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으로 돌아가다.
1.
1979년 12월 성탄절을 기하여 수원에 있던 나는 2년 여 만에 다시
사북으로 돌아왔다. 가족들과 교회동료 등, 친지들의 따뜻한 위로를 받으며 새롭게 눈뜬 세상, 새로운 소명에 부푼 가슴을 안고 세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도하게 된다.
아직 수원에 있던 어느 날 아침, 바깥에 나와보니 난데없는 조기(弔旗)가 게양되어 있는 것을 발견함으로서 한국현대사의 한 장이 넘어가는 것을 일말의 불안감과 함께 가슴 뛰는 흥분으로 맞이하였다. 말이 18년이지 우리 세대에 있어서 반쯤은 종신 대통령으로 인식될 만큼 강력한 철권 통치자였던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마침내 스러졌던 것이다. 거기에 맨몸으로 저항하던 재야 민주인사들의 몸짓이 마치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부나비인 듯 여겨지던 난공불락의 철옹성, 유신체제에도 마침내 붕괴의 조종(弔鐘)이 울린 것이다. 따라서 곧 사북으로 돌아가면 지난 2년여 동안 절치부심 다짐한 탄광노동자들과의 새로운 삶에도 무언가 서광이 비치는 듯한 기대에 들뜨게 한 것이다.
곧이어「YWCA 위장결혼식 사건」과「12.12 사건」이 일어났지만 아직은 이 두 사건의 진정한 의의와 정세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독재자의 죽음으로 어떤 식이든 민주화는 진전될 것이고, 사람들에게 더 많은 활동공간이 열릴 것이며, 심중의 생각을 더 이상 감추지
않고 자유로이 표현하는 세상이 다가왔다고 믿었다. 자칫하면 무언가 시도해 보기도 전에 유신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그물망처럼 쳐 놓은 긴급조치라는
인계철선에 걸려 흔적도 없이 날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마저 가볍게 털어버리고 새로이 눈뜬 이념과 운동을 전파하여 내 삶의 근거인
탄광노동자 동료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하기 위한 워밍업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사북, 내 유년을 지나 청소년기의 온갖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곳이다. 68년 9월 어느 날 오후 열차를 타고 인근 탄광촌 함백에서 형님과 내가 국민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하기까지 지낸 10여 년,
유소년기의 온갖 추억이 담긴 세월을 뒤로하고 아버지의 새 직장을 따라 마치 오아시스를 찾아 떠나는 유목민처럼 신흥 탄광촌 사북을 향해 떠다.
밤늦게 사북역에 도착한 여덟 식구는 새로 들어갈 마을을 찾아, 아직 세살바기인 막내 인욱이만 빼놓고 부모님과 열 일곱살의 인택 형님으로부터 열
두 살의 인숙, 열 살의 인옥, 일곱 살이던 동생 인혁에 이르기까지 모두 5남매가 살림살이를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한참을 걷고 또 걸어 찾아든
사북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사북중학교에 들어갔다가 2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중퇴하여 서울 등지의 공장을 전전하다가 1972년, 열 일곱
살의 소년 광부로 동원탄좌에 취업하여 수많은 동료들이 발파사고, 매몰사고 등으로 죽거나 다치는 것을 보며, 탄광노동자를 벗어난 간 큰 꿈과
야망을 키우며 살던 곳이다.
