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이야기

부천 한국무용의 대모, 오은령 단장

소한마리-화절령- 2014. 7. 7. 13:20

 

부천 한국무용의 대모, 오은령 단장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빌리 엘리어트, 최승희, 마고 폰테인, 김매자, 이애주, 국수호, 오은령, 강수진.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갑자기 퀴즈를 내서 좀 그렇지만 별로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모두 무용과 관련된 실제 인물이거나 영화 속 인물이다. , 무용, 댄스라면 왠지 가녀린 여인네들이나 추는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색색의 조명 아래서 남녀가 손을 잡고 추는 사교댄스를 연상할 수도 있다. 물론 춤에 대한 이런 오해는 대체로 과거의 일이고 실제로는 어떤 스포츠 종목 못지않게 많은 신체적 에너지를 요구하는 예술이고 춤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는 것을 웬만하면 다 아는 시대가 되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오은령 단장, 또는 오은령 원장은 부천지역 무용계에서는 대모라고 불러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거의 없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오은령무용단오은령무용학원30년 가까이 이끌고 있다. 30년 가까이라고 하니까 나이가 무척 많은 원로급 무용인이 아닌가 싶지만 그는 아직 50세도 되지 않은 젊은 무용인, 춤꾼이다. 인터넷에 그의 이름을 치면 그와 그의 무용단의 각종 공연이 끝도 없이 검색된다. 부천지역에서 열리는 각종 문화행사는 물론 국내외에서 수많은 공연에 참가해왔다.

오은령2.jpg

<오은령 단장>

<!--[if !supportEmptyParas]--> <!--[endif]-->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사서삼경 중의 하나인 중용에 주자가 주석을 달고 후에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덧붙인 책)에 나오는 말로써 갖고 놀다보면 얻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즐기면서 하면 일정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것보다 스스로 즐겨 선택해서 하는 일이 더 효과적이라는 말일 것이다. 오은령 단장이 춤꾼이 된 과정을 이보다 잘 설명하는 말이 또 있을까?

<!--[if !supportEmptyParas]--> <!--[endif]-->

고등학교 수학교사였던 아버지(오시채, 78)와 전업주부인 어머니(이종순, 70)11녀 중 큰딸로 태어난 그가 본격적으로 무용에 빠져 든 것은 쌍문초등학교 4~5학년 무렵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무용을 하기는 했지만 이를 일생의 업이라고 느낀 것이 그즈음이었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발레를 했다. 부모님도 나가는 대회마다 상을 받아 오고 선생님들도 그 실력을 인정하는 데다 본인이 즐겨하는 까닭에 잘 뒷바라지했다. 그러던 중 중학교 2학년 때쯤 한국무용을 접하고는 거기에 이끌렸다. 국악원 출신의 지금은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무용계의 명사인 선생님인데, 그 선생님이 추는 한국무용을 보고 그 장단이며 춤사위에 흠뻑 빠져 들게 되어 발레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선생님을 사사(私事)하며 한국무용으로 전환한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한국무용으로 전환한 뒤에도 빼어난 실력을 보인 그가 선택해야 할 때가 왔다. 당시에는 예체능 특목고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선택해야 했다. 그를 지도한 선생님들과 관계자들의 눈에 들어 선화예고에 들어갈 것을 추천받았다. 하지만 그때는 서울을 떠나 부천으로 이사를 한 상태라 너무 먼 거리를 통학하기엔 만만치 않아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레슨을 받는 것으로 진로를 정했다. 당시 선화예고는 리틀에인절스를 배출한 명문으로 무용을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곳이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 예대에 진학했다. 한국무용으로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이다. 대학 2학년 때 우연한 기회에 서울여상으로 시범 레슨을 나가게 되었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일회성 시범 레슨을 나간 것인데 학생들의 요청으로 계속 나가게 되고 이어 소문이 돌아 부평의 초등학교에서도 레슨 요청이 들어 왔다. 그렇게 지도한 학생들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등 지도자의 능력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3학년이 되어도 여기저기서 레슨 요청이 계속 들어와 시간이 되는대로 학업과 병행하며 정성을 다해 가르쳤다, 그러자 학부모들이 그럴 바에 아예 학원을 내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가 쇄도한 것이다. 부모님과 상의한 끝에 대학 3학년 때인 87년 소사삼거리에 학원을 개설한 것이다. 아직 학생신분이라 어머니가 원장으로 등록하고 오 단장은 학업과 병행하여 가르치는 데 전념을 다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모님의 뒷바라지로 이렇다 할 걱정 없이 성장하고 무용을 배운 그가 겨우 대학 3학년이 되어 학업과 학원수업을 병행하는 것이 무척 고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는 별로 힘든 줄 몰랐다고 한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춤추는 것은 웬만한 스포츠 종목 못지않게 격렬한 체력소모를 요구하는 것인데도 그는 춤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 자체가 즐겁고 재미있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그가 부천에 정착한 것은 1979년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인천여상으로 전근하시면서 부천으로 이사를 한 것이었다. 소사삼거리에 무용학원을 개설할 때만 해도 부천에 무용학원은 두 곳 밖에 없었다. 학원을 개설한 첫해인 87, 그해 대학입시에 응시한 6명 전원을 전기 명문대에 합격시킴으로서 지도자 오은령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학문이나 체육 분야에도 아카데믹한 연구나 경기분야에서 빼어난 실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교수나 지도자로써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둘 다 잘하는 이들도 있고~~. 그렇다고 그가 학원수업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다. 자기실력 향상에도 집중해서 대학원을 마치고 개인발표회도 가지는 등 전통 무용을 온전히 습득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무형문화재 92호 강선영류 태평무를 이수하고 국립국악원(예술의 전당)에서 개인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오은령 무용단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88년 올림픽이었다. 88올림픽 성화봉송단이 부천역 북부광장을 통과할 때 그해 막 창단한 오은령무용단을 이끌고 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춤판을 벌린 것이 언론에 소개된 것이다. 초등학생을 비롯한 학생들로 구성된 무용단을 이끌고 온 국민이 열망하는 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전통무용공연에 박수를 보내며 이를 기획하고 지도한 오은령 단장을 주목한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오은령 무용단 공연 작품 백일홍2.jpg

