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절령통신

행정의 달인과 청관(淸官)정신

소한마리-화절령- 2010. 5. 25. 16:07

행정의 달인과 청관(淸官)정신

 

 

황인오(전 부천시민연합 공동대표)

 

청관 또는 대간(臺諫), 고려 시대의 어사대와 중서문하성 간관인 3품 관직의 낭사, 조선 시대에 대관과 간관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대관(臺官)은 관리를 감찰하는 벼슬아치이며, 간관(諫官)은 임금에게 간언하는 벼슬아치이다. 이들은 좁게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직이며, 넓게는 이 두 관서와 홍문관까지를 아우르는 관직이다. 홍문관은 경연의 자리에서 국왕의 교수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을 함께 이르러 3사(三司)라고 한다.

 

대간을 언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 시대에 언론을 주도한 관직이기 때문에 이러한 대간을 매우 중요시하여 이들 대간 직책은 높은 기개와 청빈을 요구하여서, 청요직(淸要職)이라 불렀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의 언관은 벼슬의 품계는 높지 않았으나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주로 임명하였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들 청요직을 거친 사람만이 판서나 정승 등 고위 관직, 즉 고관(高官)에 오를 수 있었다.

 

3사의 언론은 고관들은 물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한 여러 규정이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3사의 기능 강화는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 시대 정치의 특징적인 모습이다.《삼봉집》에서는 대간의 중요성에 대해 “간관의 지위는 비록 낮지만 직무는 재상과 대등하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전통사회의 관료제도는 지방자치가 부활한지 20년을 맞는 올해 6월 2일 지방선거를 맞아 세계화와 지방화를 동시에 지향하는 Glo-callism과 민관협치의 현대적 지방자치를 이끌 적임자는 어떤 유형이어야 할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군사독재, 또는 개발독재 시대의 중앙정부의 시책을 일방적으로 하달하는 형태의 지방행정으로는 참여와 자치에 걸맞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따라서 군사독재 시절, 일방적인 상명하달의 공무원으로 오랜 동안 재직했던 이들이 성년이 되어가는 지방자치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하고 다양한 시민사회와 소통에 애로를 겪으며 파열음을 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를테면 공복(公僕)의 의미를 국민 또는 시민의 머슴이 아니라 집권자, 독재자의 머슴으로 여기는 관행이 몸에 배어 자신들이 고관에 수령방백이나 고관에 오르면 이를 그대로 답습하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과거(科擧)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언관으로 임용하여 왕이나 대관들의 언행에 대해 형식적 적법성을 넘어 의리와 명분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단호하게 비판하는 훈련을 먼저 쌓게 하였다. 그 다음에 품계의 승차에 따라 수령 방백을 거쳐 정승판서의 대관에 올라 견제와 균형의 감각을 익히고 하급관리나 백성들의 간언이나 여론을 귀담아 들을 줄 알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의회나 언론, 그리고 이를 통해 전달되는 시민의 여론에 귀 기울이는 것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지난 6년간 추모의 집과 100년만의 눈 폭탄 처리를 비롯한 지역현안과 관련하여 부천 시민사회가 갈등을 빚고 소통하지 못한 것을 돌이켜 보면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전통사회의 목민정신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직업 공무원 출신의 행정의 달인들은 현대의 수령방백인 지방자치단체장이 되면 안 되는 걸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이들의 소중한 경험은 어떤 형태로든 평가하고 올바로 쓰여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들은 먼저 현대의 대간, 청관인 각급 의회를 거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의회를 통해 다양한 여론을 듣고 조정하며 지방자치의 수요자 측면에 서서 지방정치와 행정의 과(果)와 실(失)을 객관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을 거쳐 단체장을 맡는다면 훨씬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꼭 맞는 예일지 모르나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의 기능이 강화된 1차 대전 이후 장관이나 행정부 고관 출신이 대통령이 된 사례가 없다. 5성 장군 출신의 아이젠하워가 유일한 예외일 뿐 모두가 주지사나 상원의원 출신이다. 유력한 대선 후보로 거론되던 콜린 파월이나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에 기용되자 곧 후보군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것이 미국 정치의 관례이다. 크기나 규모에서 차이가 있지만 민주적인 현대 정치공동체를 이끌 수장으로 추진력만 앞세우는 독선적 지도자는 적당치 않다는 것이다.

 

각급 의회나 시민사회 활동을 통해 다양한 이해집단의 요구와 여론의 흐름을 이해하고 이를 조정하는 훈련을 거친 이들이 지방자치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성년을 맞는 6. 2 지방선거를 맞아 지방자치와 풀뿌리민주주의를 확고히 정착시키기를 바라는 유권자나 정당 관계자들 모두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