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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5만 도시에 대형 할인점, 지역소상인 초토화.

소한마리-화절령- 2006. 6. 27. 22:30

“노란색 봉투만 봐도 끔찍하다”

[한겨레] 인구 5만의 소도시 태백에 이마트 개장, 사지에 내몰린 중소상인들 … 돈의 씨를 말리는 대형마트의 공격에 지역 주민들 승리한 사례 없어

▣ 태백=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강원도 태백시의 5·31 지방선거는 ‘이마트 대리전’으로 치러졌다. 태백시장을 두고 이마트 입점을 찬성하는 후보와 반대하는 후보가 맞붙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선거가 끝난 직후, 전화로 들리는 태백경실련의 조호성 정책위원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반말 무마하려 대리인 내세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이마저 사라졌어요. 700표 차이로 졌거든요.”

당선자는 박종기 한나라당 후보였다. 조 위원은 그를 “인구 5만 명밖에 없는 태백에 이마트 건축 허가를 내준 현 부시장”이라고 했다.




2004년 태백에 대형마트가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중소상인들은 그해 10월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한 뒤 쉼 없이 반대투쟁을 벌였다. 태백에서 총궐기 대회를 열기도 하고, 관광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신세계 본사 앞에서 집회도 열었다. 하지만 이마트는 터를 닦고 공사를 시작했다. 태백 중소상인과 시민단체가 모인 안티이마트운동본부는 마지막 희망을 지방선거에 걸었다. 아이스크림 도매업을 하는 최종연(43)씨가 시의원 후보로 나섰고, 태백시장 후보들에게는 이마트 입점에 관한 입장을 물었다. 2위를 차지한 김동욱 열린우리당 후보와 김강산 무소속 후보만 “중소상공인이 준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

6월7일 오후 5시께 도착한 태백 시내는 한산하다 못해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태백역 주변은 죄다 철문으로 몸뚱이를 감싸고 있는 상가들뿐이었다. 마지막 남은 ‘시내’는 황지연못 근처의 중심가 두 블록이 유일했다. 1990년대 석탄산업 합리화 조처의 여파 때문이었다. 1990년대 중반 12만 명에 달하던 태백시 인구는 한 해에 1만 명 이상씩 떨어져 지금은 5만 명을 갓 넘었다. 안호진 안티이마트운동본부 간사는 “그나마 이곳이 마지막 남은 상권”이라고 말했다.

시내에 있는 황지자유시장 골목에는 ‘점포 세 줍니다’라고 쓰인 벽보가 세 집 건너 하나씩 붙어 있었다. 골목 사이에 건축 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재래시장을 쾌적한 쇼핑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대형마트와 대적시킨다는 재래시장 현대화 사업. 시장에 지붕을 얹는 아케이드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안 간사는 “아케이드와 통행로 정비에 20억원을 쓴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포의 철시 대열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상인들은 없어 보였다.

이마트 태백점은 10월 말 개장될 예정이다. 인구 5만 명 수준의 소도시에 대형 할인점이 진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업계에서는 태백을 주시하고 있다. 그동안은 10만 명 안팎의 도시가 마지노선이었다. 중소상인의 반대를 뚫고 개장한 뒤, 다른 지역에서처럼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소도시나 군 단위에서도 못할 게 없다.

태백시 화전동에 있는 이마트 부지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단층짜리 1800평짜리 매장. 기타 부지로 6천 평을 매입했다. 그런데 공사 현장에는 이곳이 ‘이마트 예정지’임을 알리는 어떤 표식도 없었다. 이마트 예정지임을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신세계 건설’이라는 이름이 달린 산업재해 예방 구호뿐이었다.

안호진 간사는 “이 땅의 소유주는 신세계가 아니라 서울 사람인 이아무개씨”라고 말했다. 그는 “이마트 직원들이 사전에 내려와 시장조사를 했고 대리인을 내세웠다”며 “처음엔 신세계 쪽에서 이마트 건설 계획이 없다고 잡아뗐다”고 말했다.

전주, 실패한 ‘지역법인화 운동’

신세계가 이마트 개장 계획을 실토한 것은, 태백 중소상인들이 반대운동을 시작한 지 반년이 넘은 2005년 4월께였다. 이미 태백시가 이마트 매장 한가운데를 지나는 국공유지인 도로를 대리인인 이씨한테 팔고 난 뒤였다.

대리인을 내세운 인·허가 작업은 대형 할인점이 고안해낸 일종의 편법이다. 업계의 치열한 경쟁으로 입점 부지가 모자라는데다 지역 여론의 반대를 피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지자체로선 ‘관련법상 하자가 없다’며 허가를 내줄 수밖에 없고, 할인점은 대리인에게 관련 땅과 매장을 인수받은 뒤 영업에 들어간다. 태백뿐만 아니라 논산, 김제 등에서도 똑같은 방식이 동원됐다. 한 대형 할인점 관계자는 이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상권 반발이 워낙 거세니까 어쩔 수 없어요.”

전국에 일어난 대형 할인점 건설 붐은 사회적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할인점 입점 소문, 중소상인들의 반발, 지자체의 특혜 시비, 찬반 주민들의 대립, 상경 투쟁 등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정한 소란의 터널을 거친다. 안티이마트운동본부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인구 5만~15만 명의 소도시에 대형마트가 추진 중인 지역이 10곳이나 된다. 홈플러스는 이미 전국 50곳에 부지를 확보해뒀고, 이마트도 현재 88개인 점포를 130~140개로 늘린다는 방침이다.

