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대로, 네 욕망에 따라 행동하라
총선이 막 끝났으니 선거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겠다. 간과되고 있지만 선거권은 아무에게나 부여되지 않는다. 나이, 국적, 범죄 경력, 심신 장애 등을 이유로 선거권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선거의 주인, 유권자가 될 권리는 법이 정해놓은 테두리를 넘지 않은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이제 말하려는 라캉의 ‘주체’는 선거권과 무관하지 않다. 주체는 무엇보다 법·질서에 복종하겠다고 맹세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영어 사전에서 주체(subject)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주인과 하인 그리고 환자라는 의미가 나온다. 하인임을 인정할 때라야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다는 모순. 라캉에게 주체는 그런 것이다.
주체 : 라캉의 이론은 난해하다기보다는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나의 <에크리>(ecrits는 글 모음집이라는 뜻)는 읽히지 않기 위해서 쓰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글(언어)이라는 상징을 통해서는 그것을 넘어서는 상상(이미지)과 실재(물자체)를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을 집중해서 <에크리>를 읽을수록 그것이 말하는 진실로부터 그만큼 멀어지는지도 모른다. 라캉은 수수께끼의 탑을 쌓았다. 가장 아래에 괴어 놓은 돌이 무의식이라면 그 정점에 실재라는 (이해) 불가능의 돌을 올렸다. 따라서 그의 글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해가 끼어든다. 이 글도 어쩌면 오해와 이해의 사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글이란 라캉의 말대로 오해되기 위해 쓰이는 것이거늘.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의 안개가 걷히고 나니 눈앞에 세 개의 섬이 보인다. 그러나 썰물이 빠져나가고 나면 분리된 것으로 보였던 섬들이 사실은 하나의 섬에서 솟은 세 봉우리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캉은 주체의 이론가다. 그가 말하는 주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로 대변되는 철학적 주체(근대 이성의 주체로 라캉은 이것을 자아로 파악한다)와는 사뭇 다르다. 무의식을 강조했던 초기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창하며 라캉은 무엇보다 주체 개념을 세공해서 발전시켜 왔다. 자아를 강조했던 영미권의 자아심리학과 끝없이 투쟁해 온 라캉이 자아와 대비되는 주체를 강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주체/무의식을 분석하는 도구로 구조주의 언어학을 사용했지만 언제나 구조가 포섭하지 못하는 잔여물에 주목했고, 언어 사슬에서 벗어나 실재로 도약하려는 주체의 욕동에 주목했다. 이제 라캉이 들려주는 주체 탄생의 비화를 통해서 상상, 상징, 실재가 무엇인가를 짚어보도록 하자.
상상계 : 주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자아가 선행되어야 한다. 거울 단계로 알려진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시기에 자아가 탄생한다. 거울 속의 이미지를 보고서 “아! 저게 나로구나!” 하고 자기애에 빠져드는 유아. 그러나 라캉이 보기에 그것은 허상에 불과한 이미지를 자기로 오인하는 소외에 불과하다. 불행히도 인간에게 이러한 소외와 착각은 운명이다. 게다가 자기애의 이면에는 자기 파괴가 존재한다. 신화에서 나르시스가 이미지와 자신 사이에 놓인 심연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물속에 몸을 던지는 것뿐이었다. 라캉이 좋아하는 말장난을 해보자면 상상계의 거울(miroir)은 사랑(amour)이면서 동시에 죽음(mourir)이다. 발달 단계를 뜻하는 불어 stade는 무엇보다 투기장(stadium)이다. 엄마-아이의 2자 관계로 표상되는 상상적 층위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결코 평안한 관계가 아니다. 물론 엄마와 아이 모두 이것을 모른다. 언제나 아이 뒤에서 보호·감시하는 어머니의 존재는 아이에게 해롭다. 엄마의 치마폭은 아이를 바람으로부터 막아주기는커녕 질식시킨다. 상상적 2자 관계(dual)는 다름 아닌 사투의 관계(duel)이다. 이처럼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는 자아의 세계에 고착되면 자폐증(정신병)이 발생하는 것이다.
