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이야기

‘박카스 대학생 국토대장정’의 기획자!

소한마리-화절령- 2014. 4. 2. 12:43

 

소사댁이 만난 소사 사람들. 3월의 이야기


박카스 대학생 국토대장정의 기획자!


좌절과 역경을 극복하는 건강한 도전

1998년 여름, 127명을 뽑는 제 1회 박카스 국토대장정에 국내외 대학생 3.455명이 지원하여 28.61의 경쟁률을 기록하는 폭발적인 관심이 모아졌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127명의 대학생들이 한여름을 가로질러 650km의 국토를 걸어서 순례하는 일은 삶에 지친 대중들의 마음에 청량한 바람을 일으키며 희망의 싹을 틔워내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한해 전 발생한 외환위기로 한국경제가 곤두박질쳐서 대량해고와 가정파괴를 낳은 기업의 도산사태로 단군이래의 경제위기라고 아우성치던 때였다.

다행히 역사적인 수평적 정권교체로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며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박차를 가할 때였다. ‘금모으기 운동과 박세리 선수의 LPGA 제패로 나락으로 떨어졌던 국민들의 기대가 바닥을 치고 뭔가 해볼만 하다는 기운이 번지는 때이기도 했다.

바로 이 사건, 그러니까 제 1회 박카스 대학생 국토대장정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집행하며 성공시킨 이가 이달에 만난 소사 사람 유병연 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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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제약 재직시절 >


이후에 전국의 다양한 단체와 세대들이 참여하는 국토대장정이 생겨나 좌절과 역경을 극복하는 건강한 도전을 상징하는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계기가 되었다. 바로 이 첫 번째 국토대장정이 당시 동아제약 홍보실장으로 재직하던 소사본동 성당 사목회 유병연(세례명: 바오로) 회장(64)이 기획하고 집행한 일이었다. 청소부 아버지와 대학생 아들의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박카스 광고 시리즈도 홍보실장으로 일하던 유회장의 작품이다.

유병연 회장은 동아제약에서 29, 환인제약에서 8, 도합 37년을 제약업계에 종사해 온 제약인이다. 개업 약사로 사회의 첫발을 디딘 소사댁과는 같은 업계 동료인 셈이다.

세상 일이 다 그렇듯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풍경은 대체로 아름답다. 멀리 들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이나 먼 바다에 배 띄우고 그물을 던지는 어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목가적인 아름다움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농부나 어부에겐 치열한 삶의 현장이고 나날이 겪는 힘겨운 노동이기 일쑤이듯. 유병연 회장의 지나 온 삶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다. 겉보기에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에 입사해서 30여 년간 재직하며 모든 회사원들이 선망하는 회사원들의 별인 이사(理事)까지 지내고, 퇴직이 가까울 무렵 유명한 헤드헌팅회사의 눈에 띄어 동종업계의 중견회사의 중역으로 발탁되어 64세에 이르도록 8년간 일하고 유유자적하는 은퇴생활을 누리는 그의 삶의 궤적을 보면 정말 순탄하고 평안한, 말 그대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이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얼핏 평탄해 보이는 유회장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 속살을 파헤쳐보면 자신의 운명 앞에 놓인 숱한 도전, 위기를 직면하고 이를 힘겹게 극복해 온 고단한 자취, 고통의 흔적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괭이부리말의 고단한 시절

황해도 벽성군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음력 1월에 태어난 유병연 회장은 실향민이다. 한국전쟁 당시 켈로부대로 알려진 북한 침투 부대에 복무하다가 53년 세 번째 북한침투 작전 중에 동료 3명과 함께 전사한 부친(유종림, 1929년생)의 유복자인 동생 유병선 씨(61)와 함께 어머니 안선비 씨(86) 슬하에서 실향민들이 몰려 살던 인천 만석동 괭이부리말에서 유년시기를 보냈다.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어머니 안선비 씨는 첫 피난지였던 강화도 이강리라는 곳에서 남의 밭을 매주는 일을 하며 두 아들과 근근이 끼니나 잇고 살았다. 그러다 큰아들 병연 씨가 취학할 나이가 되자 무작정 배를 얻어 타고 아무 연고도 없는 인천 만석동 괭이부리말에 들어가 신석기시대 유적과 같은 움집을 짓고 터를 잡는다. 아마도 일찍 청상이 된 어머니가 일생에서 내린 첫 번째 결단으로 이 결단이 없었으면 이들 가족의 앞날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인천에 상륙한 병연 씨는 정규학교도 아닌 무궁화공민학교(지금의 인천 인성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공민학교(公民學校), 아마도 70년대까지 남아있던 학교로 당연히 무상이어야 할 의무교육기관인 국민학교(國民學校)조차 경제적 부담 때문에 취학하지 못한 가난한 도시 빈민의 자식들이 선택하는 곳이었다. 이 땅의 불꽃으로 남은 영원한 청년 노동자 전태일. 배움에 굶주렸던 전태일이 다닌 곳이 바로 공민학교이다.

어머니의 두 번째 결단은 괭이부리말의 가난한 피난민들의 지친 심신을 달래던 무속을 버리고 61년 병연 씨가 5학년이던 해에 천주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사건이다. 나날이 굿판이 벌어지기 일쑤인 만석동 피난민촌에서 어머니가 무슨 까닭으로 천주교회에 나가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머니의 이 선택이 사고무친한 병연 씨와 병연 씨의 가족들이 긴 터널같은 고단한 삶에서 작으나마 불빛을 찾아 나올 수 있는 길이 되었다.

