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 익스트림

"귀신이 어깨 잡아당겨요" "인도가 둥둥 떠다녀요"선수들이 겪은 데자뷰

소한마리-화절령- 2013. 8. 17. 11:17

"귀신이 어깨 잡아당겨요" "인도가 둥둥 떠다녀요"선수들이 겪은 데자뷰

한국일보 | 조원일기자 | 입력 2013.08.17 03:35

주자들이 꼽는 주행의 난적은 발과 다리 통증이다. 특히 물집 속에 다시 생기는 이중물집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염증도 있다. 하지만 통증이나 염증은 비와 땀, 일조량, 반창고 부착 위치와 두께, 사용하는 장비 등 미세한 차이에 따라 정도가 달라진다. 때로는 운도 많이 작용한다. 이런 저런 변수를 제외했을 때 선수들 개인 간의 기량 차이는 부족한 잠과 피로를 관리해 나가는 정신력에서 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정신력 싸움에서 위기에 처할 때 주자들은 정신착란-그들이 '데자뷰'라고 부르는-을 겪는다.

↑ 147시간여 만에 622km 대장정의 결승점인 강원 고성군 출입국사무소에 도착한 참가자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고성=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오명환(53)씨는 이번 대회 달리는 내내 같은 동호회 사람들로부터 '사우나 마니아'라며 놀림거리가 되고 있었다. 지난 해 537㎞ 국토 종단 마라톤에서 그는 결승점 20㎞를 남기고 국도변 사우나로 들어가 실격 처리됐다. 오씨는 "그 날 비가 막 쏟아지는데, 아휴…, 그냥, '내가 왜 뛰지?' 이런 생각이 그냥 갑자기 막 드는 데 어떡해"라며 옆길로 샌 이유를 설명했다. 오씨는 "그 땐 뭐 이만하면 됐다 싶었는데 사흘 지나니 억울해 죽겠더라"고 했다. 한 동호회 회원은 "오씨의 경우엔 급격히 찾아온 무기력감의 형태로 데자뷰를 겪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용관(53)씨는 양 손으로 반대쪽 어깨를 번갈아 쓸어 내리며 뛰는, 이상한 주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13일 새벽 2시쯤 결승점을 30㎞ 남짓 남겨둔 고갯길 내리막 지점에서였다. 함께 가던 사람이 이유를 묻자 김씨는 "형, 지금 귀신이 막 (내 어깨를) 잡어!"라고 답했다. 30여분간을 더 '귀신'과 실랑이를 벌이며 달린 김씨는 마지막 CP에 무사히 도착해 휴식을 취한 후 나머지 구간을 완주했다.

진부령에서 졸음을 이기기 위해 노래를 불렀던 이신옥씨는 "충주쯤이었나, 세 시간이 넘도록 같은 구간을 반복해서 뛰고 있는 거에요"라며 이틀 전 저녁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작년 종단 마라톤에서도 비슷한 증상이 와서 중간에 포기했는데 이번엔 다행히 주변 동료들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들이 손 흔들어 주는 가족들로 보인다""인도가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물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는 경험담도 있었다. 어떤 주자는 "그나마 친숙한 사람으로 보이면 몽롱한 상태에서도 달리지만 혐오감이 들 정도로 어려운 사람이 보이면 공포감 때문에 그 자리에서 주저 앉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