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
조금 오를 때마다 다른 공간 또 다른 공간 펼치다 한국일보 황수현기자 입력 2014.04.22 21:37
[작은 집에 살다] <6> 경기도 군포시 '까만집'
바닥의 일부 반층씩 높인 구조조금 오를 때마다 다른 공간 또 다른 공간 펼치다 한국일보 황수현기자 입력 2014.04.22 21:37
↑ 군포시의 오래된 주택가에 지어진 까만집. 1층은 미용실이고 2·3층은 미용실 주인 K씨 부부가 산다. 건축가는 집이 북향인 점을 감안해 정면에는 큰 창 하나만 내고 다른 면에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창을 냈다. 서로 다른 모양의 창으로 새 나오는 노란 불빛이 검은 외벽과 잘 어울린다. 이루건축사 사무소 제공
↑ 현관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원목 구조물(왼쪽). TV를 걸기 위해 만들었지만 내부를 살짝 가리는 역할도 한다. 거실에서 TV 쪽을 향해 본 모습(오른쪽). 그림 하나 걸지 않은 새하얀 벽 덕에 거실 높이가 한층 강조돼 보인다. 옆의 계단을 오르면 안방이 나온다.
다양한 공간 생성 가능하게
미용실·주거·주차공간 넉넉히 활용
4m 높이의 탁 트인 거실 '백미'
시선 위로 잡아당겨 협소함 잊게
검은색의 파격적인 외관에
건물 창의 형태·크기 제각각
어스름 저녁 땐 노란 불빛 새 나와
환상의 마법 부리는 '블랙박스'로
'나만의 집 짓기'라는 로망을 실현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땅이다. 큰 집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저렴한 자재를 골라 집 짓는 비용을 최소화할 수는 있지만 예산에 맞는 땅을 좇아 삶의 터전을 옮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는 지역에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가장 큰 난관이 사라졌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집 짓는 일에 몰두할 수 있을까. 그 땅에 작게라도 건물을 올려 세를 받을 수 있다면? 나만의 집을 갖는 일이 고정수입이 보장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미 건물이 서 있다면 그걸 허물고라도 자기 집을 지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경기 군포시의 한 오래된 주택가에 지난해 까만 네모상자 모양의 건물이 들어섰다. 1층은 미용실, 2ㆍ3층은 미용실 주인인 K씨가 사는 집이다. 건물주인 K씨 부부는 원래 미용실 위에 있던 다가구 주택을 세 놓고 조금 떨어진 아파트에서 생활했었다. 30평 대 아파트는 부부와 대학생 아들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과했다. 방 3개 중 하나는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 밖에도 안 쓰는 공간이 너무 많았다. '자고, 밥 먹고, 쉬는 곳 외에는 필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부부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미용실이 있는 작은 터에 내 집을 짓기로 했다.
30평 아파트 VS 16평 내 집
집을 짓기로 결심한 이후 부부는 건축 공부를 시작했다. RC조, 콘크리트철근조 등 생소한 용어가 난무했지만 나만의 집이 생긴다는 설렘에 힘든 줄 몰랐다. 그러나 의욕만 가지고 달려들기에 작은 집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미용실이 위치한 땅의 면적은 91.4㎡(27.65평). 건축법이 허용하는 면적을 다 써도 건물 크기는 55㎡(약 16.5평)가 한계다. 이 안에 방 2개, 거실, 계단, 화장실, 다용도실까지 꾸려 넣으려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미용실 위에 2개 층으로 집을 올린다고 해도 북측사선제한 때문에 건물 높이는 8m를 넘기 힘들었다. 8m를 꾸역꾸역 3개 층으로 나눴다가는 천장이 낮은 답답한 집에서 하루 종일 계단만 오르내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집이야 익숙해지면 그럭저럭 살 수 있다 쳐도 미용실을 찾는 손님들이 답답한 느낌을 받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주차공간도 문제였다. 주택이 밀집된 지역이라 주차 공간이 늘 부족해 주민들 간에 언성을 높이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던 터였다. 집주인의 차와 미용실 손님의 차, 두 대를 상시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머리를 싸매던 아내가 이루건축사사무소의 이병익 소장을 찾아낸 것은 지난해 봄이다. 인터넷으로 건축가들이 설계한 주택을 살펴보던 그는 장식 없이 간결하게 지은 이 소장의 집이 마음에 탁 들어왔다. 부부는 건축가에게 지금까지의 고민이 담긴 평면도를 내보였다.
