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이야기

부천의 제 1 관문지기, 역곡역 꽃가게~!!

소한마리-화절령- 2014. 9. 4. 09:30

부천의 제 1 관문지기, 역곡역 꽃가게~!!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으로 꼽히는 노점상. 사실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인류가 수렵, 채취, 목축에서 벗어나 농업으로 정착하는 단계에서 출현했을 교환경제의 첨병으로 등장한 상업 종사자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노점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인류 최초의 상업 종사자들이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현대판 불가촉민(不可觸民) 취급을 받고 있다. 어느 도시에서나 자치행정이 해결해야 할 우선 순위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노점상 문제 해결이다. 그렇게 노점상들의 역사적 연원은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단지 근대적 토지 또는 부동산 소유권에 부속된 권리를 가졌는지 여부에 따라 이리 저리 쫓겨 다녀야 하는 부랑인(浮浪人)으로 대우받고 있다.

    

서울에서 부천으로 진입하는 관문이 여러 곳 있지만 그중에서 으뜸가는 관문은 아무래도 역곡(驛谷)이다. 이름 그대로 옛날부터 역원(驛院)이 있던 곳인데, 19748월 지하철이 개통되면서 서울과 부천을 잇는 첫 번째 역이 된 것이다. 역곡역에 내려서 남부광장으로 나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 중 하나가 오늘 소사댁이 만난 역곡역의 명물인 조유환(64) 씨의 꽃가게이다. 역곡역 계단과 인접한 건물 경계 벽을 이용하여 만든 작은 꽃가게 러브장미 종합 꽃마트가 바로 그 집이다. 이 가게를 지키기 시작한 지도 20년이 넘은 조유환 씨의 삶의 궤적은 인류최초의 상업 종사자였을 노점상의 역사, 그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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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곡역 꽃가게>


전남 진도 고군면 오산리에서 태어난 조씨는 5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일찍 개가하신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할아버지와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13살까지 거두어 주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서울 구로공단에서 애경유지에 다니던 친척 누나를 따라 상경했다. 13살 어린 나이에 우연히 친척누나가 사는 곳에 다니러 온 어린 조유환 소년은 삼시세끼를 쌀밥만 먹는 서울이 너무 좋았다. 일년내내 쌀밥 먹는 날은 명절이나 제삿날뿐이던 진도에 다시 돌아갈 생각을 버렸다. 이왕 학교도 중퇴한 마당에 삼시세끼마다 비록 왜간장에 비벼먹는 쌀밥만 먹는 서울에서 어떻게든 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미 시집을 간 친척누나 집에 눌러 살 수는 없어 문래동에 있는 근로자 복지관 3층 숙소에서 잠자리를 해결하며 여름에는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다가 찬바람이 불면 구두닦이를 하는 생활을 3년간 했다. 처음 시작한 아이스케키 장사는 성적이 좋았다. 아이스케키 도매상에서 함께 장사를 하는 17명 중 판매성적이 제일 좋았던 조유환 씨는 아이스케키와 구두닦이 생활을 3년간 한 끝에 독립을 모색한다.

    

3년간의 행상을 거쳐 서울살이에 어느 정도 이력이 붙은 조씨는 17살 무렵 비슷한 또래 소년들 5명을 규합하여 오류동 원호병원 옆의 다리 밑에 가건물을 짓고 구두수선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리더십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학교를 많이 다니지는 못했지만 삶의 지혜를 습득하는 데에는 누구보다 현명했던 것이다. 2년 남짓 오류동에서 동료들과 함께 지내다가 19세가 될 무렵에 구두수선을 같이 하던 이천 출신 동료의 제안으로 부평 미군기지 근방으로 진출한다. 지금의 백운역 근방의 부평 신촌은 서울과는 또 다른 세계였다. 동료인 이인태의 소개로 신촌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선배를 만나 미군부대 옆에 구두수선 가게를 열 수 있었다. 돌산으로 불리던 곳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갖가지 물품의 집산지였다. 기도형으로 불리던 선배의 허락을 얻어 베트콩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를 조수로 두고 시작한 구두수선 가게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수입의 일정액을 기도형에게 바쳐야 했지만 하루에 20달러 안팎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청년들의 살림살이로는 웬만한 직장생활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었다. 게다가 비록 군표(軍票)이긴 했으나 달러로 받았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아찔한 시절이기도 했다. 아직 70년대가 되기 전이라 순박한 이 나라 백성들의 무지와 법의 미비로 인한 것이긴 했다. 당시만 해도 대마초가 뭔지도 모를 때였는데 이미 미군 병사들은 대마초를 즐겨 찾고 있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영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조씨는 그때 미군들의 구두를 수선해 주면서 영어를 배웠다. 그런 조씨에게 미군들이 하이혹은 떨팅으로 불리던 대마초를 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이 그려준 그림으로 시골에서 늘 보던 삼베의 원료인 대마잎인 것을 알아 본 조씨는 그때만 해도 허허벌판이던 구월동이나 고향인 진도에 가서 채취해다 주었다. 그러자 미군들은 조씨에게 땡큐를 연발하며 카메라나 시계를 댓가로 주었다. 그냥 들판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대마 잎사귀로 구두수선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올리게 되고 이게 소문이 나서 인근에 사는 주부들도 부업삼아 미군들에게 대마잎을 채취해서 파는 일도 생기기 시작했다. 70년대가 되어 대마초가 연예인을 중심으로 한국사회에도 퍼지기 시작하자 정부에서도 부랴부랴 단속과 처벌근거를 만들게 되어 더 이상 할 수는 없었다. 본격적인 산업사회로 넘어가기 전 한국사회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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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손질 중인 조유환씨>

