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절령통신

고사성어의 재발견[시사비평-황인오]

소한마리-화절령- 2015. 1. 4. 22:00

고사성어의 재발견[시사비평-황인오]

황인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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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9.20 21: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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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삼이사(張三李四), 명약관화(明若觀火), 결초보은(結草報恩) 등……. 대부분 네 글자의 한자어로 이루어진 경구로 일상에서 겪는 복잡 미묘한 상황을 명료하게 해주는 말이다. 주로 중국 고전에 기원을 두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나 우화에서 비롯되었다.

조삼모사(朝三暮四)도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고사성어의 하나다. 하루 일곱 개의 고구마를 먹기는 마찬가지인데 아침에 세 개를 먹고 저녁에 네 개를 먹느냐, 아니면 반대로 아침에 네 개를 먹고 저녁에 세 개를 먹느냐를 놓고 흥분하는 어리석은 원숭이 무리와 주인의 이야기다. 대체로 간사한 속임수로 사람을 부리고 다스리는 집단의 리더와 거기에 쉽게 속아넘어가는 어리석은 무리들을 비웃는 뜻으로 쓰인다. 요즘은 님비현상으로 나타나는 집단이기주의에 흔들리는 현상을 빗대는 데에 써먹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갈등관계에 있다. 제왕과 귀족, 관료 등 지배자들은 겉으로는 외침과 내부적 혼란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고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겉치레거나 부차적 기능일 뿐, 본질적으로 피지배자의 노동에 기생하여 수탈과 착취를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지배자 집단이다.

드물게는 성군(聖君)이라 칭송되는 좀더 영악한 지배자들이 나타나 생산 대중의 반감을 사지 않으며 효과적으로 수탈 지배하는 경우도 있다. 또 전통시대의 새로운 왕조가 개창될 시기의 초기 정권은 나름대로 피지배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골적인 수탈을 자제하고 부드러운 통제를 시도한다. 대체로 새로운 왕조,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시기에는 전왕조의 약탈에 가까운 수탈과 부패가 극에 달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새 정권의 부드러운 접근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마련이다.

이러한 지배자들의 절제된 수탈과 통제야말로 지배의 영속성을 가능케 하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라는 것을 공맹(孔孟)과 로크, 몽테스키외 등 동서양의 수많은 프로파간다들이 공통으로 깨닫고 설파한 것이다.

 

조삼모사 이야기가 주는 교훈

조삼모사의 옛일이 드러내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어리석은 피지배층을 상징하는 원숭이들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고구마가 네 개든 세 개든 먼저 자신들의 의견을 구하라는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우리 속담처럼 같은 말이라도 자신을 존중하는 말과 무시하는 말에는 감정과 반응이 다른 법이다. ‘빗자루 들자 마당 쓸라’거나 ‘하던 짓도 멍석 깔아 놓으면 안 한다’는 말도 그렇듯이 민중의 자존심과 자발성을 무시하면 겉으로는 아무리 옳고 좋은 것처럼 보여도 본래의 의의를 잃고 만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방폐장이나 광역화장장 따위가 아무리 필요하더라도 당사자들의 의견을 먼저 구한 뒤에 추진하기보다 관료지배의 관성에 사로잡혀 옳은 일이니 나를 따르라는 일방통행에 대해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이다. 관련 당국자들은 왜 이렇게 이익이 되는 좋은 일을 반대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할 것이다. 실제로 편익만 있는 일인지도 의문인 경우가 많지만, 절차의 문제가 내용만큼이나 중요하고 때로는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설득하는 작업을 먼저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발표부터 하고 보는 이제까지의 관행이 결국 분노의 불을 지펴 시간과 비용의 낭비를 거치고 나서야 사후약방문을 구하는 꼴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배층의 속임수에 데일 대로 데인 민중들의 최소한의 자구책이다. 역사적으로 지배층과 민중의 투쟁 결과 얻어낸 양보안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손바닥 뒤집듯이 배신하는 꼴을 너무도 많이 겪은 민중이다. 진주민란이나 갑오농민전쟁이 그렇듯이 수많은 민란이 벌어지면 지배층은 임시방편으로 온갖 사탕발림 양보안을 내놓고 돌아서기 무섭게 가혹한 탄압과 약탈을 되풀이하는 것을 지난 수천 년의 역사 동안 수없이 겪은 바다. 그러니 일곱 개의 고구마가 다섯 개가 되지 마라는 법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아침에 네 개라도 확보하는 것이 저녁에 겪을지도 모를 주인의 배신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판인 셈이다. 기본적으로 주인인 저공과 원숭이들 간의 신뢰가 쌓이지 않은 것이다.

 

'민중을 위한'보다는 '민중의, 민중에 의한'..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대에 민중이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에서 벌이는 파업과 시위를 두고 온갖 비난을 일삼는다. 말깨나 하고 입 달린 사람들은 경기가 호황일 때는 호황을 깬다며 시위 파업을 비난하고 불경기일 때는 가뜩이나 불경기인데 시위 파업이냐며 최소한의 살 길을 찾아 시위와 파업에 나서는 이들을 비난하며 난리부르스를 벌인다.

한두 번 속아봤어야 믿는 척이라도 해볼 것 아닌가. 사람 의심하는 것만큼이나 피곤한 일이 어디 있을까. 의심 받는 이도 고통스럽지만 매사를 의심해야 하는 이들이 실은 더 고통스러운 법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흔해 빠진 '노블레스 오블리주' 어쩌구 하는 지배자들의 최소한의 금도(襟度)는 이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지 않은가. 중세 이후 전통사회에서도 이 나라 지배층은 대륙지배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반도 안에서 피지배층을 멋대로 약탈하고 차별하고 짓밟아 곤죽을 만들어 왔을 뿐이다.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다. 고통을 분담하기는커녕 안팎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어린아이 입에 들어가는 것까지 빼앗듯이 민중의 고혈을 빠는 것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바쁘지 않았는가.

링컨이 언명한 민주주의의 실체는 '민중을 위한' 것에 있다기보다 '민중의, 민중에 의한' 것에 있음을 상기한다면 사회적 갈등의 근원과 해결을 위한 방안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먼저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12월 대선을 향해 짓쳐 나아가고 있는 문재인 후보의 행보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낡은 행태를 극복하고 진짜 민(民)이 주인이 되는 세상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황인오 (라파엘, 부천 혁신과 통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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