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백, 유년기를 떠나보내다’
국민학교 5학년 무렵까지는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평온한 살림이었다. 2학년 때인 63년 봄에는 온 가족이 영월에서 열리는 단종제를 관람하러 나름대로 잘 차려 입고 다녀오기도 했다. 그때는 당일치기라도 온 가족이 어디론가 관광을 간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던 것 같다. 우리 가족도 적어도 함백시절에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세 살 위인 형님은 국민학교 6년 내내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부모님도 형님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친척이 있는 충주에 있는 중학교로 유학을 보내셨다.
그런데 이듬해 1967년, 내가 6학년이 되던 해부터 집안이 어려워졌다. 그해 1967년은 삼남지방의 대기근이 있던 해였다. 라디오 방송이나 신문마다 삼남지방의 참혹한 가뭄 피해를 전해주었다. 한 외국인 신부(神父)가 버드나뭇가지로 수맥을 찾아내서 기적을 이루는 은인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콩반쪽도 나눠먹자’는 이시스터즈의 계몽가요가 온종일 거리를 메우기도 했다. 온 나라를 고통으로 몰아넣은 가뭄이었지만 산간오지에 있는 우리 마을에서는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어서 그 심각성을 느낄 이유가 별로 없어야했다. 그런데 그해 여름에는 우리도 몹시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한달에 한번씩 모다뿔1)에 있는 배급소에서 쌀과 보리를 배급받아 먹고사는 탄광부들에게 근태(勤怠)가 문제이지 가뭄여부가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도 그해 여름 어머니를 비롯해서 온 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산에 올라 산나물을 산더미같이 뜯어왔다. 쌀이나 보리는 흉내내듯이 넣고 나물만 가득 든 나물밥으로 여름을 났다. 지금이야 관광지 별미로 먹는 곤드레 나물밥 따위는 정말 신물이 날 정도로 먹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세워질 무렵의 주탄종유(主炭從油)정책이 주유종탄(主油從炭)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어서 석탄판매가 부진했기에 광업소측의 배급이나 임금지급 등이 밀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5학년 때인 그 전해 66년은 ‘더 일하는 해’였다. 4학년 때인 65년은 ‘일하는 해’였는데 1차 5개년 계획을 조기달성하기 위해 66년은 ‘더 일하는 해’가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민중들은 언제나 뼈골이 빠지도록 일해 왔지만 나라가 가난한 탓을 민중들이 일하지 않고 게으름 핀 때문으로 돌리는 구호와 노래가 확성기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일하는데도 그 시절에는 왜 그리도 배가 고팠을까?
게다가 아버지는 외삼촌 한 분과 함께 탄광노동자에게 필요한 용구를 발명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하여 집안이 몹시 어렵게 되었다. 그때는 그심각성을 충분히 몰랐지만 아버지는 탄광 붕락사고로 만 하룻동안인가 갱속에 매몰되셨다가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셨다. 그뿐인가! 아버지가 지휘하는 작업반에서 탄광노동자가 숨지는 사고로 학교앞 지서에 갇혀서 며칠 밤을 옥살이 아닌 옥살이를 하셔야 했던 일들. 아마 이런 것들이 아버지가 발명사업에 손을 댄 심리적 계기가 아니었을까? 일단 탄광에서 벗어나고 보자는....!
어쨌든 아버지의 발명사업 실패와 탄광에서 퇴직하신 때문에 결국은 형님도 중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였다. 나도 한번도 제때 내보지 못한 월 50원의 기성회비가 졸업을 앞두고 몇 달째 밀리게 되었다. 수시로 담임선생님의 독촉을 받는 것도 모자라 교장선생님에게 불려가기가 몇 번인지 모른다. 교장의 말씀이 춘천에서는 100원인데도 밀리는 학생들이 거의 없는 데 너희들은 어찌된 것이냐며 힐난하셨다. 부모님이 못 주시는데 우린들 어쩌란 말인지....! 교장실에는 제법 많은 아이들이 함께 불려가서 그닥 창피하지는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교장인지 수금사원인지 분간이 안됐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이들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은 석달치인가 넉달치인가 기성회비를 내지 못했다. 그 때문에 68년 2월의 졸업식은 어린 나이에도 평생 잊지 못할 절치부심의 수모와 분노를 안게 된다.
