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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마주침’의 윤리학적 사유- 레비나스

소한마리-화절령- 2012. 4. 22. 13:25

너와 나 ‘마주침’의 윤리학적 사유

이정우 | 대안연구공동체 파이데이아 학장

 

ㆍ레비나스 (1906 ~ 1995)

레비나스는 사르트르(1905년생)보다 일년 후, 메를로 퐁티(1908년생)보다 2년 전인 1906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비교적 최근의 인물로 느껴진다.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가 거의 동시대(20세기 중엽)부터 잘 알려지고 연구된 데에 비해, 레비나스는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다음 세대에 해당하는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이 활기차게 연구된 연후에야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한 셈이다. 그의 주저인 <총체성과 무한>(1961)도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예컨대 ‘위키피디아’에서의 레비나스 항목은 (그의 사유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데리다 항목에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소략하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사유는 후설이 일으킨 현상학 혁명의 윤리학적 결실로서, 20세기 후반의 세계 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건너가 철학을 배웠다. 여기에서 모리스 프라딘, 샤를르 블롱델, 모리스 할브바흐스 등과 함께 공부했고, 특히 그의 평생 친구인 모리스 블랑쇼와 만나게 된다. 레비나스는 후설 현상학을 프랑스에 처음 본격적으로 소개한 인물이다. 1940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나치에 의해 포로가 되었으며, 그의 부모형제는 살해되었다. 그의 처자식은 블랑쇼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1947년에 <실존과 실존자들>, <시간과 타자>를 펴냈고, 1961년에 <총체성과 무한>을, 1974년에는 제2의 주저로 일컬어지는 <존재와 달리, 본질을 넘어서>를 출간했다. 1995년에 세상을 떠났다.

앵글로색슨적 가치가 지배적인 오늘날 현대 윤리학은 공리주의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윤리학조차도 계산 가능성, 효율성, 자본주의와의 친화성 등을 깔고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덕의 윤리나 칸트적인 의무론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이런 흐름들과 성격을 크게 달리 한다. 레비나스는 윤리학을 ‘제1 철학’으로서 제시한다.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에 부여된 ‘제1 철학’이라는 말을 윤리학으로 이전시킨 것은 단지 그가 윤리학을 중요시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레비나스는 전통 형이상학의 핵심 주제인 ‘초월성’과 ‘무한’을 바로 윤리의 차원에서 발견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의 사유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도덕형이상학(moral metaphysics)’의 혁신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윤리학의 차원에서 초월성과 무한을 발견한다는 것은 윤리학을 초월성과 무한의 형이상학으로 정초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레비나스는 가장 내재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에서 초월성과 무한을 발견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로부터 가장 먼 것으로 이해되었던 형이상학적 차원이 오히려 가장 가까운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때문에 우리가 이 차원을 잘 알고 있고 또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발 아래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잘 안 들어 오듯이, 오히려 이 차원은 너무나도 가깝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를 비켜가 있다. 바로 이 내재적 초월을 현상학적으로 서술하려는 것이 레비나스의 사유이다. 레비나스에게 윤리의 가능조건은 바로 이 차원에 있으며, 그의 윤리학은 바로 이 윤리라는 것의 가능조건을 드러내려 했다는 점에서 “윤리학에 대한 윤리학”(데리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생활 세계적 현상학을 창시한 후설, 그리고 현상학을 우리의 몸 가까이로 가져오고자 했던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같은 철학자들과 같은 궤도 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현상학/해석학 계열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그렇듯이, 레비나스 역시 하이데거와의 이론적 투쟁을 통해서 자신의 사유를 펼쳤다고 할 수 있다.

이 내재적 초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초월성/무한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이야말로 윤리학의 가능근거인 상호주체성의 파열이며, 가장 생생한 직접성이며, 현상학이 서술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은 아직 사유로서 반성되고, 언어로서 표상되고, 개념을 통해 파악되기 이전의 차원, “타자성(otherness)”과 조우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인지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에게서는 “우리가 어떻게 타인의 마음을 아는가?”와 같은 물음은 이차적인 것이다. 레비나스는 후설의 주지주의를 벗어나 만남을 그 직접성에서 포착하고자 한다. 또, 레비나스의 타인은 사르트르에서처럼 응시를 통해서 그와 주체-되기를 겨루어야 하는 존재, 즉 대자존재(의식을 가진 존재, 즉 주체)도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사건은 전-반성적 주체, 주객 분리 이전의 주체(아직 주체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가 겪는 사건이다.(이 점에서 메를로 퐁티의 사유에 근접한다) 그것은 전-인지적인(pre-cognitive) 마주침, 순수한 “마주침”이다.