"도면을 보고 제 첫마디가 아마 '덮으세요'였던 것 같습니다." 이 소장이 웃으며 말했다. "(건축주가) 16평 안에서 삶을 꾸릴 수 있는 방법을 굉장히 깊이 연구하신 것 같더라고요. 건축법규나 건축자재와 관련한 지식이 해박했어요. 하지만 공간 구성에서 결국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었습니다."
이 소장은 스킵 플로어 구조를 제안했다. 스킵 플로어는 바닥의 일부를 반 층씩 높인 구조로, 층을 명확히 나눈 집들과 달리 내부에 다양한 층이 생긴다. 일반적인 층 구조가 모든 면적을 다 사용하는 데 반해 스킵 플로어 구조는 면적을 일부 손해 볼 수도 있지만 대신 각 공간의 필요에 맞게 천장 높이를 조절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 소장은 거실을 1.5층 높이로 과감하게 높이고 안방과 아들방이 있는 곳은 일반적인 집 천장 높이와 동일하게 했다. 단면도에서 보면 집의 반쪽은 2층, 다른 쪽은 3층으로 나뉜 걸 볼 수 있다. 2층으로는 면적이 부족하고 3층으로는 높이가 아쉬웠던 상황은, 이렇게 거짓말처럼 간단하게 해결됐다. 남아도는 면적을 거실 높이에 할애한 셈이다.
거실 크기만큼의 면적을 포기했지만 남은 면적으로도 애초 구상했던 방 2개, 다용도실, 화장실, 계단을 꾸려 넣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바로 아들방과 화장실 문이 보이고 여기서 반 층을 올라가면 거실 겸 주방이, 여기서 다시 반 층을 올라가면 안방과 화장실이 나오는 구조다. 여기에 작은 발코니까지 덤으로 생겼다. 고민이었던 미용실 천장 높이도 입구 쪽만 1.5층 높이로 높여 들어오는 순간 답답함을 느끼지 않게 했다.
스킵 플로어 구조를 택하면서 거실은 이 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소가 됐다. 4m 높이로 탁 트인 거실은 시선을 위로 잡아당겨 공간의 협소함을 완전히 잊게 한다. 갤러리나 카페에서 느낄 수 있는 수직적 공간감은 일상의 권태를 몰아내는 데도 특효다. 부부는 이곳을 식사와 휴식, 독서, TV 시청, 대화, 심지어 수면까지 해결하는 다용도 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주차장은 미용실 현관을 골목에서 약간 안으로 넣어 임시주차공간을 만들면서 해결했다.
"설계도를 보자마자 '오케이' 했다"는 남편은 주차장과 계단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여 자기 집을 지을 때는 뻔한 집보다는 좀 색다른 집에 살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잖아요. 3층집이라 계단만 한없이 오르게 될까 걱정했는데 이 집에선 조금만 올라가면 공간이 나오고 또 조금 올라가면 또 다른 공간이 펼쳐지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합니다."
까만 박스에서 새나오는 불빛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건축주와 건축가의 합은 훌륭했다. 애초에 건축주가 건축가의 작업 스타일을 잘 알고 있기도 했거니와 평소 이 소장의 지론이 "건축주가 만족하는 집이 최선의 집"이기 때문이다. 그는 좁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만 제안하고 나머지 구체적인 부분은 전부 K씨 부부의 의견을 따랐다. 새하얀 벽과 따뜻한 나무가 조화된 내부, 안방에 들어서면 침대만 보일 수 있도록 옷장을 벽 뒤로 숨긴 것, 모두 건축주의 뜻이다.
단, 외벽의 색깔에 있어서는 의견이 갈렸다. 밝은 색과 어두운 색 중 고민하던 K씨 부부는 검은색이라는 파격적인 선택을 했고 건축가는 반대했다. "주변이 다 오래된 연립주택인데 그 가운데 까만 건물이 들어서면 폐창고처럼 보일 것 같아 만류했습니다." 하루 내내 고민한 K씨 부부는 다음날 "그래도 검은색으로 하고 싶다"고 전해왔다.
