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탄광촌을 떠돌며 자란 유년시절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문경군 가은읍이다, 어머니는 인근 점촌 출신으로 부모님 모두 대대로 문경에서 살아 온 분들이다. 친가의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일곱 살 때 돌아가시고 할머니도 곧이어 어디론가 개가하신 뒤 아버지는 조부모님 손에 자라셨다고 한다. 형제라고는 아무도 없는 외동아들로 말하자면 일찍이 고아가 된 셈이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사시긴 했지만 그냥 고아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문중의 장손인지라 나름대로 조부모님을 비롯한 집안의 고임을 받은 편이라고 한다. 친부모가 안 계시는 데서 오는 근원적 외로움 때문에 나중에 할머니, 즉 아버지의 어머니를 찾긴 했지만. 외가는 그냥 점촌의 농가였는데 그런대로 중농은 되는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외삼촌 중에 한분은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셨고 다른 한분은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한국전 발발 직후 피살되셨다고 한다. 1932년생인 아버지는 문경중학교에 다니다가 육이오 난리통에 군대의 노역원으로 끌려나가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스무 살 때 한 살 아래인 어머니와 혼인을 하시고 형을 낳고 정식으로 입대하셨다가 제대한 뒤에 내가 태어났는데 그때가 1956년이다.
가은에 있는 은성광업소는 일제 때 부터 가동된 오랜 탄광으로 돌아가시기 전 할아버지도 얼마간 탄광부로 종사하셨다고 한다. 군에서 제대하신 아버지는 위험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는 일단 해결되는 탄광에 취직하셨다. 제대하고 얼마간 은성광업소에 다니시던 아버지는 신혼의 살림을 끊임없이 간섭하는 집안어른들의 성화를 벗어나기 위해 형과 나를 데리고 어머니와 함께 아무 연고도 없는 강원도 장성으로 가셨다. 그곳의 탄광에 취직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아직 스물 대여섯살의 앳된 가장이 어린 자식 둘과 아내를 거느리기 위해 타관객지 낯선 땅에 숟가락 몽댕이 몇 개와 남루한 이불보따리뿐인 이삿짐을 부린 것이다. 장성과 황지에서 잠시 살았다는 데 워낙 어렸을 때라 기억은 없다. 다만 두 살 아래인 여동생이 장성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거기서 살았던 자취일 것이다.
내 유년의 기억은 함백에서 시작된다. 세살 위인 형님이 1960년에 정선군 신동면 함백국민학교에 입학하고 2년 뒤에 내가 입학했으니 57년부터 60년까지 3년 동안 문경 가은에서 장성, 황지를 거쳐 비로소 함백에 당분간 정착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장성으로 가신 것은 석공에 취직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나 여의치 않았기에 황지를 거쳐 함백으로 이주하셨을 것이다. 나중에 나도 탄광에 종사했지만 그나마 석공이 아닌 소규모 민영탄광의 노동강도나 취약한 산업안전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겪었을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불안이 얼마나 컸던 것일까 짐작하게 된다.
어쨌든 함백으로 오신 것은 석공에 취업이 된 때문일 것이다. 함백에서도 가장 골짜기에 해당하는 미륵골이라는 마을에 자리잡고 형과 내가 함백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
함백국민학교에 들어갈 무렵인가 우리가 살던 마을 앞에 넓은 공터가 있었다. 갑자기 불도저 등 중장비 몇 대가 와서 운동장으로는 너무 거대한(거대하게 보이는) 광장을 닦았다. 곧이어 국방색 천막막사가 설치되고 군인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이 가득 들어찼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강탈한 박정희가 삼청교육대의 원조인 국토건설단을 만들어 전국 각지로 보냈는데 그 중의 일부가 우리 마을에 온 것이다. 국토건설단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노숙인이랄 수 있는 걸인들에서부터 깡패, 병역기피자 등 사회적 불안요인(?)에 해당되는 이들을 전국각지의 도로나 철도 등 토목공사장으로 보내 노역에 종사하게 했다. 다행인 것은 우리 마을에 온 사람들은 교사나 공무원을 비롯한 화이트칼라 출신의 병역기피자들로 편성된 부대였다고 한다.
나중에 소설이나 실록에 보면 거지왕김춘삼부대 등으로 구성된 국토건설단이 주둔한 곳에는 인근마을에 도난이나 성폭행 등 갖가지 잡음이 끊이지 않아 주민들의 원성이 높아져 마침내 국토건설단을 해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 마을에 주둔한 건설단 부대는 보급도 넉넉하고 용돈을 쓰는 부대원들이 많아 마을 주변에 민폐끼치는 일없이 평온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매일 아침이면 국토건설을 상징하는 삽날 계급장 두 개나 세 개짜리 모자를 쓴 지휘자들의 구령에 따라 예미 고한간 철도 건설에 위해 태백산맥 줄기의 험난한 공사장으로 행진하는 부대원들과 함께 우리도 마을에서 십리는 떨어진 학교에 갔다.
한번은 마을에서 혼인잔치가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놀러가서 먹고 마신 끝에 동네청년과 휴가 나온 군인이 시비를 벌이다가 싸움으로 이어졌다. 싸우는 와중에 군인이 “이 자식이 군인한테 덤벼?” 하며 기세 등등하자 아버지와 동네어른들이 “군인이 벼슬인가? 군인세상 행세하려고 하네”라며 혀를 차던 일이 생각난다. 군사쿠데타 직후의 세태를 드러내는 일화였다고 생각된다.
