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으로 돌아가다.

사북으로돌아가다7.

소한마리-화절령- 2006. 4. 5.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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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거나 이들은 모두 사태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내려온 것이어서 이들의 도움을 받아 사태의 방향을 바로잡아야겠다는 내 기대는 처음부터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노동쟁의를 전문적으로 조정, 개입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그들도 대부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들을 안내하며 보내는 가운데 1차 협상이 결렬되고 22일 화요일 밤이 왔다. 아직 기차 통행을 막지는 않아서 인근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소문을 전해왔다.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당국에서는 무력진압을 기도하고 있고 열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영월에 공수부대가 사북에 투입되기 위해 진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광업소 본부에 몰려든 노동자들은 산더미처럼 쌓아둔 갱목더미에서 치솟는 불길과 공수부대와 관련된 흉흉한 소문에 다시 격앙되기 시작하였다. 설마 군인들이 우리를 공격하겠느냐는 말도 나오고, 그래도 일조 유사시에는 어떻게 하는가 하는 설왕설래가 있었다. 나도 공수부대의 투입은 가능성이 있다는 교회 동료의 주장에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가능성이 낮은 카드라고 생각하고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이 사건의 여파로 30개월의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에 만난 당숙부의 말을 듣고 가슴을 쓸어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11 공수여단의 하사관으로 장기복무 중이던 당숙은 그 해 4월 22일과 23일 부대원과 함께 영월에서 사북에 투입될 것을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해 5월에 광주에 파견되어 사북에 투입 대기하던 때와 똑같은 명령을 수행하고 올 초 사망하기까지 당시의 악몽에 시달리던 당숙은 사북에 투입되면 나와 우리 가족부터 찾아 피신시키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있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광주에서와 똑같은 명령을 받은 동료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우리가 살육 당할 것을 염려하였다는 것이다.

 이같은 당숙의 증언과 당시 상황을 추리하건대 당시 신군부는 12.12 직후부터 집권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길 빌미를 찾고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북 사태에 대한 보도를 일체 통제하다가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던 23일 저녁 9시 뉴스에 KBS를 필두로 "사북소요사태"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사건의 원인과 경과보다는 광업소 본부 구내 예비군 무기고에 수천 정의 소총과 수십만 발의 실탄이 보관되어 있고 인근 채광용 화약저장고에 있는 1,700톤의 다이너마이트가 난동광부들의 통제아래 들어가 있다는 것을 집중 조명하였다.

 

 77년의 이리 폭발사고 때 47톤의 화약이 폭발한 것에 비교해 난동광부들의 수중에 있는 1,700톤의 폭발물의 위력을 되풀이하여 비교하였다.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가 그런 무기와 폭발물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도 방송 보도를 보고서야 비로소 의식했을 만큼 노동자들의 큰 관심을 끌지 못한 일이었다. 공수부대의 투입설이 나돌던 22일 밤에 광업소 본부에 있던 일부 노동자가 광업소 본부 구내의 예비군 무기고에 돌을 던지다가 다수 노동자들의 제지를 받은 일이 있을 뿐이었다. 또한 지부장 부인린치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사태가 일어난 과정은 도외시하고 노동자들의 폭력성을 집중 조명하는 등 사태의 악화와 불안감을 부추기는 내용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조성을 마친 뒤에 사북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유혈진압을 한 뒤에 정국을 장악하려 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다만 사북이 너무 오지이고 아직 대학가의 움직임이 학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등 유혈진압을 감행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판단으로 일단 사북에서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고 5월의 광주로 계획을 연기한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 덕분에 사북의 나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졌고 대신 한 달 뒤 광주시민들이 그들의 참혹한 총검에 희생된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공수부대는 사북에 투입되지 않았고, 사북읍내를 점거하여 해방구를 만든 노동자들도 이틀 사흘을 불안한 소강상태로 지내자 몹시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인 노동자들은 우선 지부장 부인을 풀어주어야 된다거나 안된다거나 갑론을박을 하였다. 어쨌든 23일 늦도록 양측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초기의 강경한 노동자들이 협상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동자들이 협상을 주도하였다. 24일 아침 비로소 협상이 타결되어 지부장 부인을 석방하고 농성도 풀려서 대부분 노동자들이 귀가하였고 반쯤 철시하였던 상가도 문을 열고 거리를 청소하는 등 빠르게 평온을 되찾아 갔다.

 이 사태를 겪으면서 나는 어떤 식이든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해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첫째는 이 사태의 수습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지만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효과적으로 대변할 수단이 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타개하기 위해서는 탄광 노동자인 자신이 먼저 탄탄한 이론과 논리로 무장하고 주어진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여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본질적 사명을 철저히 깨닫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겠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역시 첫 번째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지만 나흘간의 사태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조직되고 교육되지 않은 노동자의 힘이란 역사발전에는 물론이고 노동자들 자신의 이익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나 자신부터 노동운동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겨우 눈을 떴을 뿐이었고 구체적인 파업 등 투쟁의 조직과 협상의 기술은 물론이고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사회경제적 지위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고 읽어내고 해석하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에 사태 전개과정에서 이렇다할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데 대해 몹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요컨대 무지와 증오에 사로잡힌 군중들의 무분별한 폭력으로부터 노동자들 자신이 해방됨으로써 진실로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이른바 즉자적(卽自的) 대중운동에서 대자적(對自的) 대중운동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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