졸업식 당일 학교 근처 호수극장에서 졸업식 공식행사를 마치고 각반으로 돌아와 졸업장을 나눠주며 선생님의 덕담을 듣고 아쉬운 작별을 하는 시간이었다. 모두에게 졸업 후의 인생설계를 아름답게 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고 졸업장을 나누어 주는 순서였다. 내 차례가 지났는데 그냥 넘어가시는 것이었다. 나처럼 기성회비를 다 못낸 아이가 두 명이 더 있었다. 다 나누어 주시곤 그 아이들까지 세 명을 따로 일어나라고 하셨다. 밀린 기성회비를 언제 낼 거냐고 추궁하시는데 모두 어물어물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벌컥 화를 내시며 ‘마지막까지 선생님을 골탕 먹이는 너희들이 사회에 나간들 무슨 싹수가 있겠느냐’면서 한참동안 꾸중을 하는 것이었다. 마침 교탁위에 평소에는 결식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옥수수 빵을 학급 전원에게 주려고 큰 광주리로 하나 가득 쌓여있었다. 점점 화가 난 선생님은 교탁의 옥수수빵을 우리에게 집어던지며 졸업장과 앨범은 밀린 기성회비를 내고 찾아가라며 욕설을 그쳤다. 나머지 시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훌쩍거리던 두 아이의 얼굴이 선연히 떠오른다. 나는 울지는 않았지만 나머지 60여명의 반 아이들 앞에서 느꼈던 그 순간의 창피함은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때는 반 아이들 중 약 절반 정도가 중학교에 진학했던 것 같다. 나도 형님만큼은 아니었지만 공부라면 한 공부한 편이었다. 형님도 나도 6년 동안 전과, 수련장 한 권 없이 학교에 다녔지만 상위권을 놓친 적이 없었다. 2~3학년부터 읽은 신문과 독서 등 활자에 굶주린 편이라 공부에는 누구보다 흥미가 있었다. 그러나 6학년이 되어 진학에 관한 설문을 돌릴 때부터 나는 일찌감치 비진학으로 방향을 굳혔다. 6학년 봄부터 중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수업분위기가 빡빡하게 돌아갔다. 그렇지만 이미 진학을 포기한 터라 그해 봄과 초여름의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 유세가 열리면 수업시간에 빠져나와 선거연설을 들으러 가기도 하는 등 반쯤은 건달로 학교를 다녔다. 나중에 공화당으로 변절했지만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 후보였던 태완선씨가 안경다리에서 연설을 한다는 소식에 수업도중에 뛰어 나갔다가 다음날 선생님에게 몹시 얻어맞은 적도 있다. 집안형편으로 보아 이미 어렵게 된 데다 설령 진학을 한데도 국민학교보다 비싼 수업료와 잡부금으로 교사들에게 시달릴 일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었다. 이 일로 학교나 학교종사자들에 대한 혐오감은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소년잡지나 소년소설 등에서 읽은 입지전의 주인공들처럼 혼자서도 주경야독으로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10대 후반부터 공장과 탄광을 전전하며 좀더 나쁜 길(?)로 들어설 기회가 수없이 많았음에도 그나마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2~3학년 때부터 읽기 시작한 한국일보 등 신문을 통해 막연히 싹튼 사회, 정치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소망이 나쁜 유혹의 나락에 빠지지 않도록 한 것 일게다. 다른 하나가 바로 그날, 6학년 졸업반 담임이었던 이*백 선생님의 ‘너희가 사회에 나가서 잘 될 줄 아느냐?’는 덕담을 가슴에 아로새긴(?) 덕분이었을 게다. 하긴 그 뒤에 내가 겪은 신산(辛酸)의 세월을 생각하면 그 선생님의 덕담대로 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1980년 사북항쟁과 계엄법 위반 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으면서 그때 그 선생님도 1960년대 남루한 시대의 한국사회 구조에 충실한 소시민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까지 그 사건은 나를 지탱케 하는 강력한 버팀목이었다. 남루하다는 것은 경제사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다운 살림살이가 물심양면을 아우르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고의적으로 외면한 개발제일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수구매판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부끄러운 역사를 은폐하기위해 정권을 오로지하는 방편으로 온 겨레를 경제동물로 만들어 버리려는 물신주의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같은 물신주의의 황폐함이야말로 60년대 이래, 아니 해방 이래 오늘 이명박 시대까지 한국사회를 남루하게 만든 근원일 게다.
그 시절은 유력한 정보 획득 수단으로 신문이나 라디오 말고는 달리 없었다. 우리 동네 미륵골까지는 신문이 배달되지 않아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매일 하굣길에 역전 앞 아는 집에 맡겨둔 신문을 찾아가곤 했다. 오며가며 형님과 나는 신문을 읽는 게 주요한 일과였다. 활자에 굶주린 나에겐 더 없는 길잡이였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 제목도 있지만 나는 정말 신문에서 내 삶의 대부분의 지식과 정보를 얻었고 나아가 많은 지혜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졸업식을 그렇게 마치고 하릴없이 집에 있게 된 나는 학교를 벗어난 해방감에 젖어 있다가 용돈벌이로 신문 배달에 나섰다. 몇 백원의 돈을 받는 것보다 아침마다 신문이란 신문은 다 볼 수 있어서 그렇게 신이 났다. 그해 여름이 지나자 유년시절을 보낸 함백을 뒤로하고 사북으로 이사를 하는 등의 사정으로 얼마 못하고 그만두기는 했지만.
6남매의 자식들의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했던 아직 30대 중반의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발명사업의 실패 등으로 몹시 힘겨운 나날을 보내셨다. 아버지의 고통은 나머지 일곱 식구의 고통이었다. 다행히 잠시 동안의 좌절을 딛고 아버지는 신흥 탄광촌으로 떠오르던 사북으로 취업하러 가셨다. 국토건설단원들이 피땀 흘려 건설한 예미~고한간 태백선 연장구간 철도가 개통되어 사북과 정선 일대의 탄전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함백, 내 유년기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을 마침내 떠나게 되었다. 졸업식 날의 사건이 결정적이긴 했지만 그게 아니어도 마지막 몇 년간의 어려웠던 일들로 인해 함백의 기억은 썩 아름답지 않았다. 본래 고향인 문경을 떠난 3년 동안 장성과 황지를 거쳐 정착하게 되는 듯 했던 곳을 떠나는 기대가 더 컸다. 국토건설단이 떠난 뒤 공터가 된 연병장에서 마을 아이들끼리 가상 패싸움을 벌이던 일들. 여름밤이면 새골아파트 광장까지 온 동네 어른 아이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영화구경 가던 유쾌한 기억들.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68년 9월 18일 밤공기가 이미 싸늘해진 가을날 함백을 떠났다.
1) 모다뿔(motor pool). 중앙사택 입구에 있는 마을 이름이었는데 그때는 왜 모다뿔이었는지 몰랐다. 그곳에 광업소 차량을 관리하는 정비소 등 수송부가 있어서 붙은 이름인 모양인데 누가 그렇게 붙였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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