내가 일곱 살 때인 1962년 입학한 우리 학교는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큰 국민 학교로 알려졌다. 면단위에 불과한 함백 땅의 국민 학교 1학년이 12학급으로 편성될 정도로 탄광부가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갑자기 학급당 60명이 넘는 꼬맹이들을 12학급씩이나 모아 놓고 무엇을 했는지 1학년의 기억은 거의 없다. 또래보다 한 살 적은 일곱 살에 들어간 때문에 적응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아직은 화전민도 적지않게 살고 있던 마을의 특성상 나보다 서너살 많은 아이가 동급생인 경우도 있던 터여서 일곱 살로는 그리 만만치 않은 1학년이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겨울이 되어 무슨 일인가 담임선생님이 자주 안 나오셨다. 때문에 가끔은 6학년 선배가 와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톱밥 난로의 불을 피워주기도 했던 것이 기억난다. 난로에 불 피우는 일은 나이 먹은 동급생들이 6학년 선배를 도와 함께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태백산맥의 한 자락에 자리잡은 강원도 탄광촌의 특이한 점은 거리거리의 전봇대마다 확성기가 달려 있어서 라디오 방송이 나왔다는 것이다. 특이하다는 것은 나중에 든 생각이고 당시로서는 어느 도시 어느 마을에나 그런 게(라디오 확성기) 있는 줄 알았다. 스피커는 거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택에도 집집마다 달려 있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누구나 다 들어야 했다. 라디오방송은 KBS가 유일했고 월요일 아침에 등교할 때면 광업소 조회 시간에 광업소 소장의 훈시가 쩌렁쩌렁 들리곤 했다.
김만곤이라는 소장 시절이 기억나는데 이 사람은 월요일마다 직원들에게 월 5만톤 생산목표를 달성할 것을 강조하였다. 월요일마다 “5만톤, 5만톤”을 노래하던 사람이어서 별명이 ‘5만톤’이었다. 또 12시 55분이면 이승만 목소리를 전문으로 하던 성우 구민이 진행하는 ‘김삿갓 북한 방랑기’가 흘러나와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하곤 했다.
이런 라디오확성기는 대한석탄공사가 있던 가은이나 장성 등 탄광촌의 특유한 것으로 일제 당시의 시설과 관행이 이어진 것으로 어떻게 보면 수용소를 연상시키는 일방적 통제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때로서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국민 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학년 전체 단체관람으로 학교 옆 극장에서 ‘요술소년’이라는 만화영화를 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영화라는데 그때는 더빙이 되어서인지 우리나라영화인 줄 알았다. 가끔씩 학교에서 실시하는 단체관람은 돈을 타 와야 하는 일이어서 좀 부담스러웠다. 함백으로 이사 오고 나서 둘째 여동생과 남동생이 잇따라 태어나 모두 일곱 식구가 되었다. 아버지는 직접 탄을 캐는 선산부나 후산부는 아니고 민영탄광에서는 감독이라고 부르는 최일선 관리자인 반장이었다. 나중에 아버지가 무언가 발명사업에 손을 댔다가 크게 어려워지기 전까지는 마을에서는 조금 형편이 나았던 것 같기는 하다. 다 거기서 거기이지만.
어쨌든 일곱 식구나 되는 살림에 늘 외상으로 사는 탄광촌 관습에 언제나 기성회비를 비롯한 잡부금을 제때제때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왜 그리 학교에서 내라는 잡부금이 그리도 많았는지........ 그때는 선생님들도 좀 순진하셔서 그랬을 것 같기도 하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멀쩡한 수업시간에 특정회사 외무사원이 교실에 들어 와 새로 나온 연필 같은 물건을 광고하고는 사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한다. 그러면 선생님들은 손든 아이들에게 집에 가서 돈을 가져 오라고 보내는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몇 번 십리나 되는 먼 길을 갔다가 어머니에게 꾸중만 듣고 되돌아 왔다.
영화를 보는 길은 단체관람말고도 가능한 방법이 있었다. 역시 국영기업인 대한석탄공사가 있는 탄광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학교 정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가 라멘교라는 철길을 지나면 새골사택이 나온다. 수백가구의 탄광노동자 사택이 몰려있는 사택 입구에 대한뉴스에도 나왔던 ‘새골아파트’가 있다. 아파트라야 2층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면단위에 아파트라는 이름을 단 주거시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날씨가 따뜻한 5월부터 8월쯤 까지 가끔씩 아파트 벽면을 스크린 삼아 광장에서 영화를 상영하였다. 광업소에서 영화필름과 영사기를 빌려 주로 광업소 종업원들인 주민들에게 무료로 제공하여 서비스하는 것이었다. ‘열두냥 인생’, ‘귀신잡는 해병’, ‘원술랑’등 영화를 보기 위해 초저녁부터 마을 어른들과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미륵골에서 내려가다 보면 신작로에서 안경다리 사람들, 모다뿔 사람들, 중앙사택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별일 없는 함백 사람들이 모두 모여 무료영화를 보는 것이다.
몇 학년 때인지 기억이 정확치는 않지만 하교길에 집으로 가다보면 중앙사택을 지나 넓은 공터에서 국극단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심청전이나 흥부전 같은 것을 공연하곤 했다. 남장을 한 여성 배우인지 소리꾼인지 화려하게 분장을 하고 벌이는 공연도 그런대로 재미있었지만 제일 재미있는(?) 장면은 밥 먹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놀부가 흥부집에 가서 하얀 쌀밥을 고봉으로 받아 놓고 대접받으며 방자하게 구는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나를 비롯한 구경하는 아이들의 꼴까닥 침 넘어 가는 소리가 더 큰 것 같았다. 탄광촌이라 그런대로 돈이 도는 곳이어서 그런 공연단이 가끔 찾았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궁벽진 산촌이긴 하지만 마냥 궁핍하기만 한 한촌(寒村)은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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