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으로 돌아가다.

사북으로 돌아가다2

소한마리-화절령- 2006. 3. 29. 17:59

2.
 한 달이 못되어 아버지의 주선으로 동원탄좌의 직영사업장은 아니지만 덕대(德大) 사업장에 취업하였다. 지금은 다 없어진 탄광이지만 외지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듯 탄광이라고 해서 아무나 아무때나 마음만 먹으면 들락거리는 곳이 아니다. 흔히 도시나 외지에서 하던 일이 잘 안풀려 곤경에 처하면
 

 "에라, 탄광에 가서 한 3년 썩어 볼까!"하고 쉽게 작정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무작정이 얼마나 대책없는 만용인지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들지 않는다. 종업원 십 수 명 규모의, 우리가 "쫄닥구덩이"라고 부르는 영세탄광, 근무조건이나 임금 등 모든 조건이 형편없이 열악한 영세탄광이라면 또 모르겠다. 같은 탄광이라 해도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곳이어서 늘 사람이 부족한 곳이니 언제든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재해율도 높고 노동강도 또한 높아서 생선 뱃바닥 같은 흰 손을 가진 도시 출신의 초보자들은 단 사흘을 견디기 어려운 곳이다.

 

 적어도 동원탄좌 쯤 되는 대규모 탄광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공무원 임용에 필요한 서류 일체와 함께, 하다 못해 회사 사무실의 노무가가리 한 사람쯤은 알고 지내거나 얄팍한 봉투 한 장이라도 내밀어야 겨우 어떻게 해 볼 수 있기 일쑤이다. 동원탄좌만이 아니라 좀 규모가 크다싶은 탄광은 다 비슷한 사정이었지만. 어쨌거나 내 경우는 그곳 출신이고 아직 회사 규모가 작은 때부터 아버지가 근무해 오신 때문에 웬만한 회사 간부들과 어지간히 면식이 있었기에 비록 "쫄닥구덩이"로 불리는 덕대 사업장이긴 하지만 "검탄원(檢炭員)"이라는 준 관리자로 취업할 수 있었다.

 

 이 때가 80년 1월 중순이나 하순이었다. 2월 말 첫 월급을 타자마자 서울행 기차를 타고 종로서적으로 가서 잉크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광민사 발행의 "노동의 역사" 몇 권과 산업선교 관련 서적 몇 권을 사서 사북으로 내려왔다. 가까운 교회 동료 청년 노동자 서너 명과 함께 학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같은 내 시도는 곧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 3년 여간 사북을 떠나 있는 동안 사북과 동원탄좌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같은 변화가 폭발적인 양상을 띠고 나타나게 된 것이다.

 

 본래 나는 탄광지역에 오랫동안 살면서 노동조합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전의 탄광지역에서 어른들의 노조 활동을 보면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인 것은 분명하나 내가 뛰어들어서 해야 할 어떤 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우선 개인적으로 결국은 이 사회의 계층서열 구조아래서 가장 낮은 지위에 해당하는 노동자, 그것도 탄광 노동자임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실은 첫 번째 이유를 형성한 원인이기도 한데, 노동자를 위하는 일인 것은 좋지만

 

 그 시절 탄광지역에서 노조 지도자 등으로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모두 건달이거나 깡패 비슷한 행태를 보인다는 점이었다. 요컨대 반쯤은 건달끼가 있는 사람이나 기웃거려보는, 우리 사회의 품위있는 지도자로 성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 노동조합 운동의 당위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참가해서 어떻게 해 볼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노조 지도자로 종사하던 주변의 어른들의 행태를 보면 거의가 회계 등 이권과 관련된 부정으로 감옥을 가거나 불신임을 당하는 모습을 자주 보아 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2년 동안 접한 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하여, 한완상 교수의 '민중과 지식인', 도시산업선교와 관련 등 일련의 사회과학 서적을 접하고 나면서, 20여 년의 세월 동안을 보낸 사북을 비롯한 탄광 지역사회와 탄광부들의 삶이 새로운 모습으로 내 눈 앞에 다가 온 것이었다.

 

 실제로 그 시절 탄광지역의 노조대표자의 지위는 세상 모르는 내 무지의 소산일 뿐 결코 불량끼 있는 건달이나 기웃거릴 우스운 자리가 아니다. 동원 탄좌 노조 지부장의 경우 호왈(乎曰) 군수도 부럽지 않다고 할만큼 영예롭고 실속 있는 자리로 간주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의 본령에 대한 역사적 소명의식이나 철학적 기반없이 노조 간부의 지위를 개인적 출세와 치부의 도구로만 인식하는 80년대 이전 우리나라 노조 간부들의 의식 어느 구석에서도 노동자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과 권리의 확보와 신장, 사회적 지위의 안정과 같은 사명감은 약에 쓰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이미 그 전 해인 79년 봄에 있은 동원탄좌 노조 지부장 선거를 둘러싸고 기왕에 선점하고 있던 이익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 모 지부장 세력과 이들의 노골적인 반노동자적 행태에 염증을 느낀 일선 조합원들의 뿌리깊은 불만을 반영하는 노조개혁파간의 치열한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기존 지부장 세력은 재집권을 위해 회사의 방조 아래 대의원들에게 막대한 금품을 살포하는 등의 조직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여 간신히 재선에 성공하였다. 이에 불복한 이원갑 씨 등 노조개혁파는 아직 산별 노조체제이던 당시의 제도에 따라 상급 단체인 전국광산노조에 선거무효와 재선거를 요구하였다.

 

 전국광산노조 내의 미묘한 세력판도에 따라 명확한 결론없이 그 해 79년 내내 재선거와 선거인준의 번복을 되풀이함으로써 분쟁을 효과적으로 조정(調整)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장(助長)하였다. 몇 차례 지부장 직무대리가 선임되고 이해를 달리하는 측에 의해 업무집행이 정지되는 등의 지루한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다시 이 모 지부장이 광산노조 본부에 의해 지부장 직무대리로 지명된 채 10.26을 거쳐 80년 봄을 맞게 된 것이다. 10.26과 12.12 사태의 급박한 정세 변화에 숨죽이고 있던 동원탄좌 노조 양 진영은 80년 봄이 되어 임금협상이 시작되는 것과 함께 분쟁을 재개한 것이다. 역시 지부장 직무대리로 지명된 이 모 전지부장이 조합원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회사측의 협상안에 동의한 것이다. 가뜩이나 이 전 지부장의 어용적 행태에 분노를 감추고 있던 조합원들의 심정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이에 대한 항의와 다툼이 내연하다가 4월 21일 드디어 발화점을 건드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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