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흥부사 홍양호의 활동 |
김 문 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
홍양호는 1777년 10월에 경흥부사로 임명되었다. 정조가 국왕이 되고 1년을 넘긴 시점이었다. 이미 대사간과 대사성을 역임하고 황해 관찰사까지 지낸 그를 경흥부사로 내보낸 것은 명백한 좌천이었다. 정조가 즉위한 이후 홍양호는 홍국영 일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정조의 즉위를 방해한 정후겸과 같은 무리라는 비난이었다. 홍양호에 대한 공격이 해를 넘겨도 계속되자 정조는 그를 최북단 지역의 수령으로 내보냈다. 그의 자질이 뛰어나므로 변방에서라도 효과를 발휘하게 하자는 것이 이유였다. 정조가 기대한 대로 그는 현지에서 뚜렷한 활동을 보였다. |
변방 좌천, 오히려 경험 쌓고 능력 발휘할 기회로 |
경흥부사 홍양호는 북방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대책들을 제시했다. 그는 영조 대에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편찬하면서 지리학자인 신경준과 만나 역사지리에 관심을 가졌다. 경흥부사로 있으면서 그는 북관 지역을 답사하며 숙종 때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로 인해 조선의 국경이 부당하게 축소된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백두산 동쪽의 국경은 두만강이 아니라 흑룡강이며, 고려 때 윤관 장군이 선춘령 비를 세운 곳은 두만강에서 북쪽으로 700 리나 떨어진 곳으로 비정했다. 그는 조선 정부가 백두산을 중심으로 흑룡강과 혼동강 이남의 땅을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북관 지역의 읍에 나무를 심어 재해로 농토가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고, 폐사군 지역의 후주(厚州)에 읍을 설치하여 버려진 땅을 개척하자고 건의했다. 홍양호는 조선과 청의 교역 상황을 관찰하여 기록했다. 경흥 인근에서 청과 정기적으로 교역하는 북관개시(北關開市)가 열렸기 때문이다. 매년 11월과 12월에 회령에서 단시(單市)가, 한 해의 중간에는 회령과 경원에서 쌍시(雙市)가 열렸으며, 조선의 수출품에는 소, 가래, 소금, 해삼이 있고, 수입품은 사슴가죽과 양가죽이었다. 심양, 오랄, 영고탑, 후춘 같은 지역에서는 달마(㺚馬)라 불리는 말을 가져왔으며, 준마인 경우에는 소 너덧 마리와 맞바꿀 정도로 값이 비쌌다. 당시 준마를 요구한 사람들은 서울의 벌열가였으므로, 변방의 백성들은 벌열가의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해 생필품인 소를 팔아야 했다. 변방의 국방·교역·민생을 살피고, 저술 활동을 마지막으로 홍양호는 다양한 저술 활동을 했다. 그는 경흥에 머문 3년 동안 문을 닫아걸고 책을 읽었으며, 문자학 이론서인 <육서경위(六書經緯)>와 <만물원시(萬物原始)>, 경흥 지방의 지리지인 <북새기략(北塞記略)>, 주역 해설서인 <대상해(大象解)>를 저술하고, <북새잡요(北塞雜謠)>나 <삭방풍요(朔方風謠)> 같은 문학 작품을 남겼다. 또한 그는 목민서에 해당하는 <목민대방(牧民大方)>을 이 때 만들기 시작하여 평안 관찰사 시절에 간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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