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으로 돌아가다.

사북으로 돌아가다5.

소한마리-화절령- 2006. 4. 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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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읍내에 있던 노동자들이 광업소 본부에 올라와 광업소 본부 구내에 있던 간부 사택으로 몰려가 닥치는 대로 파괴하였다. 간부 사택이라고 해야 계장급이 다수이고 생산 현장의 과장급 간부인 갱장(坑長)들과 일부 보안감독직 평사원들의 주거지였으나 이러한 하급 관리자들조차 노동자들의 정서와 일치하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행히 전날 밤 객실이 노동자들에게 파괴된 것을 안 주민들이 미리 피신했기에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렇게 지도부도 없는 군중들 가운데 처음으로 사태 수습조건이 정리되어 제시된 것은 경찰이 물러가고 난 뒤 낮 12시경이었다. 지금의 노조회관 자리에 있던 버스 차고에 모여 있던 부녀자들이 중심이 되어


1. 지부장을 비롯한 노조간부의 완전퇴진과 직선제 실시
2. 임금협약 무효화하고 임금 총액 40%인상과 상여금 450% 지급
3. 암행독찰대 폐지
4. 계장급 이상 간부 전원 사퇴
5. 이번 사태에 대한 민, 형사상 책임을 일체 묻지 말 것
등 10여 개 항을 광장에 게시하는 한 편 읍사무소를 통해 당국에 전달하였다. 읍사무소를 통해 전달된 당국의 협상제의에 따라 대표단을 구성하였다. 지난해 지부장 선거에서 노조와 회사측의 부정으로 낙선하고 지금껏 선거무효 투쟁을 계속해 온 이원갑 씨가 대표단장 격으로 협상을 이끌었다.

 

 사실 이원갑 씨 역시 어용노조 개혁투쟁을 지속적으로 해왔지만 사태가 이렇게까지 확산되리라고는 의도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전날의 경찰 지프 사건 이후 사태를 적절히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원갑 씨 외에는 달리 사태를 수습할 적임자가 없었기에 그와 그의 측근들이 협상대표단을 이끄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협상대표단을 구성하는데 처음에는 자천타천으로 약 70 여명의 대규모였다. 그러다 보니 대표단 내부를 통제하는 데에도 문제가 생겨서 자발적으로 빠지는 사람이 나와 대체로 정리가 되었다. 나도 덕대 대표로 동료들에 의해 천거되었으나 너무 많은 사람이 나오는 바람에 자진해서 빠졌다. 또 곧 서울의 도시산업 선교회에서 사람을 파견한다는 연락을 받아서 그이들도 기다려야 했다.

 

 

  협상대표단이 구성되고 사태가 정돈되어 가자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규찰대 등을 조직하여 무정부 상태가 된 사북읍의 질서유지를 꾀하였다. 경찰의 패퇴 직후 일부 노동자들이 시장 상인들에게 술을 요구하는 등의 행위가 발생하였으나 규찰대의 활동과 노동자들의 자제로 더 이상의 불미스러운 일은 생기지 않고 사태가 끝날 때까지 비교적 평온을 유지하였다. 오히려 평소에 시장이나 읍내에서 노동자들을 괴롭히던 불량배들이 노동자들의 기세에 눌려 자취를 감추었다.

 

 

 수습을 위한 요구사항으로 제시된 계장급 이상 사퇴와 암행독찰대 폐지 등은 탄광 지역 가운데서도 동원탄좌의 노무관리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야비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노동조건이 동원탄좌보다 더욱 열악한 수많은 탄광이 있음에도 하필 동원 탄좌에서 폭발적인 투쟁으로 발전하였는가를 살필 수 있는 조건이다.

 

 우선 계장급 이상 전원 사퇴는 일면 노동자들의 전술면에서 지나치게 우군을 협소하게 제한하는 전술적 오류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투쟁 자체가 비조직적이고 계획없는 자연발생적 봉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며, 오히려 회사와 노동조합 측에서 평소에 관리직과 생산직간의 차별을 제도적으로 조장하고 방조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단결력 강화만이 아니라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도 구성원간의 인화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의 산물이다. 시쳇말로 겨우 한 끗 차이일 뿐인 계장급(계장급의 일부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관리직으로 출발한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최하위 생산직부터 시작하여 자격시험을 거쳐 승진한 사람들이다)과 생산직 노동자와의 정서적 교감도 이루지 못할 만큼 권위적이고 전근대적인 노무관리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용으로 낙인찍힌 노조 역시 회사측의 눈치를 보는 수준을 넘어서 회사의 노무관리의 한 부서로 자신의 정체성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정도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일반 조합원들에게 지부장 등 간부들은 지역사회의 유지로 행세하기에 바쁘고 노동자들의 권익이나 지위향상이라는 것은 염두에도 없는 것처럼 비친 것이다.

