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적 환원을 위한 투쟁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난 독일의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은 원래 라이프치히, 베를린, 빈에서 물리학, 천문학, 철학을 즐겨 공부하던 수학자였다. 후설은 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인 마자릭(Thomas Masaryk)-후일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이 됨-의 권고로 대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브렌타노의 강의를 들으면서 철학으로 돌아서게 된다. 브렌타노는 후설이 평생의 직업으로 철학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철학을 가장 엄밀한 학문의 정신 속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후설이 살았던 19세기 말 시대의 변화는 자연과학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와 함께한다. 18세기의 칸트가 뉴턴으로 거슬러갈 수 있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대해 낙관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19세기의 후설은 현실 그 자체보다 가정과 모델을 중심으로 한 과학적 탐구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특히 그는 물리적 영역에 한정된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에 대응하려는 세기말의 다양한 시도들을 문제 삼았다.
공교롭게도 형이상학의 모든 가능성을 종결지었던 니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1900년, 후설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저작 <논리연구> 제1부를 출간하여 ‘현상학’이라는 20세기의 철학을 제시하였다. 제1부와 제2부로 나누어 출판된 이 기념비적인 저작에서 후설은 논리학의 본질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알고자 하는 주관성과 알고 있는 내용의 객관성의 관계를 파고듦으로써 새로운 ‘순수 논리’와 ‘인식 이론’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는 어떤 특정한 형이상학에 몰두하려는 니체보다는 지식이 가능한 조건을 추구했던 칸트적인 성향을 가지고서 논리학의 위상과 과학적 지식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특히 그는 이 과정에서 논리학을 심리학으로 환원시키려는 경험주의 심리학자들의 여러 범주적 오류를 발견하였다. 요컨대, 그 심리학자들은 논리학의 법칙을 특징짓는 이념성, 의심의 여지없는 확실성, 비경험적 타당성으로서 선험성과 같은 요소들이 사실적이고 경험적인 심리 본성에 의거하여 결코 해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설은 과학적 객관주의 학문과 초월적 주관주의 학문을 엄격히 구분한다. 후설에게 객관학문은 논리 실증주의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 경험을 통해서 미리 주어진, 즉 자명한 세계의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반면에 초월적 주관주의 학문은 과학 이전에 경험하는 삶의 성과물을 다루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초월학문은 과학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인간의 활동과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의 활동에서 발생하는 이론적 타당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후설은 철학의 영역에서 위대한 혁명이 과학적 객관주의 학문을 초월론적 자아와 세계에 대한 순수 정신적 접근에 입각한 초월학문으로 변형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후설은 모든 서구의 진리 역사를 객관학문과 초월학문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의 역사로 파악한다.
엄밀한 학문은 생활세계에 기초… 과학 토대는 일상 지식임을 보여줘
후설은 18세기 영국의 흄과 독일의 칸트가 초월적 진리 추구를 향한 미래의 길을 활짝 열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유럽에서 자연과학의 급성장이 오히려 이러한 객관학문 또는 객관주의적 철학의 세력을 부추겼고, 다시금 실증과학으로 그 세를 더욱 키워왔다고 주장한다. 근대 실증과학에 뿌리를 두고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편견들의 힘은 우리 자신에게 직접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의 영혼에까지 그러한 편견들이 주입되고 있다. 그래서 후설은 편견을 없애려는 추상적인 일반의지만으로 좀처럼 이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매너리즘과 ‘심리주의’의 수렁에 빠지기 쉬운 우리 인간의 주관성을 지속적으로 경계할 수 있는 초월적 인식론을 어떻게 발전시키는가에 있다. 그것은 알려고 하는 주관성이 단순한 기술이나 공허한 상태로부터 벗어나려는 초월적인 동기에 달려 있다. 후설은 이러한 본래적인 동기가 철저한 판단중지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후설은 우리가 지옥과 같은 판단중지를 통해서 절대적으로 합리적인 철학에 이르고 이를 체계적으로 구성하는 천국의 문으로 뛰쳐나가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현상학적 사유는 이와 같은 데카르트적인 전회와 칸트적인 전회의 대립 사이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둘 사이에서 궁극적인 전회를 제시하고자 하는 후설에게 있어서 칸트 이래 초월론적 전환을 위한 투쟁은 결국 진정한 초월적 환원을 위한 투쟁이었다. 여기서 칸트의 방식이 “신비적으로 구축하여 추론하는 방법”이라면 후설은 “철저하게 직관적으로 해명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진정한 초월적 환원을 통해서 도달한 초월학문이야말로 후설이 추구하고자 하는 ‘엄밀한 학문’(a rigorous science)으로서의 철학이다.
