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목소리] “꿈속에서 바로 하느님 만날 수 있게 해주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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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죽음을 맞는 노인들
70살 이상 1인 가구 79만 세대 경제·육체적 고통에 우울증까지 마지막 순간 지켜보는 건 ‘TV’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북쪽 창문 밑에 눕힌다. 침상을 치우고 바닥에 눕히는데 이때 새 옷으로 갈아입힌다. 자식이 곁에서 손발을 잡고 운명을 지켜보며 유언을 듣는다.’ 사전에서 설명한 ‘임종’의 과정이다. 임종이란, 간단히 말하면 죽는 부모를 지켜보는 행위 또는 의식이다. 과거,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는 ‘불효 중의 불효’로 취급받았다. 부모·자식 관계를 떠나서 ‘산 자’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예의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도시화·핵가족화에 따른 비혼·저출산·황혼이혼 등 현상이 나타나면서 죽음을 ‘홀로’ 맞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다. 바로 ‘고독사’다. ‘고독사’라는 말은 노령화 문제가 심각한 일본에서 처음 사용했다. 영어권에서도 ‘코도쿠시’(Kodokushi)라고 하여 그대로 사용한다. 한국에서 정확한 고독사 통계를 낸 적은 없다. 다만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나온 1인 가구 수치를 통해 짐작만 할 뿐이다. 조사를 보면 한국의 1인 가구는 414만2000가구인데, 이 가운데 70살 이상 1인 가구는 79만3000가구에 이른다. 이 79만3000가구의 상당수가 ‘고독사’ 잠재 위험군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해, 일본에서 성업중인 유품정리회사의 한국지사가 설립된 것도 고독사가 더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이번 <낮은 목소리>는 고독사를 목격한 ‘홀몸노인 돌보미’와 고독사 고위험군에 속하는 80살 할머니를 인터뷰했다. 죽음은 혼자만의 몫이 아니다.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했다.
#2010년 2월16일
설 연휴 마지막 날, 맹순임(67) 할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상남도 바닷가의 한 작은 마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늦은 오후에 맹순임 할머니는 숨진 채 발견됐다. 할머니의 주검을 처음 발견한 홀몸노인 돌보미 박평희씨는 그 순간을 전하며 목소리를 떨었다. “평소에 천식을 앓으셨는데, 아마 돌아가시기 전에 호흡보조기를 착용하시려고 했던 거 같아요. 호흡보조기 옆쪽에 쓰러져 계신 걸 발견했어요.” 할머니는 천식 외에도 당뇨, 우울증 같은 병을 앓았다. 우울증 탓에 대인 교류를 기피했다. 이웃과의 소통도 거의 없었다. 남편은 오래전 사별했다. 아들은 수도권의 한 직장에서 일을 했고 딸은 출가해서 인근 대도시에서 살림을 꾸렸다. 할머니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어 글을 읽지 못했다. 돌보미 박씨가 신문이나 책을 읽어주거나, 통장 잔고 등을 확인해 주었다. 아들은 매달 60만원씩 용돈을 보내주었다. 맹 할머니는 여기서 40만원을 떼어서 “아들 몫”으로 적금을 부었고, 나머지 20만원으로 생활을 했다.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설을 홀로 보냈다. 아들은 ‘특근’ 때문에 내려오지 못했고, 딸도 시댁 차례 준비 때문에 오지 못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 할머니가 걱정된 박씨가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아들은 “며칠 전에 통화를 했다. 누나 집에 가셨을 거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딸하고는 통화가 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인근 병원에도 전화를 돌렸다. 