이 마주침의 사건은 내가 타인을 만나는 사건, 그를 대상화하고 규정하는 사건, 그와 시선으로 경쟁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 내게 마주쳐 오는 사건, 타인이 내게 말을 걸고 나를 부르는 사건이다. 설사 타인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얼굴은 이미 그 자체로서 나를 부른다. 내가 타인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에게 어떤 타자성으로서 부딪쳐 오는 것이다.

이 마주침(encounter)에서 얻게 되는 것은 ‘데이터’가 아니다. 인지과학에서 논의되는 타입과 토큰을 생각해 보자. 타입은 인식 주체가 이미 갖추고 있는 틀이며(칸트로 말해서 선험적 조건), 토큰은 인식 주체에게 마주쳐 오는 사건으로서 타입의 총체성을 뒤흔드는 것이다. 이런 구도는 인식 주체의 틀로 인식질료를 구성해버리는 칸트의 인식론을 넘어, 객관적으로 생성하는 마주침이 주체의 틀을 변형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추상적인 인식 틀로는 결코 환원되지 않은 질(qualia)이 존재한다는 것도 밝혀졌다. 레비나스의 사유는 이런 생각에 일정 정도 조응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대상이라는 인식론적 개념이 아니라 타인이라는 윤리학적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에서의 마주침은 오히려 들뢰즈의 그것과 가깝다. 들뢰즈에게 마주침이란 ‘타자(the other)’와의 마주침이다. 그리고 들뢰즈에게서도 역시 타자는 (칸트에서처럼) 주체에 의해 구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주체의 경험의 한계를 깨주는 존재이다. 들뢰즈의 사유는 경험을 한계짓고 있는 선험적 조건의 틀 자체를 넘어 경험을 확장해 가는 선험적 경험론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타자와의 마주침’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레비나스는 들뢰즈의 이런 사유를 공유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윤리적인 맥락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경험을 확장해 나가기보다는 마주침이 일어나는 그 원초적 차원을 현상학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가다머 등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레비나스는 이들보다 더욱더 원초적인 마주침의 순간에 주목했으며 거기에서 윤리학적 사유를 펼쳐 나갔다.

타인과의 마주침은 혹시 저 사람이 나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경쟁과 질시, 모략 등등으로 점철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이런 변질이 일어나기 이전의 마주침의 장, 내가 그 무엇으로도 규정하고 판단할 수 없는 어떤 타자성과의 만남, 이 초월성과 무한의 만남의 장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차원이야말로 모든 형태의 윤리학의 가능조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가능조건을 사유하는 과정에서 그는 ‘타인의 얼굴’에 관한 다양한 통찰들을 남기고 있으며, 가장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심오한 개념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런 개념화의 중심에서는 또한 책임의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레비나스의 사유는 타인의 얼굴이 내게 던지는 책임(responsibility)의 사유이다. 레비나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한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살았으면서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숭고한 윤리의 가능성을 발견한 철학자였다.

레비나스를 더 알고 싶다면

레비나스의 저작들 중에서는 <탈출에 관해서>(김동규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문예출판사, 1996), <존재에서 존재자로>(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4), <존재와 다르게, 본질의 저편>(김연숙/박한표 옮김, 인간사랑, 2010),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김교신 옮김, 동문선, 2003), <에마뉘엘 레비나스와의 대담>(김응권 옮김, 동문선, 2008) 등이 번역되어 있다. 레비나스에 관한 저작들로는 베른하르트 타우렉의 <레비나스>(변순용 옮김, 인간사랑, 2004), 윤대선의 <레비나스의 타자철학>(문예출판사, 2009), 강영안의 <타인의 얼굴>(문학과지성사, 2005), 마리안느 레스쿠레의 <레비나스 평전>(변광배 외 옮김, 살림, 2006), 박원빈의 <레비나스와 기독교>(북코리아, 2010), 김연숙의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인간사랑, 2001), 콜린 데이비스의 <레비나스: 타자를 향한 욕망>(김성호 옮김, 다산글방, 2001), 황덕형의 <하나님의 타자성: 웨슬리 바르트와 레비나스의 타자성 연구>(서울신학대학교출판부, 2001) 등이 나와 있다. 레비나스 관련 사이트로는 “The Levinas online Bibliography”, www.web.me.com/joachimduyndam/levinas를 참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