중소상인들이 대형마트 입점을 결사반대하는 이유는 뭘까. 대형 할인점은 종소상인들에게는 생존권 문제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대형 할인점이 장사를 시작하면, 직접적인 경쟁관계를 맺는 재래시장 상인부터 무너진다. 재래시장은 할인점의 진출로 2002년 매출 15조원에서 2003년에는 13조5천억원으로 줄었다. 1년 만에 1조5천억원이 줄어든 것이다. 소매상의 감소 추세도 뚜렷하다. 1996년에서 2004년까지 할인점이 247개 늘어날 때 영세소매상 8만 개가 감소했다는 보고도 있다. 그래서 상인들 사이에서는 “대형마트 1개 생기면 동네 슈퍼 300개가 망한다”는 말이 떠돈다.

이렇게 되면 지역에 돌아다니는 돈의 씨가 마르기 시작한다. 서울에 본사를 둔 대형마트들이 지역 소비자가 내는 돈을 싹쓸이해가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소비자가 중소상인에게 소비를 하고 그 중소상인이 다른 중소상인에게서 소비하는 지역 내 통화 순환이 이뤄졌다면, 대형할인점은 이러한 순환 체제를 무너뜨린다. 더군다나 할인점이 지방정부에 내는 세금도 미미하기 그지없다. 주요 세원인 법인세가 국세이기 때문이다.

인구 62만 명의 중소도시 전주는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2002년 한 해 동안 전주 시민들은 이마트에서 1297억원을 썼다. 그러나 이마트 전주점이 낸 지방세는 종합토지세, 재산세 등 5억4천만원뿐. 전주에서 거둬들인 돈(매출액)의 0.4%만 세금으로 낸 셈이다.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전주 이마트를 지역법인화하자는 운동을 벌였어요. 몇 차례 이마트 간부들과 간담회를 가졌지만 역부족이었어요.” 전주 YMCA의 조미영 부장은 2003년 거셌던 지역법인화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마트의 자비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운동은 성공하긴 힘들었다.

“주민 스스로 할인점 통제해야”

현재 국내에서 대형 할인점을 막아낸 지역은 한 곳도 없다. 미국의 월마트 반대운동가 알 노먼은 “미국에선 지금까지 300여 곳의 지역 사회가 대형마트의 신규 진입을 막아냈다”며 “특히 지역 주민 스스로 대형 할인점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민투표제 등을 통해 행정에 개입함으로써, 대형 할인점이 진입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용도변경, 교통영향평가 등 건축허가에 개입할 수 있다.

이는 대형마트가 지역 경제에 주는 득실, 즉 소비자로서의 즉자적인 이익뿐만 아니라 생산자와 노동자로서 일하는 자신에게 끼칠 중·장기적인 영향에 대해서 논의하는 사회적 학습 과정이 될 수 있다. 대형 할인점처럼 소비자만 앞세우면 사회적 연대의 거미줄은 끊어진다.

“노란색 이마트 봉투만 봐도 끔찍하다”는 태백 진주마트의 황호창(56)씨는 20년 슈퍼 일을 접고 태백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미 동해·삼척에 나가 나름대로 시장조사를 했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다른 지역에 가든지 편의점을 차리든지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안티이마트운동본부는 10월 이마트 태백점이 문을 열면, 이마트가 지역 경제에 끼치는 폐해만큼 책임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상인들은 “우리 역시 졌구나”라고 말하면서도, “불매운동이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법은 언제까지 구경만 하나
외국은 대형 할인점 무차별적 진입에 강력한 국가적 규제장치 마련

“있는 걸 부술 순 없잖아요. 현재로선 출점 러시에 브레이크를 거는 방법이 우선입니다. ”

이선근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은 국가적 규제를 마련해놓은 외국에 비해 한국은 대형 할인점의 무차별적 진입에 무방비 상태라고 말한다. 프랑스는 가장 강력하게 대형 할인점 신설을 규제하는 나라다. 1973년 제정된 로와이에법은 점포 면적 3천㎡, 매장 면적 1500㎡ 이상을 증설하는 경우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일본에서는 1천㎡ 이상 점포를 설립할 때는 신설 계획에 대한 공표와 설명과 공청회를 실시해야 한다. 영국은 ‘대형마트 설립 가이드라인’을 두고 총매장 2만㎡ 이상의 대형마트는 ‘중소소매업에 대한 영향 조사 보고서’를 지방정부에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선 유통산업발전법 등 관련 법령에 따라 3천㎡ 이상의 점포 개설은 해당 구청에 등록만 하면 되고, 3천㎡ 이하는 사업자 등록으로 끝난다.

대구시 남구는 2005년 2월 대형 할인점의 신규 진입을 제한하는 ‘영세상인 보호를 위한 업무 지침’을 만들었다. 이 지침은 15만 명당 3천㎡의 대형마트 1개만 허용토록 해 현재 영업 중인 홈플러스 외의 추가 입점을 막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침일 뿐이다. 남구 관계자는 “할인점이 소송을 제기하면 꼼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구 146만 명에 이미 12개의 할인점이 영업 중인 대전시도 뒤늦게 도시계획조례를 개정해 2007년까지 준주거지역에 3천㎡의 대형 매장을 제한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안호진 간사는 “지자체의 임시방편일 뿐”이라며 “국가적인 법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상정 의원(민주노동당) 등 10명은 이와 관련해 ‘지역유통산업 균형발전특별법’를 발의했다. 이 법안은 대형 할인점 건설 전에 주민 공청회와 유통산업균형발전위의 심의를 거치도록 하고, 인구당 점포 수와 면적을 규정하도록 했다. 이상민 의원(열린우리당)이 발의한 ‘대규모 점포 사업활동 조정 특별법’도 발의돼 있는데, 이 법안은 24시간 영업제한과 허가제를 주내용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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