<오은령 무용단 공연 작품1 ‘백일홍‘>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를 계기로 그의 실력이 새삼 주목을 받게 되고 국내외 각종 무용제에 초청받거나 해외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경기도 예술대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전국무용제 등의 크고 작은 대회마다 수상자 리스트에 오은령과 오은령무용단의 이름을 올렸다. 96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민속무용페스티벌와 프랑스의 리용 국제박람회초청공연을 비롯하여 러시아, 이탈리아, 중국, 투르크메니스탄, 에콰도르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해외공연을 다녔다. 우리 전통무용의 우수함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자비를 들여 해외 무용축전에 참가하여 10일 이상 머물며 각국 관계자들을 접촉하기도 했다. 이런 열정이 그와 그의 무용단의 이름이 끊임없이 호명되도록 하는 힘이다. 춤을 즐기기도 하지만 한국무용을 해외에서만 아니라 전통과 단절된 채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리고 뿌리내리게 하려는 일종의 소명의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스무 살을 겨우 넘기면서 무용학원과 대학생활을 병행하는 등 춤밖에 모르는 딸이 걱정이 된 부모님의 노력으로 91년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난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연애도 모르고 만나는 남자라곤 남동생밖에 없는 딸이 걱정된 어머니가 주변에 좋은 신랑감을 소개해 달라고 광고를 한 덕분에 학부모 한분이 다리를 놓은 것이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부천시청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던 남편 강병일 씨를 만난 지 4개월 만에 혼인에 이르렀다. 만나자마자 서로 호감을 가질 만큼 두 사람 모두 신수가 훤한 선남선녀이고 적당한 나이였다. 남편 강병일 씨는 후일 정치일선에 나서 제 6대 부천시의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했으나 오은령 단장이 남편의 정치활동을 내조한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강병일 전 의원이 오은령 단장의 외조를 많이 했단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오단장은 남편의 정치활동과 상관없이 무용을 통한 사회참여, 사회봉사에도 적극적이었다. 부천의 대표적인 복지시설인 혜림원과 성가요양원은 해마다 빠짐없이 위문공연을 하고 지역사회의 요청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서 사람들의 지친 심신을 춤으로 어루만지고 치유하는데 적극 참여했다. 부천문화원에서 주 1회씩 태평무 강좌를 열고 오정노인대학에서도 같은 강좌를 20년째 계속해 오고 있다. 99년부터 부천무용협회 회장을 맡고 2000년부터는 부천 예총 부회장을 맡는 등 우리 무용, 우리 문화예술을 널리 알리고 보급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해 참여하지만 늘 아쉬움이 남는다. 해외 어디든 나가서 공연을 하면 한결같이 우리 춤과 가락, 의상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고 앵콜이 이어지는데 비해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점점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낮아진다는 점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오은령 무용단 작품 공연 -쟁강-.jpg

<오은령 무용단 공연 작품2 ‘쟁강’>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 춤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단지 대학입시의 방편으로 입문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게라도 대학에 들어가는 젊은이들이 무용으로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는 것을 너무도 많이 겪고 있기 때문에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단다. 가뜩이나 우리 무용에 대한 애착이나 자부심이 부족한 젊은이들에게 우리 문화의 우수성, 우리 전통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려는 열정을 가지라고 말하기가 힘든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엄마의 재능과 열정을 이어 받은 두 딸 모두 무용을 하고 있다. 국민대 한국무용과 3학년에 재학 중인 큰딸 예지와 부명고등학교 졸업반으로 현대무용을 하는 둘째딸 예령이를 위해서도 우리 무용 인프라를 넓고 깊게 다지는 것이 오은령 단장의 남은 과제이다. 오단장이 해마다 해외 무용축전에 참가하여 품앗이를 해준 노력을 모아 ‘2000년세계민속무용페스티벌부천국제전통민속예술제를 성공적으로 치렀음에도 이를 계속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우리나라가 1억에 달하는 중국의 요우커(여객:旅客) 10%만 확보해도 그리스를 능가하는 관광대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있듯이 반도체와 자동차만으로 21세기 먹거리를 확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2000년 원혜영 시장의 지원으로 개최한 ‘2000년세계민속무용페스티벌부천국제전통민속예술제에 그의 노력으로 12개국 320명의 무용단이 참가하여 그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거창국제연극제를 비롯하여 성공한 국제적인 문화예술축전은 그 나라 그 도시의 민()과 관()이 협심하여 지속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은령 무용단 작품 미인 공연.JPG

<오은령 무용단 공연 작품3 ‘미인’>

<!--[if !supportEmptyParas]--> <!--[endif]-->

문화의 시대, 문화특별시를 지향하는 부천시도 판타스틱영화제의 성공을 바탕으로 경제적 유발효과가 더 큰 것으로 알려진 공연예술 관련 축제에 관심을 가질 때도 된 것 아닐까? 오은령 단장과 같은 국제적 인맥이 있고 열정이 넘치는 춤꾼은 지역사회의 큰 자산이다. 이런 자산을 소모하는 것을 넘어서 그 부가가치를 확장하고 키워내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