이리저리 연락을 한 끝에 어디에도 할머니가 없는 걸 확인한 뒤 다시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박씨는 “할머니 소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너무 길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도착하니 문은 잠겨 있었다. 돼지우리를 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할머니는 숨을 거둔 뒤였다. 얼마 있지 않아 119구조대가 도착했다. 방 안의 텔레비전은 하염없이 말을 내뱉고 있었다. #2011년 1월31일 지리산 자락의 한 마을. 한파주의보가 발령됐다. 문고리에 손이 쩍쩍 달라붙는 추위였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홀몸노인 돌보미 김영희씨는 ‘딸부자’ 박임자 할머니가 걱정됐다. 예정보다 하루 빨리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길한 느낌이 머리를 스쳐갔다. 박 할머니는 90살이 넘은 초고령자였다. 귀가 어두운 탓에 전화를 받지 않기 일쑤였지만, 성난 동장군이 자꾸 거슬렸다. 박 할머니는 가끔 동네에서 사라졌다. 여섯명이나 되는 딸이 돌아가면서 할머니를 모시고 갔기 때문이다. 동네 주민도 할머니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으레 ‘딸이 데려갔으려니’ 생각했다. 할머니는 한 달 9만원의 노령연금으로 생활했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었다. 집 근처 작은 텃밭이 있어 꾸준하게 밭일을 할 정도였다. 건강하기도 했지만, 바로 어제 한 딸이 내려와 얼굴을 보고 갔다는 말을 들었던 터였다. ‘별일 있겠나’ 싶었다. 저녁 8시,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가 반듯이 누워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불빛이 비춘 얼굴을 보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김씨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예전에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봤을 때 사람이 죽으면 입이 벌어진다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겁이 밀려왔다. 이장에게 사실을 알렸다. 119보다 가족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기로 했다. 곧이어 동네 사람들이 주검을 수습했다. 사람들은 “복 받으셨네, 복 받으셨어”라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2011년 11월9일 서울 노원역과 상계역 사이 다세대주택 밀집 지역의 한 지하 전세방이 황차녀(80) 할머니의 집이다. 보증금 3500만원에 방 하나, 화장실 하나가 집의 전부다. ‘웅~’ 소리를 내는 냉장고와, 홀몸노인의 ‘친구’인 텔레비전이 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옆에는 할머니를 24시간 모니터링 할 수 있는 화상폰이 설치돼 있다. 센서가 부착돼 있어, 이상 움직임이 감지되면 돌보미에게 바로 송신된다. 이 화상폰이 모든 홀몸노인에게 지급되는 건 아니다. 고독사의 위험이 높은 고위험군에 우선 설치된다. 언젠가 할머니의 죽음을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는 건, 아마도 화상폰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텔레비전이거나. 방 안은 가스비를 아끼려고 보일러를 끄고 전기장판을 깔았다. 방 안에 들어갔을 때 쿰쿰한 냄새가 났다. 처음엔 노인들에게서 나는 체취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은행 냄새였다. 천식을 앓고 있는 황 할머니는 기침에 특효라는 은행을 길거리에서 주워와 껍질도 벗기지 않은 채 술을 담가 놓았다. ‘돌보미’가 정기 방문해 확인 “나 오늘 목욕도 했지라. 늙은이 몸에서 냄새난다고 할까배. 우째, 냄새 안 나쟤?” 몸 하나 누일 수 있는 이 작은 공간이 요즘 황 할머니의 최대 고민거리다.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올려 달라고 했다. “시방, 머시냐, 집주인이 커피 집을 낸다고 하드라고. 여기 지하방 말고 다른 층들도 다 올려달라고 했나벼.” 할머니의 수입은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에게 나오는 지원비와 노령수당을 합해 한달 42만7000원이 전부다. 할머니는 전남 벌교 출신이다. 19살에 시집을 갔다. 친구들 가운데 가장 늦은 노처녀였단다. 행복은 잠깐, 아들 하나 낳고 100일도 안 돼 6·25전쟁이 터졌다. 