관점에서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행법체계하에서는 '성적 노골성'은 '음란성'과 일정한 규범적 가치판단하에서 동일하게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음란성을 규정하는 현행의 방식은 적어도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성적 노골성과 음란성을 동일시하는 관점은 淫亂物과 藝術 또는 愛情煽情物(에로티카 erotica: 비폭력적, 비종속적인 노골적인 성표현물)를 구분할 수 없으며, 따라서 [표현의 자유] 또는 [선택의 자유]라는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영향력에 관한 연구결과들을 종합해 보면, '성적 노골성=음란성'이라는 단순도식은 지지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애정선정물(에로티카)의 표현양태와 방법은 분명히 음란물과는 다르며, 또한 그것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효과도 음란물과는 상이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법적 처리는 음란물과 차별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에로틱 리얼리즘에 입각한 성표현물에 대한 규제는 오히려 기본권(표현의 자유) 침해와 상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음란물을 정의하는 경우에 무엇보다 중점적으로 고려할 사항은 특정 표현물이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위배하고 있는가 이다. 이것은 이미 헌법의 제2장 <기본적 인권의 보장>에 의거하여 규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헌법의 '인간의 존엄성'에서는 인간은 인격으로서이지, "성적 소비물자"로서 서술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명백히 헌법에 위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앞서의 내용들을 담고 있는 성표현물은 헌법의 제2장 <기본적 인권의 보장>에 저촉된다고 볼 수 있고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양성의 평등한 관계 속에서 인간의 성과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애정선정물)은 '표현의 자유'의 틀 속에서 보장되어야 한다.
둘째, 성표현물에 대한 법적 규제가 '성적 노골성'에 제한되는 경우에는, 인간 존재를 다른 방식으로 더욱 타락시키는 표현물의 문제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현행법률이 인간 존재를 타락시키는 좀더 심각한 표현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성표현물에 촛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현행의 법적 규제와 그 관행은 성적 노골성의 측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민감한 반면에, 상대적으로 '폭력'의 묘사에 대해서는 얼마나 무방비하며, 심지어 좀더 '관용적'이기까지 한가에 대해 새삼 규제의 형평성에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성적 노골성'과 '폭력성'은 특히 청소년 문제와 관련하여 같은 수위에서 다루어지고 있지 않은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전쟁, 폭력, 살인 등으로 인간을 파괴시키고 제거시키는 행위를 매우 '멋진' 것으로 묘사하는 데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로 삼지 않으면서도, 몇 백년 이래로 인간의 자연스런 성적 활동을 표현·묘사하는 것을 '음란'으로 규정하여 범죄로 삼는 것은 상당히 역설적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역설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노골적인 성표현(물)'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청소년의 유해환경과 관련해서는 객관적이고 공평한 검증이 요구된다. 실제 해악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폭력을 수반한 성적 자극이다. 비록 성적으로 감각적인 자극요소가 교묘히 제거되어 있는 표현물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을 물화시키고 지배 및 억압 또는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그릇된 삶에 대한 기대나 관념을 갖게 하는 표현물이 미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은 음란물과 마찬가지로 지대하다. '想像'과 관련한 연구들은 성적 노골성에 대한 기계적인 검열은 오히려 '상상력'을 더욱 자극시키며, 그 효과는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상상이 실제보다 더 유혹적일 수 있고, 검열이 올바르게 시행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의도했던 것의 정반대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특정 주제와는 상관없이 직접적인 성기노출이 없다는 이유로 합법화되는 식의 검열은 재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히려 상상력과 결합하여 더욱 자극적으로 전달되고, 그릇된 관념의 강화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성적 묘사만 없으면, 비인간화된 성을 다루거나, 특히 '강간 신화' 등을 교묘하게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도 관용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현실의 포르노 규제는 가치전도된 문제의식 속에서 "무엇"을 "왜" 규제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배제시킨 채, 밑도 끝도 없는 방황을 계속하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표현매체에 대한 규제는 '해악'의 문제 못지 않게 민주사회의 중심원리인 '自由'의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에서의 '自由'는 특히 '表現의 自由'이고 따라서 '檢閱'의 문제와 직결된다. 개인적 자유와 마찬가지로 표현, 출판, 신념 등의 자유는 우리 사회에서 기본권으로 인식되며, 명백히 헌법에 보증되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자유가 특정 표현으로 인하여 위협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가령, 포르노 쟁점에서 보듯, 노골적인 성표현은 어떤 관념이나 지식 및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어서 진정한 '표현'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노골적 성표현이 합리성과 가치관념을 전달하지 않기 때문에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주장은 표현의 자유와 그 진정한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표현'은 합리적인 논쟁의 도구가 되지 못할 때라도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감정의 소통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명예훼손, 혐오, 폭동선동 등에 관한 많은 법률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중요한 문제는 특정 표현매체를 금지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더 제한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의 여부이다. 검열에 대한 발상의 출발이 무엇이든간에, 그 결과는 동일하다. 즉, '위험한' 사상, 섹스 뿐만 아니라 도덕, 정치, 예술과 삶에 있어서 '위험한' 생각에 대한 억압이 그것이다. 물론 모든 표현물이 해롭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검열의 작용 역시 포르노나 음란물의 영향력 만큼이나 사회에 해롭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검열은 인간의 자유를 줄이고, 의사소통의 자연스러움을 방해하기 때문에 해롭다. 따라서 표현의 유해여부 또는 규제여부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들이 사회와 자신에 대해 도덕적 책임성을 어느 정도까지 수행하는가라는 점이 핵심이다.
