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으로 돌아가다.

을호사택(乙號社宅)

소한마리-화절령- 2010. 2. 23. 09:40

을호사택(乙號社宅)

 

 

아버지가 사북으로 떠나신 것은 68년 초였다. 그해 9월 18일 집안이 모두 이사하기 전에 몇 차례 어머니와 함께 사북에 가보았다. 동원탄좌 합숙소에서 생활하시는 아버지의 빨래 등 뒷바라지도 하고 새로이 이사할 곳의 사정도 살필 겸 다녀왔다. 함백의 약간 쇠락해가는 분위기와 달리 사북은 인근 고한과 함께 마치 골드러시 때의 서부를 연상케 하는 활기를 띤 곳이었다. 사북시가지는 비교적 한적했다. 아직 산촌의 고즈녁한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개발되기 시작한 탄광이 자리 잡은 화절령과 화절령에 거주하는 탄광노동자들이 사북으로 오가는 길목인 역전 아래 안경다리 부근이 훨씬 생기가 돌았다. 80년 4월의 대접전이 벌어졌던 안경다리와 화절령 일대의 풍경은 어린 나이에 보기에도 거칠고 투박하지만 민중들의 삶의 의지가 용솟음치는 터전이었다. 지금은 카지노로 가는 길목으로 변하여 간신히 흔적만 남긴 곳이 되었지만 오늘날 사북의 남상(濫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는 사북시가지와 화절령을 잇는 교통수단이 달리 없고 족히 십리는 넘을 산길을 걸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안경다리부근에서 화절령의 1030갱이나 다른 탄갱을 오가는 커다란 탄차, 10톤급의 트럭운전사들이 100원인가 몇 십 원씩의 삯을 받고 사람들을 짐칸에 태워주곤 하였는데 그것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화절령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이들이나 각종 행상을 하는 여인들이 주된 고객이었다. 사북시장에서 구입한 갖가지 물건들을 이고지고 가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10톤 가량 되는 트럭의 짐칸에 올라가는 것조차 여인들이나 노약자들에겐 험난한 중노동이었으나 그것도 안 태워주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광부보다는 탄차 운전사가 훨씬 벌이가 쏠쏠하다는 말이 나도는 게 괜한 것은 아니었다.

 

안경다리 일대 40~50미터 가량의 가설시장은 마치 복개하기 전의 청계천변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냇가에 판자로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과 난전에 채소나 각종 공산품을 펴놓고 파는 행상에 이르기까지 신흥 탄광촌의 활기가 그대로 배어나는 곳이었다. 집안이 모두 이사하기 전, 그해 여름 사북을 처음 방문했을 때 어머니와 함께 바로 그 트럭을 타고 화절령에 갔을 때 어린 나이에도 그 활기로움은 새로 이주할 곳에 대한 가벼운 흥분과 기대를 갖게 하였다.

 

화절령은 사북역에서 안경다리를 지나 지금의 강원랜드 카지노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난 옛길로 올라가 백운산으로 연결되는 산등성이를 가리킨다. 우리말로 ‘꽃께끼’ 또는 ‘꽃꺾이’라고 하는 고개마루 이름이기도 하고 마을이름이기도 하다. 최근 텔레비전에서 소개한 것처럼 이름 그대로 사계절의 풍광이 몹시 아름다운 곳이다.(2008년 12월 7일, KBS ‘영상포엠 내 마음의 여행 강원도 화절령 편’참조)

 

안경다리에서 걸어가면 한 시간 가량, 트럭을 타면 20분 남짓 걸리는 화절령은 1968년 당시에는 해발 1030미터 지점에 자리잡은 1030갱과 875갱을 중심으로 십여 동의 사택이 있었고, 주변 산비탈에 루핑이나 억새지붕을 이은 판자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정동상회를 비롯한 가게들은 모두 선술집을 겸하는데 이곳의 술집들은 편의점이 생기기 전부터 거의 24시간 영업이었다. 탄광부들이 갑·을·병 3교대로 돌아가며 퇴근길에 들러야 하기 때문이다. 화절령도 안경다리 일대처럼 초등학교 운동회 주변의 왁자지껄과 시골 가설극장 일대의 떠들썩을 합쳐 놓은 것 마냥 가난한 이들의 거칠고 투박한 삶의 의지가 넘치는 곳이었다.