벌교에서 머슴까지 부리며 살던 아홉 남매의 집안은 그렇게 뿔뿔이 전국으로 흩어졌다. 셋째였던 할머니는 부산에 정착했다. 남편 수완이 좋아 군부대 물품을 납품하며 입에 풀칠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엔 서울로 올라왔다. 남편이 군부대 전기시설 사업을 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마흔이 되던 해, 남편이 폐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고난은 시작됐다. 장사란 장사는 다 해봤다. 얼마나 억척스러웠으면 시장에서 별명을 ‘또순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내가 어릴 때 벌교에서도 유명했었소. 꼬막을 캘 때도 남들이 한 바구니 캐면, 나는 두 바구니 캐야 직성이 풀려부러.” 그런 억척스러움으로 아들을 키워 장가를 보냈다. 하지만 먼저 간 남편은 그 몹쓸 폐암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온몸으로 전이된 암은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1년 투병하는 동안 모아 놓은 돈을 치료비에 다 부었다. 결국 그렇게 아들은 5년 전 세상을 떠났다. 두 손자와 며느리를 남겨둔 채. 그 뒤 할머니는 혼자가 됐다. 며느리하고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웬만한 남자들은 기로 누를 것 같은, 강단 있어 보이던 할머니도 이 부분에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아들이 떠나고 나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하느님에게 기도한다. “꿈속에서 바로 하느님 만날 수 있게 해주쇼잉”이라고. 요즘 소원은 그거다, 자다가 죽는 것. 겨울이 되면 그나마 성당도 다니기 힘들다. 기침 때문에 환장할 노릇이다. 미사 중에 기침이라도 터지면 걷잡을 수 없다. 큰손자 결혼식에도 그놈의 기침 때문에 가지 못했다. 잔칫날에 늙은이가 계속 기침만 하면 오히려 폐가 되지 않겠나 싶었다. 요즘은 그래서 휴지에 굵은소금을 싸가지고 다닌다. 기침이 터질 때 굵은소금을 털어 넣으면 잠시 잠잠해진다. 기침도 문제긴 한데, 손이 떨려서 큰일이다. “무슨 파킨슨인가 뭔가 그런 병이라드만.” 다리도 잘 안 펴지고 손발이 계속 떨린다. “살면서 만나본 가장 착한 사람”인 돌보미가 한번은 국수를 사준다고 데리고 나갔다. 손이 떨려서 젓가락질을 제대로 못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내가 누군데. ‘또순이’가 젓가락질도 못한다니. 그 뒤론 웬만하면 집에서 물 말아 밥을 해결한다. 아침은 10시 넘어서 먹고, 저녁도 오후 3시 정도에 먹는다. 반찬은 김치 하나다. 이제는 그것도 먹기 싫다. 물 말아서 먹으면 반찬이 안 먹힌다. “나는 본디 생선을 좋아하는디….” 할머니는 입맛을 다셨다. 텔레비전은 친구이자 자장가다. 24시간 틀어 놓는다. 집 안의 전등도 텔레비전 불빛으로 대신한다. 텔레비전에서 사람 목소리가 나와야 안심이 된다. 말소리가 끊기면 오히려 잠에서 깬다. 최근엔 그나마 잠도 잘 안 온다. 밤에는 온갖 걱정으로 불면 “잠이 왜 안 오세요?” “기자 양반, 내가 잠자리에서 머릿속에 기와집을 짓소.” “기와집이요?” “기와 한 장, 한 장이 다 걱정이오.” 할머니를 담당하는 돌보미 한명자씨는 “화상폰으로 확인을 해보면,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시는 경우가 많다”며 “사회생활을 전혀 할 수 없고 방 안에만 계시니 불면증과 우울증이 오는 거 같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형제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오빠 둘은 이미 오래전에, 그리고 4년 전엔 남동생도 죽었다. 남편 죽고 나서 남동생한테 많이 의지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뭐가 그리들 급한지. 그나마 살아 있는 여동생들도 강원도, 전라도, 부산, 대전 등지에 흩어져 산다. 가끔 전화만 하는 정도다. “내가 뭐 땀시 사는지 모르겄소. 누구 하나 나한테 뭐 하나 바라는 것도 없는디 말이오. 먹을라고 사는 거 같소.” 할머니가 시집갔을 때, 막둥이 여동생은 4살이었다. 꽃가마를 타고 집을 떠날 때 막둥이는 “언니, 가지 마. 가지 마” 울면서 마을 어귀까지 따라왔다. 백내장으로 허옇게 변한 수정체에 눈물이 고였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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