4. 유해 사이트 규제와 청소년보호 - 결론을 대신하여-
오늘날 청소년 유해환경 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의제이다. 그런 맥락에서 인터넷 등급제 도입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인터넷 등급제는 기본적으로 청소년 보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청소년보호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이데올로기로 '청소년 보호'가 계속 주장된다는 의구심이 있다. 그 근거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청소년 보호'의 이념이 아동인권에 대한 매우 낮은 인식, 소위 권위적 간섭주의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 문제가 보다 근본적으로는 권위주의적·비민주적인 사회구조, 적자생존의 원칙을 구조화한 사회체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현매체에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는 인상이 짙다. 무엇보다도 '보호의 이름아래' 청소년들의 문화적 욕망들을 억압하는데 전략적으로 집중하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근대적 시민혁명에서 표출된 '자유'의 이념이 인간의 자유가 아닌 '남자'의 자유였다고 폭로했듯이, 청소법의 이념에서 청소년의 자유는 성인의 세계와 미성년의 세계라는 자의적 이분법에 의해 삭제당하고 있다. 사실상, 욕망의 억압과 재배치 전략은 사실상 청소년들의 문화적 권리, 문화민주주의, 인권, 신체의 권리 등을 침해하는 동시에 사회적-정치적 담론에의 접근마저도 통제함으로써, 한국에서의 청소년은 '보호될 대상' 일뿐 '욕망하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없음을 천명한다. 또한 '보호'의 목표를 위해서 모든 현실세계의 구성물들을 '청소년보호/청소년유해'의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결국 성인의 세계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새로운 지배원리로서 기능하고 있다.
두 번째는 청소년 보호의 규제목표와 방법이 구체적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성 표현물 규제를 보자.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에서는 성표현은 최근의 청소년보호법에서 보여주듯 강력한 규제논리로 처리되고 있다. 각종 성표현물이 범람하는 문화적 상황은 특히 '청소년 보호'의 사회적 책무와 긴장관계를 이룬다. 여기에서 지배적인 담론은 한마디로 다음과 같다. "노골적인 성표현 또는 성적 자극은 청소년에게 유해한 영향을 미치며, 그것은 특히 성폭력 등 성범죄를 부추긴다". "담론적 사실"은 많은 경우 현실과정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데에 저해요인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들이 많은 경우 윤리적인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매체 수용을 둘러싼 일상적 생활과정에서의 경험과 실제를 경시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그러한 경험이 청소년들의 정체성 및 사회관계의 형성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검증된 바도 적고 또 구체화된 프로그램도 찾기가 어렵다. 이제까지 포르노에 대한 논의경향을 보면, 성적 노골성과 음란성을 단순히 일치시킨다든지 또는 혼동한다든지 하며 문제를 더욱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많았고, 더욱이 노골적인 성표현물의 부도덕성이라는 문제와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 내지는 해악의 문제를 서로 혼용하거나 매개개념없이 그대로 연결지워 논의하는 경향이 많았다. 하지만, 도의관념의 문제와 그 영향의 문제는 서로 별개의 것이다. 따라서 성표현물과 청소년 보호, 그리고 표현의 자유(기본권)간을 둘러싼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구체화시켜 더욱 심층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즉 ① 어떠한 표현이 왜 문제가 되는가, '선정성(성적 노골성)'과 '음란성' 그리고 '유해성'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② 특정 표현물을 '보는 것'과 구체적으로 '행위하는 것' 간에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그리고 ③ '어떤 표현물'이 '어떠한 영향력'을 지니는가 등이다.12)
무엇보다도 문화변동과 의식변동을 고려하여 청소년의 입장에서 등급의 기준이 조정되어야 한다. 현행 제도하에서는 청소년에 대한 유해성을 객관적으로 규정한다는 명분 아래에서 기성세대의 시각과 관점이 등급규정에서 관철되고 있다. 즉 무엇이 매체 수용자들에게 해롭다고 가정되거나 알려져 있는 것보다는, 전통적으로 무엇이 유해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는지에 기초하여 내용을 등급짓고 있다는 점이다. 즉 사회과학의 연구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어린이들에게 해가 되는지의 여부보다는 부모들이 무엇을 유해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아이들에게 보여주기에 적합하다고 여길 지에 초점을 맞춰 등급을 매긴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청소년들의 의식구조와 취향, 그리고 심리적·인지적 발달단계 등이 무시 또는 경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입법과 정책수립에서 반드시 고려할 점은 표현에 대한 규제논리는 자의적이고 특수 윤리적 판단에 근거함으로써 현실과 동떨어진 규범이 되어서는 안되고, 과학적 논증을 근거로 현실 타당성을 확보하는 일이다(2001.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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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터넷 내용등급제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점에 관해서는 2001년 6월 26일 [정부의 인터넷 내용규제와 표현의 자유,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포럼에서 발표된 홍성태 교수(2001)의 '인터넷 내용등급의 문제-인터넷 검열과 정보통신윤리위원회'를 참조. 토론회 자료집은 다음의 주소에서 얻을 수 있다: http://www.cyberculture.re.kr/resource/frame-1.htm.