 

외지에서야 탄광이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겠지만 탄광이라고 다 같은 탄광은 아닌 것이다. 나름대로 엄연한 급수가 있다. 크게는 함백이나 장성, 은성과 같은 석공(국영 대한석탄공사)은 민영탄광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거시설이나 각종 처우와 근로환경이 괜찮았다. 민영탄광은 비교적 규모가 큰 강원탄광, 삼척탄좌 등이 선호하는 곳이고 그 다음이 함태, 동고, 어룡 등의 중간규모의 탄광이다. 나머지는 ‘쫄닥구덩이’라고 불리는 위험하고 처우도 열악한 삼류 탄광이다. 아버지가 취업하신 사북 동원탄좌는 아직 중간 정도의 민영탄광에 속한 것 같다. 전체 종사자가 200~300명 정도이거나 그보다 적었는지도 모르겠다. 함백을 오전에 떠나 예미까지 합승을 타고 가서 다시 사북으로 들어가는 열차를 기다리다 여덟 식구가 사북에 도착한 것은 이미 날이 어두워질 무렵이었다. 사북역에서 안경다리를 지나고 동원탄좌 본사무실을 지나 80년대 사북광업소의 주갱이었던 육오공(650)갱을 지나면 나오는 을호사택이 우리 가족이 살 곳이었다. 소화물로 부친 이삿짐 말고도 아직 세 살인 막내 인욱이만 빼놓고 일곱 명이 남부여대(男負女戴)로 제각기 하나씩 이고 지거나 들 수 있는 가재도구를 가지고 사택에 도착하니 날은 저물어 있었다.

 