상징계 : 아버지가 개입해 엄마와의 위험한 2자 관계는 붕괴되고 3자 관계가 형성된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는 이름/금지(nom/non은 불어에서 동음이의어)로 존재하는 사법적 권위의 상징이다.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자 동시에 어머니가 욕망하는 대상, 곧 자신)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금지에 동일시하고 상징적 질서로 들어가 주체로 거듭난다. 이것이 상징적 거세이며 이 과정에서 중요한 상실/결여가 발생한다. 상징적 질서에 입장하는 대가로 자기 존재의 일부(어머니의 욕망)를 지불해야 하는데 이것이 잃어버린 대상이며 욕망을 야기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주체는 자신의 존재-결여를 메우기 위해 무언가를 욕망한다. 이 무언가가 통상 대상a/환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밑 빠진 독’이다. 오디오 파일들의 기기 바꿈질을 생각해보자. 그들이 욕망하는 소리, 소위 원음이란 기기의 재생음이 결코 아니며 그렇다고 공연장에서 듣는 생음악도 아니다. 그것은 뱃속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목소리일 것이기 때문에 바꿈질은 끝이 없고 지름신은 매일 강림한다. 그렇다고 대상의 끝없는 바꿈질(욕망의 환유)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사는 힘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 결여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삶의 조건이다. 상징적 질서에서는 비어 있는 공간(결여)이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라캉이 보기에 단어(기표)와 의미(기의) 사이에는 분단선이 그어져 있어 서로 만날 수 없고 따라서 단어는 내용이 없는 결여 그 자체이다. 이처럼 공허한 기표들의 사슬로 구성된 상징적 질서는 완전한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균열의 구멍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구조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을 수 없고 언제나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라캉이 통상적인 구조주의와 갈라서는 지점이 이곳이다. 결여가 없는 완전한 존재라고 믿었던 대타자 역시 결여에 시달리는 욕망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 주체의 분리가 시작된다. 분리(se+parer)의 어원을 분석해보면 ‘자신을 생산한다’는 의미가 드러난다. 이제 주체는 환상 대상이나 대타자의 종속된 욕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며 상징적 질서에 구멍으로 간헐적으로 틈입하는 실재와 조우하게 된다.
실재계 : 1960년대 이후 라캉은 실재(real)에 연구를 집중하게 되는데, 실재는 간단히 ‘불가능’으로 정의된다. “실재, 그것은 불가능이다.” 이것은 프로이트적 사물(혹은 칸트의 물자체)로 결코 알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호한 정의보다는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해 떼어두고 온 존재의 일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주체는 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사양하고 상실한 대상을 직접 찾아나서는 위험한 시도를 감행한다. 그것은 쾌락원칙(가장 낮은 수준으로 흥분을 유지하려는 목표를 갖는다)이 제시하는 금지선을 넘어 상징계의 매개 없이 사물(실재)과 직접 통교하려는 것이다. 실재는 결여가 없는 충만함이며 따라서 완벽한 만족을 주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궁극의 만족(이것은 긴장이 전혀 없는 죽음일 것이다)과 적정한 거리를 두려는 ‘쾌락’과 대조되는 ‘향유(jouissance)’는 극도의 흥분으로 정의되며 따라서 고통/쾌락, 주체/대상 사이 아무런 구분 없는 ‘물아일체’를 지향한다. 그것은 엄마와 구분 없이 하나가 되려는 것이기에 위험하고 죽음(태아)을 환기한다. 이제 주체는 상징적 질서에 포박당해 부름에 응답하는 수동적 존재이기를 그치고 절대적 만족을 향해 목숨을 거는 영웅을 닮았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윤리학이다. “실재가 추동하는 네 욕망에 따라 행동하라.”
마지막으로 상상, 상징, 실재는 상호 연결된 고리의 형태로 존재하며 우열 관계는 없다는 것을 말해두어야 하겠다. 일정 시기가 지나면 각 단계가 완료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매순간 각 계들이 상호 침투하며 하나만 빠져도 모두 붕괴되는 삼위일체의 구조다. 지금 이 순간도 ‘자뻑증’은 수시로 찾아와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고통/쾌락을 즐기기 위해 온갖 해로운 것들(술, 담배, 커피)을 음용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라캉을 더 알고 싶다면
라캉을 심화해서 공부하고 싶다면 당연히 원전을 읽어야 할 것이다. 라캉은 <에크리> 외에 따로 공식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에크리>는 접근하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번역본도 아직 없다. 27년간의 세미나 강의록이 해외에서 일부 편집 출판되었지만 번역된 것으로는 세미나 11권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맹정현/이수련 역, 새물결)이 유일하다. 구어체인 데다 <에크리>보다야 이해할 만하다고 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 입문 단계에서 권할 만한 것으로는 김석의 <에크리>(살림)와 <라깡의 재탄생>(김상환/홍준기 편역, 창작과비평사)에서 홍준기의 <라깡 정신분석학의 기초>가 우선 눈에 띈다. 무엇보다 읽기 수월하고 라캉의 주요 개념들을 대체로 무난히 요약해 놓았다. 그 다음으로 <에크리>의 영어 번역자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이성민 역, 도서출판b)가 읽을 만하다.
라캉을 심화해서 공부하고 싶다면 당연히 원전을 읽어야 할 것이다. 라캉은 <에크리> 외에 따로 공식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에크리>는 접근하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번역본도 아직 없다. 27년간의 세미나 강의록이 해외에서 일부 편집 출판되었지만 번역된 것으로는 세미나 11권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맹정현/이수련 역, 새물결)이 유일하다. 구어체인 데다 <에크리>보다야 이해할 만하다고 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 입문 단계에서 권할 만한 것으로는 김석의 <에크리>(살림)와 <라깡의 재탄생>(김상환/홍준기 편역, 창작과비평사)에서 홍준기의 <라깡 정신분석학의 기초>가 우선 눈에 띈다. 무엇보다 읽기 수월하고 라캉의 주요 개념들을 대체로 무난히 요약해 놓았다. 그 다음으로 <에크리>의 영어 번역자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이성민 역, 도서출판b)가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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