결국 숯처럼 짙은 흑색의 스톤코트(돌처럼 까끌까끌한 질감의 마감재)를 바르는 것으로 결정됐다. 외벽이 완성된 날 이 소장과 남편 K씨는 집 앞에 나란히 섰다. 이 소장은 네모 상자 같은 외관에 재미를 주기 위해 모든 창의 형태와 크기를 달리해 놓은 터였다. 저녁 무렵, 흑색 상자에 뚫린 창을 통해 내부의 노란 불빛이 제 각각의 모양으로 새나오는 모습을 본 순간 이 소장은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K씨와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숯처럼 검은 외벽과 따뜻한 불빛의 조화.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집을 짓는 동안 위기는 오히려 바깥에서 찾아왔다. 다가구 주택을 헐고 집을 짓겠다는 K씨 부부를 주변에서 말리고 나선 것이었다. 미용실에 들른 동네 어르신들은 "젊은 사람들이 괜히 멋 부린다고 저런다"며 세를 받아 살라고 강권했다.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만류에 아내는 크게 흔들렸다고 했다. "그래도 고집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건 크기가 작았기 때문이에요." 대지가 넓고 건물이 높았다면 임대료 욕심을 버리기 힘들었을 텐데 오히려 작아서 포기하기 쉬웠다는 솔직한 고백이다.
K씨 부부는 지난해 11월 드디어 완공된 집에 입주했다.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면서 살림도 대폭 줄였다. 중후한 가죽 소파 대신 천을 씌운 간소한 소파를 놓고 고풍스러운 커튼 대신 경쾌한 색깔의 면 커튼을 달았다. 임대료, 시세, 아파트 평수 등 한국 주택 문화의 모든 골치 아픈 문제들에서 자유로워진 부부는 이제 옥상에 어떤 식물을 심을지에만 골몰해 있다. "블루베리를 키우려고요." 아내 K씨의 표정은 벌써 블루베리를 한 가마니 수확한 사람처럼 풍요로웠다.
■ "설계비 적다 손사래 치지 마라… 골목에도 건축가 손길 필요"
건축가 이병익씨가 짓는 주택에는 이름이 없다. 군포에 지은 집도 편의상 까만집이라고 부를 뿐이다. 건축가들이 건물을 지은 후 건축전문사진가에게 의뢰해 찍는 '작품 사진'도 남기지 않는다. 스스로를 '동네 건축가'라고 칭하는 그는 거창한 랜드마크나 형이상학적인 건물에만 건축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네 구석구석, 오래된 주택과 노후한 상점이 난립한 골목에도 건축가의 손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자기 집을 짓고 싶다는 신혼 부부들의 의뢰를 올해만 벌써 4, 5차례 받았어요." 찾아오는 이들의 상황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30대 중반의 젊은 부부인데 서울 외곽에 아파트를 분양 받은 거예요. 그런데 아파트 생활은 하기 싫고 차라리 집이 좀 작더라도 자기 구미에 맞는 집을 짓고 싶은 거죠."
그러나 늘어나는 수요에도 불구하고 작은집 설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건축가는 많지 않다. 보통 설계비는 공사비에 비례하는데, 공사비 1억원 안팎의 작은집은 설계비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고 이 소장은 말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자격증 땄는데 설계비 적게 받으며 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압니다. 하지만 골목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아요."
그가 주장하는 것은 설계비 인하가 아니다. 기본적인 공간 배치나 내부 인테리어는 건축주의 의견을 존중하되 스킵 플로어 등 전문적 지식이나 아이디어가 필요한 부분에만 건축가가 개입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집 짓기라는 것이다. 까만집은 이런 방식을 통해 탄생한 성공 사례다. "집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바뀌고 있는데 건축가들의 변화는 아직인 것 같습니다. 작은집 열풍이 정말 의미 있는 흐름이 되기 위해선 대중과 건축가 둘 다 바뀌어야 합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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