17, 18세 무렵의 아직 소년티를 다 벗지 못한 동원탄좌 광부시절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때는 갱(坑) 밖에서 허드렛 일을 하던 때였다. 갱외 일의 성격상 일이 몰릴 때는 한꺼번에 몰려서 갱에서 나오는 석탄차를 하역하고, 두 세 곳
되는 작업 대기실의 난로를 돌보고, 하역이 끝난 광차(鑛車)를 정비하여 언제든 갱내로 가져 갈 수 있도록 대기시키는 등 몹시 분주하였다. 더구나
50대의 아저씨 한 분과 24시간 맞교대로 일을 하는 처지여서 잠이 부족할 때도 있어서 갱내작업 못지 않게 힘겨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탄광에 들어온 지 얼마안 되는 20대 후반의 청년이 있었다. 아직 일은 힘겹고 서툰데다 도시의 유흥가에서 한가락하며 놀았다는 것을 자랑삼아 떠벌리며 동료들에게 은근히 자신의 주먹실력을 내세워 위협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평소에도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반말에 상소리를 잘하였다. 그 날 따라 내가 할 일이 몹시 바쁘게 밀려있었다. 바쁜 와중에 자신의 도시락을 가져다 달라고 명령조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보다 나이도 열 살 가량 많고 일이 바쁘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갖다줄 수 있었다. 일이 밀려서 그가 요구하는 대로 바로 도시락을 갖다 주지 못하자 내게 심한 욕설을 하며 머리를 가볍게 때리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그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그 날 따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머리를
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옆에 놓여 있던 채탄 작업용 곡괭이를 들고 휘둘렀다. 간발의 차이로 그가 피하였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곡괭이가 그의 장화
뒤꿈치를 찍어서 그가 더 움직일 수 없었다. 예기치 못한 내 공격으로 날카로운 곡괭이가 장화에 박혀 있는 상황에 모골이 송연한 듯 반쯤은 혼이
나간 그의 안면과 복부를 마구 때리자 주변의 어른들이 말려서 곧 싸움은 끝이 났다.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탄광을 그만두고
다시 도시 어딘가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탄광 노동에 정을 못 붙이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날도 24시간 맞교대인 만큼 새벽에는 조금씩 눈을 붙이고 나서 일어나 다시 갱내에서 나온 석탄과 폐석을 하역하고 광차 정비를
마쳤다. 아직 동이 트자면 시간이 좀 더 있어야 했다. 내가 작업하는 곳은 해발 970미터의 고지였는데 다시 눈을 붙이기에는 곧 날이 샐
것이어서 폐석더미가 쌓인 하역장 끝에 가 앉아 작업장 아래 마을과 멀리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산등성이가 마치 열병식을 하는 듯이 끝 모르게 줄지어 달리는 새벽하늘이었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하늘 멀리 긴 줄 자로
구획지어 놓은 것처럼 산등성이 끝나는 저 편에 한 줄, 새파란 하늘에 보였다. 금그어 놓은 듯한 이편 하늘은 아직 검은 어둠에 덮여있는데 내가
늘 꿈꾸는 탄광이 아닌 다른 세계, 어린 시절부터 잠시도 잊지 않고 꿈꾸던 세상이 있을 저 편 하늘은 파란빛깔을 띄며 열 일곱, 열 여덟의 붉은
가슴을 고동치게 하고 있었다. 머리와 가슴은 소년 광부에게 어울리지 않는 온갖 잡동사니 지식과 가당치 않은 큰 꿈과 야망으로 가득한데, 당장의
처지는 무지랭이 탄부(炭夫)들과 말도 안되는 일로 주먹다툼이나 하면서 귀중한 젊음을 갉아먹고 있다는 조바심에 몸부림치던, 시절을 보내기도 한
곳이다.
80년 당시의 사북읍은 인구 5만 여명이 거주하는 전형적인 탄광도시이다. 60년대 초, 경제개발과 함께
우리나라에 부존하는 유일한 에너지원인 석탄의 개발을 위해 수 십여 호의 화전민이 흩어져 사는 한적한 산촌에서 자본주의 산업경제의 한복판으로
급격히 편입된 곳이다. 당시 사북읍에는 크고 작은 20여 개의 탄광이 있었지만 고한리의 삼척탄좌와 사북리의 동원탄좌가 사북읍 인구와 경제의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는 사실상의 지배적인 사업장이었다. 그 중에서도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의 경우 종업원 3,000 명이 넘는 대규모 탄광이었다.
연간 생산량이 당시 우리나라 석탄 생산량의 9%인 160만톤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이었다. 동원탄좌는 사북 지역주민의 생계를 좌우할 뿐
아니라 주민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기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곳 주민들에게 군수나 경찰서장 등의 인사이동은 주목거리가 안되지만, 광업소의 사소한 인사이동은 즉시 주민들의 주요한 관심거리로 등장한다. 주민들의 실제지배자는 바로 광업소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78년 제 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당시, 동원탄좌의 류환규 소장과 삼척탄좌의 전영준 부소장이 각각 출마하였다. 각기 3천 여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양대 탄광에서는 누가 1위로 당선되느냐를 놓고 자존심 대결을 하였다. 결과는 좀더 많은 종업원을 거느린 동원탄좌의 류환규 소장이 1위로 당선되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삼척탄좌의 종업원으로 동원탄좌 출신의 류환규 소장의 선거를 지원한 사람들이 색출되어 해고조치와 함께 강제로 사택에서 퇴거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중에 어용노조 지부장에 대한 항의에서 시작된 분규가 부녀자를 비롯한 전 주민이 참여하는 사태로 확산된 데에는 이같은 배경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리도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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