을호사택은 당시 과장이나 갱장(坑長), 등 동원탄좌의 관리직들이 사는 곳이었다. 화절령이나 고한에 있는 백운갱, 당목갱 등에 산재한 일반적인 광부사택은 일자형 주택에 다섯 세대가 붙어사는 몹시 열악한 환경인데 반해 을호사택은 한 동에 두 가구가 각각의 화장실과 적당한 마당도 있고 집 꼴을 갖춘 곳이었다. 무엇보다 탄가루 하나 날리지 않는 쾌적한 환경이었다. 화절령이나 사북사람들은 을호사택을 ‘양반사택’이라고 불렀으니 당시로서는 주민들의 성분이나 주거환경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을호사택에서는 1년 반 가량 살았다. 을호사택이 기억되는 몇 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는 삼총사라고 불릴 정도로 친한 친구가 두 명이 생긴 일이다. 같은 사택에 살던 이종운 군과 권오영 군이었다. 또 하나 을호사택이 좋았던 것은 신문말고도 읽을거리가 제법 있었다는 것이다. 이종운 군 집에 책이 많았고 예비군중대장이었던 권오영 군의 아버지에게도 읽을거리가 있었는데 아마 그 때문에 두 친구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어 더 친해진 것 같다. 지금껏 내 일생의 책으로 서슴없이 꼽는 책이 김구용 선생이 번역한 ‘동주 열국지’와 일본 작가 五味川純平이 쓴 ‘인간의 조건’ 두 권이다. 이 중 열국지는 이종운 군의 아버지 책이었고 인간의 조건은 권오영 군의 아버지 책이었다. 그밖에도 여러 집에 이런저런 읽을거리가 많아서 이사한 후부터 1970년 다시 중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을호사택에 사는 동안, 그러니까 68년 가을부터 어머니는 화장품과 옷가지 등을 이고 다니며 화절령과 박심리 등의 쫄닥구덩이로 불리는 영세탄광부들이 사는 산간마을로 팔고 다니셨다. 어머니 혼자 이고 다니기에는 무거워 주로 내가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화절령과 박심리, 두문동 등의 산간오지 수십 리 길을 함께 누비고 다녔다. 그렇게 고생한 끝에 함백에서 부터 지고 왔던 얼마간의 채무도 정리되고 집안의 살림도 약간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부모님의 회한 섞인 권유로 1970년 사북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어머니도 화장품 행상이 어느 정도 이력이 붙자 사북읍내에서 화장품 대리점을 시작하셨다. 따라서 을호사택에서 나와 사북읍내에 집을 마련하여 옮겼다. 화장품 대리점을 연 것 까지는 좋았다. 아버지는 동원탄좌를 그만두고 아는 분과 함께 고향인 문경 쪽에 가서 작은 탄광사업을 시작하셨다. 그 분은 돈을 대고 아버지는 채광을 책임지는 형식이었던 것 같다. 얼마 되지 않아 탄맥을 찾았다는 소식이 들리고 무언가 서광이 비치려는 때에 아버지가 급성폐렴이 걸리셔서 어머니가 급히 달려가셔야 했다. 그때만 해도 폐렴은 무서운 병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두어 달 가량 집을 비우자 화장품 대리점이 당장 문제가 되었다. 어머니를 대신하여 관리를 맡은 외무사원 부부가 하는 꼴이 어린 내가 보기에도 물건과 돈을 빼돌리는 것이 역력했다. 탄광사업 쪽은 또 그대로 채광을 책임진 아버지가 병환에 든 사이에 돈을 댄 동업자는 다른 채광 전문가를 영입하였다. 그해 가을에서 겨울사이에 화장품 대리점과 탄광사업 모두 실패한 것이었다. 운때가 맡지 않아 실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나 어머니 두 분 모두 장사나 사업가 체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장사나 사업이라는 게 우선은 셈이 밝고 잇속이 밝아야 되는 것은 물론 부리는 사람이나 고객에게도 냉정할 때 냉정하고 야무져야 하는데 도무지 두 분의 성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기들보다 2년이나 늦게 들어간 중학교 생활은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다. 적어도 여름방학 때까지는. 국민학교 때는 또래들보다 한 살이 적어서 다소 밀리는 감이 없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는 몹시 내성적인 성격에 책이나 신문만 끼고 다니는 편이었으니. 6년 내내 성적통지표에 ‘말없이 공부는 잘하지만 너무 내성적이어서 부모님의 지도가 필요합니다.’는 말이 토씨도 틀리지 않고 반복되었었다. 중학교에서는 국민학교 동기에 해당하는 아이들이 3학년인 상황에서 1학년을 다니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졸업식날의 사건과 학교를 다니지 않은 2년 동안 신문배달과 어머니 행상을 도우며 돌아다닌 이력이 붙은 것이다. 재미있다는 것은 아이들과 다소 껄렁대며 사북과 고한을 누비고 다니는 것이었다. 교사들에 대한 반감이 몹시 심해서 수업시간을 조용히 보내는 적이 별로 없었다. 시빗조의 질문을 하거나 책상 밑으로 ‘주간여성’이나 ‘선데이서울’ 같은 잡지를 돌려보기도 하여 어떻게든 교사들과 부딪치고 싶었으니.

 

3/4분기가 지나고 4/4분기가 되자 다시 수업료를 제때 못내는 사유를 설명해야 되는 처지가 되자 다시금 6학년 졸업식이 선연히 떠올랐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비좁은 산간의 탄광마을에서 달리 어쩔 방법이 없었으니. 집안 처지가 위태로워지고 학교생활도 시들해지는 때에 비슷한 처지였던 종운이가 뜻밖의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서울의 유명 중학교 시험에 떨어지고 재수 끝에 인근 영월중학교에 다니던 종운이가 가출을 하자는 것이다. 우리끼리 서울로 가서 주공야독을 하자는 것이다. 그 무렵 종운이 아버지가 무슨 사건으로 노조지부장에서 물러나고 곤란한 처지가 되어 종운이 어머니 혼자 네 아들을 거느리고 힘겹게 집안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때 종운이의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을 치며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는지 만시지탄이었다. 한 학기만에 시들해진 학교, 청운의 꿈을 담기에 너무 비좁은 사북으로부터 탈출한다는 게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유쾌한 상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