 

 암행독찰대의 폐지요구 역시 동원탄좌의 독특한 노무관리 제도의 산물이었다. 모두 회장의 고향인 전북 모 지역 출신 친인척으로 구성된 이 사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시에 갱 안팎은 물론 사택촌까지 사찰(査察)을 돌았다. 이들은 작업을 소홀히 하는 사람을 적발하는 것은 물론 회사 경영진의 방침에 대해 사적으로 나누는 불평불만을 염탐하여 적발되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징계에 회부하여 해고와 감봉 등의 처벌을 남발하였다. 78년부터 약 2년 여간 악명을 떨친 이들은 남발된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된 유신정권 아래서 비밀경찰을 정권유지의 주요한 축으로 활용하던 것을 그대로 흉내내어 수많은 노동자들의 원성을 산 것이다.

 

 이밖에도 탄광지역의 열악한 임금제도와 비슷한 규모의 인근 탄광에 비해 형편없는 복지시설과 제도 등등 노동자들의 불만을 촉발시킬 요소는 사방에 널려있었는데 하필 이모 지부장과 세련되지 못한 경찰의 허술한 대응으로 울고싶은 노동자들의 뺨을 때려 준 격이었다.

 

 노동자들의 힘겨운 노동조건과 열악한 생활조건은 어차피 상대적인 것이다. 동원탄좌라면 탄전 일대의 민영탄광 중에서 규모가 최대일뿐더러 다른 중소 영세 탄광에 비해 임금이나 다른 조건은 비교적 나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행독찰대와 같은 비정상적 사찰기구의 운영, 탄광지대 노동조합의 일반적 성격이 모두 어용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동원탄좌 노조 지도자들의 지나치게 노골적인 반노동자적 행태, 여기에 더하여 이원갑 씨를 지도자로 삼은 신경 씨 등 개혁파의 끈질긴 선거무효 투쟁과 함께 서울의 봄기운이 4월의 사북까지 어느 정도 불어와 준 것이 사태를 폭발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원갑 씨는 오랫동안 동원탄좌의 보안감독으로서 남다른 친화력과 소탈한 품성, 무엇보다 사심없는 정의감으로 일선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고 있던 분이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노조 민주화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를테면 최초로 광산지역에서 노조민주화운동을 전개한 분이다.

 

 신경 씨 역시 당시의 척박한 탄광지역 노동운동 환경에서는 보기 드물게 노조 민주화에 신념과 결단력을 소유한 분이다. 1971년 박정희 정부가 유신쿠데타의 전 단계로 선포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처음으로 적용받아 구속된 경력이을 정도로 일직부터 탄광지역 노동조합의 어용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분이었다. 사실 79년의 동원탄좌 노조개혁운동은 이 두 사람과 오항규, 조행웅, 최돈혁 씨 등 개혁파 핵심세력의 강력한 노조개혁의지와 지도력과 기획력에 힘입어 유례없이 끈질긴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4월 21일부터 24일까지의 폭력적 봉기를 이분들이 의도하고 기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큰 맥락으로 보아 "80년 사북 노동자 봉기", 즉 사북사태는 이들의 끈질긴 노조개혁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쨌거나 사태 수습을 위한 협상은 이날 오후 다섯 시쯤부터 사북에서 약 4km 떨어진 고한의 읍사무소에서 진행되었다. 도지사와 오전에 사북역전에서 진압작전을 지휘하다가 일패도지(一敗塗地)한 도경국장, 전국광산노조 관계자, 노동청 간부, 동력자원부 간부 등으로 구성된 정부측 수습대책위원들과 70여명의 자천 타천 대표단으로 구성된 노동자측의 협상이었다. 이날은 양측의 기본 입장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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