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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

소한마리-화절령- 2006. 7. 12. 19:05

고려시대 재혼여성 새 남편에 당당했다… 묘지명에 당시 사회상 생생



“의붓아버지가 가난을 이유로 따로 공부시키지 않고 자기 친아들과 동업하게 하자,(이승장의) 어머니는 그럴 수 없다 고집하며 이렇게 말했다. ‘먹고 살기 위해 부끄럽게도 전 남편과의 의리를 저버렸으나,유복자(이승장)가 다행히 잘 자라 학문에 뜻을 둘 나이가 되었으니,그 친아버지가 (생전에) 다니던 사립학교에 입학시켜 뒤를 잇게 해야 해요. 아니 그러면 죽은 뒤에 제가 무슨 낯으로 전 남편을 보겠어요?’ 마침내 (새 남편이) 결단해 (이승장을) 솔성재(率性齋)에서 공부하게 하니,전 남편의 옛 학업을 뒤따르게 한 것이다.”

고려 중기의 문신 이승장(1137∼1191)의 묘지명이다. 고려시대에는 남편을 여읜 여성의 재혼에 대해 사회적 인식이 그리 부정적이지 않았고,재혼 후의 생활에서도 여성들은 새 남편을 상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음을 보여준다.

묘지명은 무덤 주인공이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후세에 전하려는 뜻으로 무덤 안에 넣은 기록물. 무덤 앞에 세우는 묘비가 공적인 내용을 담는데 비해 묘지명은 개인적인 동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의 생활과 문화를 읽을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된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부터 자리잡기 시작한 묘지명은 대체로 판석(板石)에 새겨지며 망자 본인이나 가족,친구가 글을 썼다.

8월 27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에서 열리는 기획특별전 ‘다시 보는 역사 편지,고려 묘지명’은 그동안 단편적으로 공개되던 고려 묘지명 70여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드문 기회. 전시품 가운데 고려 숙종의 딸인 복녕궁주(1096∼1133)의 묘지명에선 비록 송나라 연호를 쓰면서도 복녕궁주를 ‘천자의 딸’로 표현하는 등 고려인의 자부심이 드러나고 문신 최누백(?∼1205)의 아내 염경애 묘지명에선 하급관리 시절 남편을 대신해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맡았던 여인의 애절한 삶이 펼쳐진다. 묘지명 외에도 함께 발굴된 도자기나 공예품 등도 전시된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