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으로 돌아가다.

사북으로 돌아가다4.

소한마리-화절령- 2006. 3. 3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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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늦게 잠이 든 탓에 날이 훤히 밝은 뒤에 일어나 대강 요기를 하고 집을 나서 농성장으로 향했다. 그때가 오전 9시나 되었을까? 그 사이 상황이 일변하여 안경다리 철로 위에 약 2,000여명 가량의 노동자와 부인들이 거센 함성을 지르며 진을 치고 있었다. 날이 새자 일부 노동자들이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어용노조 지부장의 집으로 찾아가 지부장을 붙잡으려고 몰려갔는데 당연히 지부장은 없고 황급히 몸을 숨기려던 지부장 부인이 일단의 흥분한 노동자와 부인들에게 붙잡혀 심한 폭행을 당하고 회사 정문 앞 농성장으로 끌려간 것이다.

 

 곧이어 사태를 촉발한 경찰은 밤사이 강원도내 병력을 소집하여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약 700여명을 출동시켰고 이에 흥분한 노동자들이 안경다리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도중에 만난 동료 노동자 한 명과 안경다리로 접근하는 중에 경찰병력이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도경국장으로 확인된 경찰지휘관이 핸드마이크로 노동자들에게 선무방송을 하고 있었다. 심 모씨 등 일부 지역상인들이 지휘관에게 지형 지물을 설명하며 진압작전을 조언하고 있었다.

 

 초기의 치졸한 대응으로 사태를 이같이 확대시킨 경찰이 책임을 느끼기는커녕 무력으로 노동자들의 정당한 항의를 진압하려는데 화가 치민 나는 지휘관에게 다가가 거세게 항의하였다. 평소에도 권리를 유린당한 데 대해 분노하던 노동자들이 동료를 치어 죽인 경찰에 치를 떨고 있는 상황에서 사태를 원만히 수습하려 하지 않고 과잉대응 하려는 태도를 지적하고 극도로 흥분한 노동자들을 설득하려면 먼저 병력을 철수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때만 해도 피차 아직은 어수룩하달까 이런 식의 대립이 익숙지 않아서인지, 그다지 삭막하지만은 않아서인지 모르지만 정식으로 선발된 노동자들의 대표도 아니고 그냥 행인이거나, 외톨이 노동자에 지나지 않은 내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경찰에게 봉변을 당하거나 체포되지는 않았다. 지휘관은 내 거센 항의에
"지금 노동자들을 진압하려는 것이 아니다. 경찰도 원만한 수습을 원하는 만큼 권한 있는 대표를 뽑아서 협상을 하자"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협상을 하려면 먼저 노동자들을 자극하는 경찰병력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시켜라"고 요구하였다. 그렇게 5분 가량 지휘관과 대화를 나누다가 일단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안경다리 쪽 역 광장으로 올라갔다. 역으로 다 올라갈 무렵 등뒤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실탄이 아니라 최루탄이었지만 사북이 생기고 처음 발포된 최루탄이었다. 이를테면 지휘관은 일면 선무 방송을 하면서 그 틈을 타서 병력을 투입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너무 무모한 공격이었다. 무엇보다 지형조건과 병력과 사기에서 경찰 측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2.000 여명의 노동자에 대해 700여명의 경찰, 그것도 동료의 죽음(나중에 죽은 것이 아니라 중상으로 밝혀졌지만)과 함께 자신들을 착취와 억압의 대상으로 삼아온 경찰과 회사 경영진, 어용노조 간부들에 대한 분노로 전의가 탱천해 있는 노동자들에 비해, 요즘처럼 시위진압 전문부대도 아니고 시위의 무풍지대라 할 강원도 각지에서 긴급히 차출된 병력으로 급조된 경찰부대는 처음부터 전의(戰意)랄만한 것이 없었다. 거기에 지형조건에서 노동자들에게 절대 우세한 형국이었다. 안경다리의 높이가 적어도 5∼6미터는 되고 기차역도 사북읍을 굽어보는 고지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포진한 노동자들에게 무기는 무제한으로 쌓여 있었다. 기찻길에는 손에 쥐고 던지기에 꼭 맞는 돌멩이가 지천으로 깔려있었고 바로 옆에 있는 저목장(貯木場)에는 동원탄좌를 비롯한 사북 일대의 모든 탄광에 공급되는 갱목(坑木)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게다가 바람도 경찰이 포진하고 있는 반대쪽으로 불어서 경찰이 쏘는 최루탄 연기도 갱내의 폭약연기에 익숙한 노동자들을 위협하기엔 너무도 무력하였다. 내가 겪기에도 그 당시의 최루탄은 요즈음의 최루탄에 비하면 위력이 낮은 것이었다. 경찰의 최루탄 발포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전의(戰意)를 자극하는 흥분제 역할을 한 셈이다.

