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으로 돌아가다.

사북으로 돌아가다3

소한마리-화절령- 2006. 3. 2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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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 1980년 4월 21일 월요일이었다. 전날인 일요일은 한 달에 2∼3회뿐이던 휴일 중의 하루였고, 그 날부터 한 주간은 병방(丙方)으로 불리는 00:00부터 08:00시까지 근무하는 야간 작업조였기에 읍내 중심지에서 약간 떨어진 골짜기의 집에서 하루종일 독서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오후 네 시가 좀 넘었을까, 출근 시간은 밤 10시 30분 경이므로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지난 2월부터 동료들과의 학습장소로 적당한 곳을 물색하느라 처음으로 찾아가 뵈었던 이웃 천주교회의 신부님을 찾아가 뵈려고 집을 나섰다. 외국인 신부님이지만 내가 다니고 있던 개신교회 목사의 사회참여에 대한 냉담한 태도와는 달리 동료노동자들과의 학습 등에 대해 몹시 우호적이었고, 역대 교황들의 사회회칙 등의 자료를 구해 주면서 관심과 이해를 표명하며 가능한대로 도와주겠노라고 언명하였던 것이다.

 지서 앞을 막 지나려는 데 저 쪽, 시장 쪽에서 지서를 향해 일단의 군중들이 무언가 구호같은 함성을 지르며 떼지어 걸어오고 있었다. 낯선 풍경을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니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들이 선두에서는 어 모 지서장의 멱살을 틀어쥐고 또 다른 사람은 핸드마이크를 손에 들고
"사람 죽이는 게 경찰이냐, 사람 살려내라, 이놈들아!" 운운하는 구호를 외치며 군중들을 이끌고 몰려오고 있었다. 이때까지의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나는 군중들 가운데서 아는 얼굴을 찾았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노조 사무실 앞에서 조합원들이 모여서 지부장에게 최근의 임금협약을 독단적으로 처리한 데 항의하고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데 경찰이 지부장을 비호하였다는 것이다. 지부장의 요청으로 출동한 경찰이 지부장의 신병을 빼돌리고 이에 성난 조합원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당황한 경찰은 출발을 저지하는 조합원 몇 사람을 자동차로 들이받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원일호라는 조합원이 경찰 지프에 깔려 숨지고 몇 사람은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흥분한 조합원들은 미처 달아나지 못한 지서장을 붙잡아 동료의 목숨 값을 받아내려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나는 상황이 폭동으로 발전하겠다고 판단하고 일단은 노동자들의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사태에 대처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미 노동자들은 지서로 난입하여 다른 경찰관들과 방위병들은 모두 달아나고 지서장만 따귀를 맞는 등 봉변을 당하고 있었다. 언제 알았는지 인근 노동자 사택의 부인들까지 비좁은 지서와 내부 마당, 그리고 지서 앞 도로까지 수백 명이 몰려나와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혹시나 진행되는 상황에 끼어 들 여지가 없을까 하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지만 나와 함께 학습을 시작하던 동료들로서는 이 같은 사태는 너무도 빨리 닥친 것이었다. 당시의 내 수준으로는 감당이 안돼는 심각한 사태였다.

 

 고심 끝에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에게 무슨 도움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얼핏 듣기에 도시산업선교회의 인명진 목사와 같은 교단이고 같은 신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생각나서 인명진 목사의 전화번호를 구하려는 것이었다. 아마 나도 몹시 흥분한 상태였던 모양이어서 목사님은 너무 끼어 들지 말도록 만류하였지만 이미 담임목사의 의견이나 들으러 온 것은 아니었던 내 기세에 눌려서인지 도시산업선교회의 전화번호를 찾아서 긴급 시외전화를 걸어서 나를 바꿔주었다. 지급이어도 40여분이나 기다려서 겨우 인명진 목사와 통화가 되어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사람을 보내주고 지원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잠시 목사관에 머물다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일단 출근은 해야 할 것 같아 집으로 가서 준비를 했다.

 "어쨌든 사태는 동원탄좌 직영에서 일어났으니 우리 같은 '쫄딱구덩이'야 무슨 영향이 있으랴!"는 현장소장의 전화지시를 확인하였다. 출근복장을 차려입은 뒤, 늦은 식사를 하고 통근차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러나 통근차가 시장을 지나 안경다리에 이르자 이미 직영 통근차는 모두 파손되고 바리게이트가 설치되었다. 일단의 노동자와 부인들이 모든 통근차량의 통행을 저지하고 있었다. 모두들 출근을 포기하고 집으로 되돌아가고 나는 차에서 내려 상황을 살펴보았다.
내가 교회로 달려가고 출근준비를 하는 2∼3시간 동안 정선경찰서 본서와 인근 장성 경찰서에서 급파된 병력에 의해 볼모로 잡혀있던 지서장이 구조되었다. 이 과정에서 볼모를 빼앗기고 일시적이나마 경찰에 제압 당한 노동자들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무기고를 제외한 지서 내외 시설물을 모두 파괴하고 회사 본부로 몰려간 것이 오후 9시 전후의 상황이었다.

 

 처음 수백 명의 군중이 이 과정에서 약 1,000여명으로 불어났다. 광업소 본부 구내에는 객실(客室)이라 불리는 회사 고위 간부 전용 숙소 겸 영빈관이 있다. 대부분 서울 등지에 집이 있는 소장과 부소장 등 고위 간부들의 숙소로 쓰이면서 회사나 지역에 찾아오는 주요한 인사를 접객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노동자를 비롯한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다. 꼭 누가 금지해서라기보다 근처만 가도 웬지모를 분위기가 주눅들게 만드는 일종의 금원(禁苑)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평소에는 얼씬거릴 염도 내지 않던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객실로 쳐들어간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를 것이라고 예상치 못한 것은 군중들 자신들도, 객실에서 한가롭게 대책을 의논하던 경찰서장과 회사간부들과, 지역사회의 내로라는 유지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군중들의 난입에 놀라 몸을 피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노동자들은 회사 간부들과 경찰서장 등을 마구 때리며 객실 내에 있는 기물을 부수었다. 그나마 밤이었기에 경찰서장과 회사간부들이 어둠을 타고 간신히 몸을 피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바탕 회사 본부를 휩쓴 노동자들은 회사 정문 광장 등 여기저기 떼지어 밤샘 농성에 들어갔다. 이같은 상황에서 불빛 속에 알아 볼만한 얼굴들을 찾아서 함께 회사 구내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수 십 년 동안 지역사회의 권위의 중심으로 자리잡아온 광업소 본부의 형해화한 몰골에서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 같은 사태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같은 사태의 진전은 전혀 예상치 못했고 지난 2년 동안 염두에 둔 의식화 사업에서도 상정(想定)해 본 일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무얼 어떻게 해야하는지 들어 본 바도 없고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일단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도움을 요청한 서울의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새벽녘까지 농성장에 있다가 늦게 집으로 돌아가 잠시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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