2) 2001년 5월경, 한 중학교 미술교사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자기 부부의 누드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청소년의 성보호법에 관한 법률 제8조 제1항, 전기통신기본법 제48조의 2, 형법 제40조, 제38조, 제37조 위반으로 검찰에 기소됨과 동시에, 국가공무원법 제57조(성실의무), 제57조(복종의무), 제63조(품위유지의무) 위반으로 직위해체된 사건이다.
3) 2001년 6월,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학교를 자퇴했거나 혹은 자퇴를 고민하는 학생들이 서로 의견과 정보를 주고 받던 커뮤니티 사이트를 선량한 학생들에게 자퇴를 조장하고 부추긴다는 이유로 시정 명령조치하였다. 곧바로 ISP 강제된 자율적 (?) 협조를 통해 사이트 폐쇄로 이어졌다.
4) 지난 7월 30일 폐쇄되었다. 패쇄과정은 정통윤의 '해당정보 삭제요구'에서 시작되었다. 일부내용에 대해 음란판정을 내리고, 전기통신사업자(KIDC)에게 '해당정보 삭제'를 요구했고, 시정조치를 전해 들은 서버호스팅업체는 사이트 운영자에게 알리지도 않고 폐쇄했다. 동성애자들에게 있어서 인터넷 사이트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관한 고민상담이나, 지식, 정보를 얻는 통로이자,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인권보장을 위한 핵심바탕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현행법에 의해 '동성애'는 청소년유해매체 차단 사이트 목록의 퇴폐2등급으로 규정되어 있고, '음란성'과 '건전한 성풍속에 대한 위반'을 이유로 동성애자 커뮤니티는 폐쇄 조치될 수 밖에 없다.
5) 이에 관해서는 앞서의 포럼에서 발표된 이상희 변호사(2001)의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인터넷 검열 및 법적 대응에 대하여'라는 글을 참조하기 바람.
6) 아마도 이 물음은 1996년 미국 연방법의 '통신품위법'에 대항하여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A Cyberspace Independence Declaration)」을 외친 전자프론티어재단(EFF)의 창립자 바를로(Barlow)가 하고 싶은 질문일 것이다. 결국 이 물음은 State와 Society, 그리고 Community간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물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7) 백욱인 교수의 '디지털 혁명과 정보사회론'과 관련한 강의내용(http://bulam.snut.ac.kr/ ~wipaik/economy3.html)과 '네트와 사회운동(http://bulam.snut.ac.kr/~wipaik/essays/junguni. html)', 네트와 디지털 문화'(http://bulam.snut.ac.kr/~wipaik/essay5.html)' 등을 참조하기 바람.
8) 다른 한편으로,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copyright vs. copyleft)로 대변되는 「지적 재산권과 정보공유운동간의 대립」도 사이버 스페이스가 현실의 기존 사회권력질서에 새롭게 던지는 물음이 되고 있다. 네트는 1990년 중반 이후 자본의 급격한 진입으로 인하여 급격하게 재상품화되고 있다. 정보독점과 네트의 재상품화를 추구하는 자본의 목적은 네트에서 오가는 정보에 대한 사용료를 지구적 차원에서 법적으로 인정받는 법안을 확립하는 데 있다. 이와 더불어 초기의 '정보공유정신'은 정보독점과 정보사유를 위한 자본의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카피라이트에 대한 카피레프트 운동이나 정보독점에 대응하는 정보공유 및 오픈소스운동은 네트의 기본정신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홍성태 (1999), 정보화경쟁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연구 : 정보주의와 정보공유론을 중심으로-,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참조>
9) 맥키논 등은 포르노그라피는 이론이고 강간은 현실이라고 주장하고, 포르노그라피는 또한 표현물이라고만 볼 수 없고 하나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10) 이와 관련한 좀더 구체적인 비판 내용은 우지숙(1999)의 '포르노그라피 규제에 대한 담론을 통해서 본 사이버스페이스와 여성문제', 한국언론학보, 제 44-1호(1999. 겨울):244-286을 참조하기 바람.
11) 이에 관해서는 이미 한국 청소년 대상 연구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출간된, [대중문화의 선정성이 청소년 성범죄에 미치는 영향(김은경, 1998)]를 참조하기 바람.
12) 포르노 등 노골적인 성표현 매체의 영향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연구결과들은 김은경(1998), '대중문화의 선정성이 청소년 성범죄에 미치는 영향'(한국형사정책연구원 보고서)을 참조하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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