    

그렇게 스무살이 넘어 청년기로 접어 든 조유환 씨는 주변의 중매로 김포출신 부인 이명숙씨(61)를 만나 스물 한 살에 결혼을 하고 큰딸 부영 씨(41), 둘째 혜영 씨(39), 셋째 은영 씨(36), 넷째 진영 씨(34) 등 네 딸을 낳았다. 그동안 안 해 본 노점이 없었다. 미국의 닉슨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70년대가 되어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고 대마단속법이 시행되는 등 미군기지 주변의 경기도 옛날 같지 않게 되기도 하고 73년 첫딸이 태어나자 아이들 키우는 데는 적당치 않기도 하여 기지촌을 벗어나기로 했다. 그간 모은 돈으로 제물포 역 앞에 분식집을 마련하여 부인과 함께 운영했다. 미군기지주변에 오래 있다 보니 정작 한국사회의 상거래 관습 따위에 익숙치 못한 탓도 있고, 믿고 맡긴 배달원들이 수금한 돈을 갖고 달아나는 등의 악재가 겹쳐 3년 만에 그만두고 본격적인 노점상에 진입하게 되었다.

    

76, 둘째 딸 혜영씨가 태어 날 무렵에 부천 오정동으로 이사를 한 뒤 인근 공항동 시장과 용산, 평화시장, 창경원 앞, 어린이 대공원 등지에서 주로 완구나 의류를 취급하는 노점이나 자동차를 이용한 행상으로 네 딸을 키웠다. 대공원이나 창경원 앞에서는 펀치볼과 같은 어린이용 완구를 주로 취급하며 단체로 관람하러 온 고아원 등 시설에서 사는 아이들에게는 팔고 있던 펀치볼을 전부 나눠 준적도 적지 않았다. 조씨 자신은 고아원에 간 적은 없으나 그들과 다름없는 유년기를 보낸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따뜻한 정을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조씨가 역곡역으로 온지도 20년이 넘었다. 역곡역 남부광장 인근 노점 상인들의 친목회장을 맡고 있는 조씨가 겪은 일만 제대로 기록하자면 끝이 없다. 그가 겪은 일들은 그의 개인사일뿐 아니라 산업화, 근대화를 겪으며 21세기를 넘어 온 한국사회의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회사이기도 하다. 그가 역곡역에서 겪은 일 중에 가장 잊지 못할 일은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다. 20095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안타까워하고 있던 중에 다음 날인 524일 일요일에 부천시민연합의 황인오 대표가 주도하여 조씨의 꽃가게 바로 위 역 광장에 분향소를 차린 것이다. 인간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상황에 분노하는 이들이 소사3동 성당에서 천막을 빌려와서 차린 분향소였다. 하나 둘, 지나가던 시민들이 직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를 슬퍼하며 분향하고 헌화하는 데 조유환 씨가 그냥 내준 국화꽃이 바쳐졌다. 첫날 경황없이 분향소를 차린 이들이 무슨 돈이 있겠으며 무슨 이익보자고 시작했겠는가 싶어 조씨도 함께하는 마음에서 꽃을 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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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前대통령 분향소>

    

당시 분향소에는 정말 많은 시민들이 함께했다. 장례식 전날 밤까지 매일 수만 명의 시민들이 꽃과 향을 바치고 저마다 주머니를 털어서 비명에 가신 전직 대통령을 추모하며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비록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서민이지만 조씨 또한 누가 진정한 서민의 벗인지는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일주일 동안 장사는 뒷전이고 분향소 주변 청소를 도맡아 하는 등 시민단체 회원들의 댓가없는 참여에 잠시나마 함께 했던 일은 조씨의 인생에서 중요한 기억으로 남는다.

  

20년을 넘게 역곡역 광장을 지키면서 부천의 관문지기 노릇을 해 온 조유환 씨의 삶은 언젠가 다른 기회를 빌어 줌인(Zoom in)할 때가 있을 것이다. 사회사적 의미탐구가 아니어도 노점상만으로 딸 넷을 키워낸 이 땅의 아버지, 부모로서 누구보다 떳떳한 삶을 살아 온 그의 인생이야말로 그의 가게를 가득 채운 꽃송이처럼 아름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