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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저녁 집으로 내려오니 서울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도시산업선교회는 아니고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약칭; 사선, 도시산업선교회
등 개신교와 가톨릭노동청년회-JOC-와 가톨릭 농민회 등 천주교 측의 연합기구)에서 간사로 일한다는 천영초 씨와 나중에 「말」지 편집국장을 지낸
정문화 씨라는 분과 함께 인명진 목사의 소개로 찾아온 기독교방송의 고희범 기자가 나를 찾아 왔다. 이미 도하 각 신문, 방송 취재진이 취재를
위해 주변에 들어왔으나 보도태도에 대한 불신 때문에 취재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사선에서 내려온 두 사람과 기자에게
우리가 입는 허름한 작업복을 입히고 광업소 본부와 마을 곳곳을 안내하여 그들의 취재, 조사활동을 도와주었다.
이들과의 만남은 이를테면 내게는 운동권 인사, 사회민주화 운동 일선에서 헌신하는 재야 인사와의 첫 대면이었다. 서울, 중앙이라는 곳에서 왔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천영초, 정문화 두 사람 모두 긴급조치 등 반유신 투쟁으로 투옥된 이력이 있는, 신문 등으로만 알던 진짜 민주화운동가라는 사실에 주눅들게 만들었지만 한편 신나는 일이기도 했다. 기독교 방송 기자 역시 단순한 직업 일꾼을 넘어 도시산업선교 활동 등에 협력하는 분이라는 소개에 존경의 염(念)을 품고 성심껏 그들이 편의를 도모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내려온 민주화 운동 진영의 조사단은 모두 나를 찾아왔다. 사실 나는 전화 한 통 한 것뿐인데 그것이 이들 재야 각
단체에서는 연고하나 없는 사북을 찾아 조사활동을 벌일 최소한의 근거가 된 셈이다. 이 일로 평소 내가 선망해마지않던 재야 민주화운동가들을 셋트로
줄지어 만나게되었고 이 사건은 이후 내 인생의 행로를 정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내가 맞이한 재야 단체와 인사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 찾아 온 사선 실무자들과 나중에 내려 온 NCC와 사선 고위 간부들, 앰네스티,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를 비롯한 청계
피복노조 관계자들, 황광우, 조성오씨 등 서울대조사단과 김철미 씨 등 이화여대 조사단, 천주교 J. O. C(노동청년회)의 정인숙 씨와 유영봉,
권운상, 홍을표 씨 등 통일사회당 조사단, 신민당과 통일당 조사단, E. Y. C 등 기독교 계통의 여러 단체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내게 깊은 인상을 주고 후일까지 친분을 유지하고 함께 활동을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천주교 노동운동의
여성지도자인 정인숙씨와 국민대학 복학생이자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 진상조사단의 일원인 권운상 씨가 그들이었다.
통일사회당은 우리 나라의 유일한 민주사회주의를 이념으로 삼고 있는 정당으로 평소에도 일정한 관심을 갖고있었다. 조사단장인 유영봉 정치위원이라는 분은 4.19 당시부터 혁신계 활동을 해오던 분이고 조사단원인 권운상, 홍을표 씨 역시 각각 국민대와 서울대에서 반 유신 투쟁으로 제적을 당하는 등 치열한 풍찬노숙의 삶을 살아온 이들이어서 가장 관심을 끄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통일사회당에 대해 아는 것은 당수인 김철 씨가 71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가 사퇴한 것과 77년인가 78년
동경에서 열린 SI, 즉 '국제 사회주의 연맹 총회'에 참가했다는 소식이 당시 중앙일보 문화면에 실린 것을 본 게 전부였다. 그렇지만 반공을
국시로 삼고 살아 온 이 나라에서 '민주'든 무엇이든 '사회주의'적 강령을 내걸고 정당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사나이다운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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