 

 다만 안경다리 쪽이 아닌 윗사북 쪽에서 역으로 접근한 경찰병력은 약간 사정이 나을 뻔 하였다. 안경다리에서 투석전을 벌이던 노동자들의 주력은 역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따라서 별 저항 없이 역으로 접근한 경찰부대가 노동자들을 측면에서 신속히 공격하였다면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었다. 때마침 경찰부대에 한 발 앞서 역으로 올라간 나는 이 상황을 목격하고 자칫 전세가 바뀌는 것 아닌가 하고 우려하였다. 경찰부대의 접근을 발견한 일단의 노동자들이 몰려왔다. 경찰과 노동자들이 겨우 5∼7미터 가량의 간격을 두고 대치하는 형국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도 이처럼 경찰부대와 얼굴을 또렷이 알아 볼만한 거리에서 서로 맞닥뜨려 대치하는 것은 일찍이 경험한 바 없는 생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막상 경찰 병력에 맞서려 몰려왔음에도 잠시 무얼 어떻게 해야하는지 잊은 것처럼 일순 당황하며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당황한 것은 경찰이었다. 명령에 따라 무작정 진입했지만 전날부터 거칠기 짝이 없는 노동자들의 기세를 일부나마 맛 본데다 방금 안경다리에서의 동료부대가 일패도지(一敗塗地)하는 전황(戰況)을 먼발치에서 목격한 경찰부대는 이 상황을 읽을 능력이 없었다. 상대는 인생막장의 탄광노동자 무리들이다.

 

 단언하거니와 만약 이때 경찰 측에서 선제공격을 하여 기선을 제압했더라면 그 유명한 사북사태의 향방은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역에서 대치한 첫 순간 양측의 숫자로 볼 때 결코 경찰에 불리한 것도 아니었고, 그쪽에는 노동자들의 무기인 돌멩이와 갱목도 얼마 없었다. 기껏해야 2∼3초 가량의 정적이 흘렀을까, 경찰 역시 머뭇거리며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노동자측에서 팽팽한 긴장을 깨트리는 누군가의
"죽여!!"하는 고함을 신호로 손에 들고 있던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하였다. 마치 돌 던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경찰은 최루탄 한 발 쏠 생각도 않고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처음 올라 온 길로 도망간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뒤쳐진 상당수는 안경다리 쪽의 싸움을 끝내고 합류한 노동자들과 새마을 사택 쪽에서 새로이 합류한 노동자들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었다. 역으로 접근하는 양쪽 도로가 차단되자 역 정면의 폐석이 쌓이고 오솔길이 나있는 언덕으로 내리 뛰었다.

 

 언덕에서 뒤쳐진 일부 경찰관은 국민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곰 이야기를 생각했는지 언덕바지에서 실신한 듯 엎드려 있었다. 이미 격앙될 대로 격앙된 40세 가량의 노동자 한 사람이 실신한 척 쓰러져 있는 경찰관을 발견하고 옆에 있는 커다란 돌을 두 손으로 들고
"이 새끼, 죽여야지!!"하고 던지려하였다. 처음에는 같이 돌을 던졌지만 이미 상황은 우리의 승리로 귀결된 것이어서 경찰이 물러가게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 돌을 던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나는 이 소리를 듣고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얼른 그 노동자의 바위를 빼앗으며
"그러다가 진짜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경찰관의 귀에 대고
"이 바보야, 그러다가 진짜 죽어, 빨리 도망가!!"라고 소리치며 그 노동자를 가로막고 퇴로를 확보해 주었다. 그 소리를 들은 경찰관은 재빨리 일어나 비오듯 쏟아지는 돌멩이 세례를 뒤로하고 언덕길을 한달음에 나는 듯이 달려내려 갔다.