화수동 성당에서 그는 일생의 은인 노요셉 신부님을 만나게 된다. 메리놀 외방선교회 소속이었던 미국인 노신부는 가난하고 고달픈 삶에 짓눌려 있기만 했을 것 같은 어린 병연의 눈에서 반짝이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것이었다. 노신부의 추천으로 대건중학교에 진학한 병연 씨는 중3 때인 65년 신부님이 되기로 마음먹고 소신학교(小神學校)로 불리던 성신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 그해 10, 소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결핵에 걸린 것을 발견하여 신학교 진학은 일단 좌절되었다. 이때 나이도 나이인 만큼 몹시 좌절하고 실망에 빠진 병연 씨를 붙잡아 준 것은 신부님이었다.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병연 씨를 달래어 주안성심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준 신부님의 설득으로 대건고등학교에 4등으로 입학하여 대신학교에 진학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대건고 2학년이 되어 학교장으로 부임한 노신부님의 관사에서 함께 거주하게 된 병연 씨는 그해 말 결핵완치 판정을 받았다. 충분한 영양공급이 필수인 결핵치료를 위해 신부님이 학교 앞의 홍강춘이라는 중국집에서 1년 동안 매일 점심 짜장면이나 우동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등 병연 씨를 친아들처럼 보살펴 준 덕분이기도 했다. 뒷날, 그러니까 작년(2013) 회갑을 맞은 동생 병선 씨로부터 매일 점심때마다 짜장면을 먹는 형이 그렇게 부러웠다는 말을 듣고 뒤늦게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을 만큼 궁핍한 시절이었다.

3이 되어 대학진학 때가 되자 성직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식은 병연 씨는 역시 신부님의 권유에 따라 가톨릭 계열인 서강대 사학과에 진학한다.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치고 막노동과 과외, 그리고 장학금 등으로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한 병연 씨는 772월 동아제약에 입사한다.


병연 씨의 동아제약과 소사동 시대

772월 서강대 졸업을 앞두고 동아제약에 입사한 병연 씨는 인천교구 대학생연합회장을 지내는 등 성당활동 중에 간호대를 나와 간호사로 일하고 있던 견영자(세례명: 데레사)씨와 교제 중이었다. 견영자 씨 역시 황해도 출신 실향민의 24녀 중 차녀로 다소곳하고 청순한 모습에 마음이 끌린 병연 씨의 적극적인 구애로 사귀다가 동아제약에 입사한 그해 10월 혼인을 한다. 신혼살림은 만석동의 단칸방에서 5년간 장작불로 밥을 해먹다가 아이들이 태어나 석바위의 13평짜리 주공아파트에서 잠시 살았다. 두 아이가 자라나며 83년 이사 할 곳을 찾다가 부천으로 눈을 돌려 소사동의 신진주택으로 옮겨 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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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중인 부부 >


애초부터 서울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유년기부터 뿌리를 내린 천주교 신앙을 잘 할 수 있는 곳에 마음이 가는 병연 씨에게 소사동은 그의 나머지 인생을 의탁할 고장이었다.

소사동에 정착한 후 그의 삶은 비교적 순탄하게 이어졌다. 직장과 가정, 그리고 신앙생활의 세 꼭지를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며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성실하게 이어갔다.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소사3동 성당 주일학교 교사에서 시작하여 교장을 거쳐 사목회 총회장, 성당 노인대학 학장으로 봉사하며 교회로부터 받은 은총을 받은 만큼 이웃들에게 돌려주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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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 모인 가족들의 단란한 모습 >


두 아들은 모두 과학고등학교와 카이스트를 졸업했다. 큰 아들 준기(78년생) 씨는 공군장교를 거쳐 영국의 국제신용평가회사인 피치의 자회사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고, 둘째 홍기(80년생) 씨는 3년간 하버드 팰로우를 거쳐 한양대 생체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두 아들에게서 세 명의 손주를 두고 있다.

인일여고와 인천간호대학을 나온 부인 견영자 씨는 서예에 정진하여 국전과 여러 전시회에 입상하는 등 실력을 쌓은 끝에 경기대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서예 석사를 받았고 지금은 부천 미협 서예분과 이사를 맡으며 혜담(慧潭)이라는 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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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훈, 부인 견영자씨의 작품 >


중학교 시절 학교를 홍보하는 현악합주단에 선발되어 바이올린을 잠시 배운 기억을 잊지 못한 유회장은 작년(2013) 마지막 직장인 환인제약 부사장을 퇴임하고 다시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다. 최근까지 사진을 취미로 삼았던 그는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하여 빈첸시오 회장을 역임한 봉사활동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5년 후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 목표로 유년기의 연주활동을 반세기만에 잇고 있다.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우리 사회에서 다행히 유복한 인생 2기를 보내는 그와 그의 가족의 모습은 참 보기에 좋다.

신부님이 될 소망은 일단 좌절되었지만 그의 삶에서 신앙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 유병연 회장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 세대들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고단함을 비교적 슬기롭게, 혹은 다행하게 잘 넘겨왔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노요셉 신부를 만난 행운(?), 본질적으로는 하느님과 만나는 귀중한 은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도 받을 그릇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강화도에서 두 아들의 취학을 위해 무작정 배를 얻어 타고 인천으로 상륙한 어머니의 첫 번째 결단과 나날이 굿판이 벌어지는 만석동 피난민촌에서 천주교 성당으로 발길을 돌린 어머니의 두 번째 선택이 은총을 받을 그릇을 예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의 고난을 한가운데서 겪어야 했던 유병연 회장의 신실한 신앙과 성실한 삶이 그 은총을 온전히 받을 수 있었고, 이를 그의 가족과 이웃에게 가장 모범적으로 온전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