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봉 아래 우이동2] 우이령길 걸어 넘기
40년 가 닿은 그 십리 길에서 월간마운틴 글 이영준 기자 사진 양계탁 기자 입력 2013.10.08 10:01
↑ 우이령 정상에 아직도 남아 있는 대전차 장애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모습에서 우이령 길에 담긴 근현대사를 확인할 수 있다.
취재를 위해 우이동에서 만나 동행한 북한산국립공원 박남진 자연환경해설사는 우이령 길의 이쪽부터 저쪽까지의 거리가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총 거리는 6.8km이지만, 길 입구의 포장도로를 제외하고 탐방안내소간의 거리는 십리가 조금 넘는 길이었다.
우이령 길은 6.25전쟁 때 작전도로로 개설돼 1965년 국군과 미군 공병대가 개통한 군사도로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대동여지도>에도 나올 만큼 그 이전부터 사람들이 왕래하던 서울 외곽의 고개 중 하나였다. 특히 북쪽인 장흥, 송추 일대의 사람들이 우이동 유원지의 가게들과 수유리, 미아리의 시장에까지 나가 농작물을 팔기 위해 넘던 '삶의 길'이기도 했으며, 6.25전쟁 때는 의정부와 창동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피해 사람들이 숨어 넘던 피난로이기도 했다.
↑ 정상에서 교현리 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오봉을 잘 조망할 수 있는 전망 데크가 설치돼 있다. 그 옆엔 사방사업 기념비가 함께 서 있다.
그런 우이령 길이 막히게 된 건 1960년대 말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1968년 1.21사태 때 청와대를 습격했던 무장간첩들이 이리로 넘어왔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김신조 등 간첩들은 청와대까지 가장 빠른 길인 북한산 서쪽, 비봉 부근으로 넘어와 북악산을 따라 들어갔으며 이곳은 퇴로로 사용하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부터 우이동 쪽에는 전경부대가, 반대편에는 육군부대가 들어서며 41년간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어왔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90년대 중반부터 일어난 우이령 길 개방에 대한 사회 여론에 힘입어 부분적으로 개방되어오다가 2009년에 들어서야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전면 개방되었다. 때문에 40여 년간 발길이 닿지 않은 고갯길을 두고 사람들은 '서울의 DMZ'라고 불렀다. 서울의 난개발 속에 그나마 식생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의 DMZ'라는 말은 우이령 길에 대한 기대를 더욱 크게 했다. 마치 아마존의 원시림과 같은 풍경이 펼쳐질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 같은 것.
박남진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탐방지원센터를 지나자 곧바로 802전경대 막사가 나타났다. 앳돼 보이는 청년들은 오늘은 훈련이 없는지 연병장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바닥엔 예전부터 그들이 작업했을 것이라고 설명하는 보도블록이 깔려있었다.
"하루 통행 제한 인원이 양쪽에서 500명씩인데, 처음 개통됐을 때는 사람들이 몰리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 인원이 다 차지는 않아요."
그의 말처럼 제법 선선해진 날씨에 산행하기 좋은 날임에도 오전시간 우이령을 걷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보도블록은 얼마 가지 않아 흙길로 바뀌었다. 박 해설사는 "처음 개통 당시 누구나 맨발로 걸어도 좋은 길로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우이령 길 개방에 앞서 관리공단에서는 도로 양 옆으로 배수로를 만들고 곳곳에 쉼터를 조성했으며 몇몇 꽃들도 길섶에 심었다. 이와 함께 한 것은 군용 트럭들이 지나다니던 거친 흙길에 부드러운 마사토를 깔아 보다 걷기 좋게 만든 것이다. 당시 이를 모니터링 했던 우이령보존회는 보고서에서 '획일적인 토목공사로 사람들이 걷기에는 좋아졌지만 자연스러운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허나 그런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1992년부터 협의를 진행, 1994년 59억 원의 예산을 들여 우이령 길을 포장된 2차선 도로로 만들겠다는 계획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만일 그때 이곳이 사람의 길이 아닌 자동차 길이 되었더라면 지금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니, 차라리 1968년 이곳에서 총성이 울리지 않았더라면, 나아가 남과 북이 둘로 갈리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우이령 길은 촌로가 지게를 지고 넘는 온전한 사람의 길로 지금 남을 수 있었을까.
↑ 평일 우이령 길을 찾은 사람들이 박남진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길섶에 자라는 나무들은 그 둥치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길어봐야 수십 년쯤 되어 보이는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대부분이었다.
"65년에 공병대가 길을 넓히고 나서 훼손이 너무 심했는지 바로 이듬해에 또 사방사업을 했어요. 나무들은 대부분 그 무렵 심은 것들입니다. 주로 공해 속에서도 자생능력이 좋은 리기다소나무를 심었어요. 숲은 2천년 정도 지나면 자연적인 천이가 이루어지지만 이곳은 그에 비해 활엽수림으로 변화가 빠른 편입니다. 무질서한 것 같지만, 그게 자연의 모습이죠."
그는 "개방 전 답사를 왔을 땐 다람쥐들이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찾아보기도 힘들다"며 "결국 어떻게 잘 보존한다 해도 사람의 발길이 문제"라고 말했다.
"산길에 뿌리가 드러난 나무들을 보면 그게 훼손인 줄 알고 흙으로 덮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죠? 하지만 거기 흙을 덮으면 나무는 곧 죽습니다. 이미 밖으로 드러난 뿌리는 제가 살 방법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다소 전망이 트이는 왼쪽으로는 상장능선이 색다른 풍경으로 펼쳐졌다. 왕관봉이라고 부른다는 암벽은 우이동 유원지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그 모습이 달랐다. 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곳은 오지의 어느 깊은 계곡에 들어와 있는 듯 했다.