 

 이렇게 안경다리와 역전에서의 싸움이 일단락 되고 노동자들은 무리를 지어 읍내로 쏟아져 내려갔다. 시장 쪽으로 내려가니 머리에 피투성이가 된 경찰관 하나가(이 사람은 나중에 사망한 영월 경찰서 소속의 이덕수 순경으로 확인되었다.) 몇 명의 노동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걸어오고 있었다. 이 사람을 젖혀 둔 채 시장 골목으로 도주하는 몇 명의 경찰관을 안경다리에서 내려온 일군의 노동자들이 추격하고 있었다. 이 때 몇 명의 경찰관이 시장 골목으로 피신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길을 잘 못 들어 갇히고 말았다. 단골상회라는 당시 시장에서 제일 큰 소매잡화점 앞에 놓인 커다란 짐받이 자전거에 막혀 뒤쫓아오던 일군의 노동자들에게 붙잡혔다. 안경다리 전투에서 노획한 경찰봉을 손에 쥔 잘 아는 친구인 거구의 노동자가 그 경찰관을 붙잡고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이러면 안 된다!!"라고 소리지르며 제지하였다. 언뜻 보니 경장 계급장을 단 40세 가량의 경찰관은 공포에 찬 얼굴로
"나는 아닙니다, 나는 아닙니다!!!"를 연발하며 울부짖었다. 아마 자신은 노동자들에게 원한 살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동자들을 제지하던 나는 얼른 그의 진로를 막고 있던 자전거를 잡아 빼고
"빨리 뛰어!!"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틈을 탄 경찰관은 시장골목으로 뛰어갔고 그렇게 상황은 일단 정리가 되었다. 아직 산지사방으로 피신하는 경찰관들을 뒤쫓는 노동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안경다리와 역전 부근에서 여기저기 내던져진 경찰투구와 방패와 진압봉 등의 경찰장비를 수습하였다.

 

 이로써 경찰은 완전히 패퇴하고 사북 시가지가 노동자들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그러나 이 시각까지도, 아니 사실은 사태가 종결될 때까지 계속된 것이지만 노동자들의 행동을 지휘 통제할 지도부 비슷한 것도 구성되지 않았고 싸움의 목표가 무엇인지 정리되지 않았다. 일단의 노동자들이 윗사북과 아랫사북으로 흩어져 읍내를 진퇴하는 차량을 통제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모두 자발적으로 계획없이 행해진 것이다. 나는 이 시점까지 사북사태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 지부장 부인 린치 사건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경찰과의 싸움이 끝나고 읍내가 해방구가 된 오전 11시가 지나서 노동자들이 무리지어 스스로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흩어진 후에야 지부장 부인의 상황을 알게되었다. 문제가 된 지부장 이 모씨는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지낸 이웃집 어른이자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였다. 당연히 지부장 부인은 이웃집 아주머니이자 가장 친한 친구의 어머니였다.

 

 그 시점에서 상황이 서로 달라 대립하였지만 내 경우 직접 친구의 부친을 반대하거나 대립하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같은 상황을 낳은 구조를 문제삼는 것일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대립하는 진영에 속해 있는 것일 뿐 어느 특정 개인을 표적 삼아 적대하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몹시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지부장 부인에 대한 린치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고 광업소 본부에 억류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있을 수 없어 그곳을 달려갔다. 본부 입구 정문 철기둥에 묶여있는 부인은 여성으로서는 비교적 체구가 크고 건강한 편이었지만 앞서 있었던 린치를 짐작케 하는 초췌하고 지치고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서 수 십 명의 아낙네들이 지키고 있었다. 감시하는 조합원 부인들도 일정하지 않아서인지 새로이 참가한 부인들이 지부장 부인을 향해 갖은 욕설을 하였다. 욕설을 하는 심정을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직접 잘못이 없는 지부장 부인이 겪는 고통을 생각하니 몹시 마음이 아팠지만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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