하지만 후설이 수립하고자 하는 엄밀학은 무엇보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는 자신의 생활세계적 통찰에 기초하고 있다. 일상생활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행위야말로 아직 불확실한 계획을 더 확고하게 만들고 동시에 부분적으로 성공한 실행을 더 명확하게 한다는 것이다. 무릇 모든 과학의 토대는 논리가 아닌 행위에 있으며, 그리고 전문적 지식이 아닌 일상 지식임을 후설은 보여주고자 하였다.
후설 현상학의 위업은 한마디로 “단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경시되어 왔던 “일상지식(doxa)”을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적 토대로 수립하고자 했던 점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객관적 인식의 궁극적 토대는 생활세계의 밑거름이라 할 수 있는 단순한 경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설은 그 경험을 통해서 “직관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믿음을 복원하기 위한 새로운 길은 객관적인 인식과 우리가 단지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이는 일상지식 간의 투쟁이다.
후설 현상학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 시대(1933~1945)에는 철저히 외면당하였다. 심지어 전후 프랑스에서도 후설을 하이데거의 시선으로 읽는 불행한 관행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건에서도 후설 현상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주요 사상가들로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슈츠, 레비나스, 리쾨르, 앙리, 데리다를 들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현상학에 기초한 이들 사상가가 자신만의 철학적 고유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대체로 후설을 비판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다행히 후설의 주요 강의와 다수의 미간행 원고들이 출판되어 이제는 후설과 그의 계승자들의 사상적 영향관계를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후설의 영향은 계속되고 있다. 그의 제1인칭 관점의 생활세계 현상학은 계량적 사회연구의 대안으로서 질적 연구의 사상적 토대가 되고 있고, 의식의 수동성에 대한 그의 정교한 기술은 최근 인지과학이론과 신경과학을 통해서 조명받고 있다. 그의 초기 산술철학과 논리연구 역시 영미 분석철학자들로부터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심각하게 계승해야 할 후설 현상학은 초월의식의 발생현상학(genetic phenomenology)이다. 의식의 시간성과 역사성에 기초한 발생현상학은 대상의 발생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 활동, 초월적 삶, 나아가서 본래적 의미의 공동체 형성과정을 기술하려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후설을 더 알고 싶다면
후설의 현상학적 개념들을 최초로 소개한 그의 초기 대저작 <논리연구>는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후설의 사회과학적인 통찰과 몸에 대한 통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II>(이종훈 역, 한길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내재적이지 않은 후설을 잘 담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이 저작을 통해서 자신의 몸 철학을 분석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후설의 초월적 현상학의 전모를 가장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보여준 저작으로 <데카르트적 성찰>(이종훈 역, 한길사)이 있다. 이 책을 불어로 옮긴 레비나스는 상호주관성이 주관성보다 더 기본적이라는 후설의 제5 성찰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타자성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20세기 초반 유럽 인간성의 위기상황에 대한 후설의 통렬한 비판과 초월적 현상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인간성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이종훈 역, 한길사)을 읽을 필요가 있다. 데리다는 이 저작에 부록으로 실린 논문 ‘기하학의 기원’을 불어로 번역하고 책 한 권 분량의 서문을 달았다. 이 책에서 그는 정태적이지 않은 후설을 발견한다. 즉 데리다는 후설의 발생적 현상학과 초월적 현상학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후설의 현상학적 개념들을 최초로 소개한 그의 초기 대저작 <논리연구>는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후설의 사회과학적인 통찰과 몸에 대한 통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II>(이종훈 역, 한길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내재적이지 않은 후설을 잘 담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이 저작을 통해서 자신의 몸 철학을 분석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후설의 초월적 현상학의 전모를 가장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보여준 저작으로 <데카르트적 성찰>(이종훈 역, 한길사)이 있다. 이 책을 불어로 옮긴 레비나스는 상호주관성이 주관성보다 더 기본적이라는 후설의 제5 성찰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타자성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20세기 초반 유럽 인간성의 위기상황에 대한 후설의 통렬한 비판과 초월적 현상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인간성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이종훈 역, 한길사)을 읽을 필요가 있다. 데리다는 이 저작에 부록으로 실린 논문 ‘기하학의 기원’을 불어로 번역하고 책 한 권 분량의 서문을 달았다. 이 책에서 그는 정태적이지 않은 후설을 발견한다. 즉 데리다는 후설의 발생적 현상학과 초월적 현상학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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