박남진 해설사는 길가에서 만난 산초 나뭇잎을 하나 따서 뺨에 붙이곤 냄새를 맡아보라 건네주었다. 쌉싸름한 산초잎 냄새가 상쾌하게 파고들었다. 반면 그 옆에 있던 나무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고기 썩는 냄새가 난다는 누리장나무였다.
"우이령 길은 골과 골 사이라 다른 숲보다도 피톤치드가 머무는 시간이 깁니다. 지금 맡는 냄새들이 모두 피톤치드인 거죠."
천천히 걷기도 했지만, 길은 완만해 등에서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정상에 닿을 수 있었다. 그곳이 정상이라는 걸 한눈에 안 건, 처연하게 서 있는 대전차 장애물 때문이었다. 휴전선 근처 전방에나 가야 볼 수 있을법한 이른바 '5분 저지선'은 통일의 시대를 말하는 21세기의 서울에도 그렇게 숨어 있었다.
뜬금없이 나타난 모아이 석상 같은 대전차 장애물 뒤로 이 길의 역사를 알리는 표지석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미군 36공병단의 공병도로로, 109공병대대와 102공병대대에 의해 1964~65년 건설, 1965년 4월 24일 개통하였다.' 사실 군용 도로이기는 했지만 이후 양주군은 도로가에 석축을 쌓고 정비를 해 1967년 10월 이 길을 정식으로 개통했었다. 허나 3개월 만에 닥친 날벼락으로 길은 긴긴 잠에 빠져들고, 양주 사람들은 서울로 가기 위해 멀리 의정부까지 돌아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었다.
↑ 우이령 정상에 있는, 1965년 군부대에서 건설했다는 내용이 적힌 우이령 길 준공비.
고갯마루를 넘어서니 곧이어 넓은 광장이 펼쳐있고 전경부대에서 사용하는 작은 초소가 보였다. 그 뒤로는 아직 위장도색이 그대로인 벙커로 쓰던 건물에 우이령 길의 역사를 알리는 전시관이라는 팻말이 달려 있었으나 평상시에는 개방을 하지 않는지 잠겨있었다. 초소에서는 아직도 경계근무를 선다고 했다.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초병들은 그 긴 밤, 여기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개만 넘어서도 바람이 다르죠?"
박남진 해설사는 우이령의 이쪽과 저쪽, 남쪽과 북쪽은 고갯마루만 지나도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가 다르고, 특히 자라는 나무들도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을 듣고 다시 보니, 우이동쪽에는 없던 토종 소나무 적송이 자라고 있었다.
교현리로 나 있는 길은 보다 완만했다. 얼마쯤 더 가자 새로 설치한 전망대와 함께 사방사업 기념비가 서 있었다. 전망대에서는 거대한 오봉이 바로 눈앞에 솟아 있어 포대능선이나 송추쪽에서 바라보는 모습과는 또 다른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 우이령 길에서 조망되는 웅장한 오봉의 모습.
당시 심었다는 2400여 그루의 나무들은 자라거나 죽기도 하고 씨앗으로 퍼져나가기도 해 지금 우이령 길의 생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거기엔 화려함이 없었다. 그저 계속해서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그 '서울의 DMZ'라는 말에서 품었던 처음의 기대는 틀린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우이령 길을 걸으며 만난 것들은 웅장함이나 찬란함이라기보다는, 그 길을 걸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처럼, 빛과 향기가 남지 않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저수지 옆으로 1917군부대 유격장을 알리는, '유격'이라 크게 쓰인 표지석이 나타나고, 우린 거기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올 땐 보이지 않았던, 가장 먼저 단풍이 들어 숲의 가을을 알린다는 벚나무 한 그루가 벌써 누런 빛으로 바래가고 있었다.
"매번 우이령 길 해설을 하면서, 사실 숲과 나무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 길을 걸어본 사람들이 '아!'하고 느끼는 마음의 감탄이 있으면 그걸로 자연에 대한 이해는 이미 끝난 거예요."
박남진 해설사의 말이 끝나자 길섶에선 새끼손가락만한 뱀 한 마리가 숲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갔다. 우리는 모두 '아!'하며 화들짝 걸음을 옮겼다.
↑ 군부대 등의 시설물만 아니라면 우이령 길은 어느 오지에 들어와 있는 듯한 풍경을 자아낸다.
우이령길 산행 길잡이
북한산 둘레길 21구간으로 지정되기도 한 우이령(347m) 길은 우이동에서 장흥 교현리까지 길이 6.8km가량 되지만 대체로 길이 평탄하고 넓어 두어 시간이면 누구나 쉽게 둘러볼 수 있다. 미리 북한산국립공원 홈페이지(http://bukhan.knps.or.kr)를 통해 예약해야 하며, 선착순으로 하루 1천 명(우이동, 교현 쪽 각각 500명, 노약자 장애인 등 사회적약자는 전화예약 가능)만 입장이 가능하다. 예약한 후 확인증을 출력해 지참한 후 입구 탐방지원센터에서 신분증과 함께 확인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입장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이고, 군사지역이므로 오후 4시까지는 길에서 나와야 한다. 10명 이상 단체 예약의 경우 무료로 국립공원 해설을 받을 수 있다.
우이탐방지원센터 02-998-8365
교현탐방지원센터 031-855-65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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