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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 ‘마음’ 전문가들과의 대화](11)마이클 가자니가·뇌과학자

소한마리-화절령- 2015. 10. 18. 13:30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 ‘마음’ 전문가들과의 대화]

(11)마이클 가자니가·뇌과학자

글·사진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
ㆍ폭력은 뇌 탓 아닌 사회 탓…당신의 잘못에 내 책임도 있다

진화심리학자이자 뇌과학자인 마이클 가자니가(75·사진)는 인간의 뇌를 사회적인 범주에서 연구하도록 길을 튼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뇌가 진화해온 길이 인류가 사회 속에서 소통하고 다른 입장과 신념 속에서도 공존을 추구해온 길과 발맞춰 왔음을 짚어냈다.


한국 사회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논쟁으로 소용돌이에 빠진 가운데 다른 한쪽에서는 발달장애직업센터를 중학교 옆에 설립해서는 안된다는 학부모들의 반대가 심하다. 정신장애이기에 위험한 돌출행동을 할 수 있어 자신들의 아이들 가까이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는 ‘부모 마음’을 내세운다. 이 또한 다양성을 거부하고 위험시하는 우리 사회의 폐쇄적인 불안심리의 반영인 듯하다. 우리가 그리도 롤모델로 삼고자 하는 선진국의 교육은 오히려 지적장애아를 격리하는 일이 사회통합을 약화시키고 미래의 불안을 조장하기에 어려서부터 같은 학교에서 지내며 생활 속에서 융화시키려 한다.

결국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발달장애직업센터의 문제는 하나의 문제이지 않을까?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작동하는 배타성이다. 다양성을 품에 안으며 사회를 발달시켜온 인류의 진행 방향과는 다른 흐름이다.

마이클 가자니가는 뇌의 장애 역시 사회적인 구조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작동되는 일에 초점을 맞춰 설명한다. 뇌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뇌가 정신을 만들고 그 정신이 심리를 만들지만, 그 심리가 오히려 뇌의 한계를 진전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밝혀왔다. 그와의 대화 속에서 개인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고, 개인이 모여 이뤄진 사회가 어떻게 인간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해 왔는지 들을 수 있었다. 가자니가와의 만남은 캘리포니아주 해변에 자리한 UC 샌타바버라대학 그의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안희경(이하 안)= 뇌과학, 진화심리학이 일상의 대화에서도 자주 거론됩니다. 연애상담을 할 때도 진화심리학 이론을 빌려 이야기하고, ‘묻지마 범죄’도 뇌과학을 인용하며 해석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생학적인 차별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1970년대부터 범죄자의 뇌를 조사한 미국과 일본 연구자의 논문을 들어 범죄자는 전두엽 손상이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이웃들의 뇌를 한번씩 스캔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거든요.

마이클 가자니가(이하 가자니가)= 뇌 수술을 받고 난 다음 성격이 매우 공격적으로 변한 경우들이 있죠. 기억력과 사고력은 그대로이지만, 뇌의 특정부위가 손상돼 일차적 감정과 사회적 감정이 약해져서 일어납니다. 자 그럼, 실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진실을 살펴볼까요? 미스터 존슨이 미스터 스미스를 죽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존슨에게는 좌뇌 전두엽 병변이 있어요. 종양 혹은 뇌출혈 때문에 그 부분이 죽은 거죠. 그래서 전과 다르게 폭력적이 됐습니다. 좋아요, 여기까지는 연구 발표입니다. 그럼 우리네 사는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요? 보통의 문화에서 전체의 3% 정도 사람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합니다. 좌뇌 전두엽 병변을 가진 이들의 경우는 13%가 폭력적인 행동을 하고요. 여기엔 또 다른 진실이 있습니다. 좌뇌 전두엽 장애를 가졌지만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87%의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거죠. 일반인들 중에 전두엽 병변을 가진 이가 얼마나 될까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상관관계가 거의 없습니다. 정신분열증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정신분열증 환자 대부분이 과학자의 가설에 따라 행동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이런 저런 종류의 정신분열증을 갖고 있고요. 하지만 사회 속에서 꽤 괜찮게 기능하고 있습니다.

안= 뇌보다는 그 사회가 얼마나 안전하게 작동되고 있는지 사회의 기능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군요.

가자니가= 절대적이죠. 우리들이 생각하는 99%는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죠. 다들 ‘저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저 행동이 원하는 바는 뭘까?’ 골몰합니다. 처음 뇌과학은 질병을 연구하는 동기를 부여받았어요. 파킨슨병이나 정신질환, 치매 등에 성과를 보였죠. 300년 동안 심리학자, 뇌과학자들은 ‘내가 자동차 열쇠를 어디에 두었을까?’ 또는‘왜 나는 초록색을 보지 못하는가?’ ‘나는 얼마나 많이 기억하는가?’ 등 개인적인 것에 대해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보통 사람들이 늘 하고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죠. 오히려 ‘내 아이가 나한테 말하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옆집에 사는 친구는 담장 옆에 어떤 나무를 심으려는 걸까?’ ‘내 편집자가 뭘 알고 싶어서 이 질문을 했을까?’ 이런 타인에 대한 응답이 우리가 하루종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니까요. 10년 전부터 뇌과학자들과 사회심리학자들이 방향을 제대로 찾기 시작했어요. 자, 이제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작동하는 뇌활동을 좀 밝혀내 봅시다. 대체 호모 사피엔스들한테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왜 이들은 특별한가?

안= 인간의 큰 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발달되어 왔다는 점을 그동안 밝혀오셨습니다. 사회적 마음(social mind)이라는 단어 역시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인데요. 이 기획을 진행하는 동안 두 번째 인터뷰이였던 생태시인 게리 스나이더는 ‘우리는 각자의 마음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러하기에 다른 대상과의 만남도 ‘마음으로 마음을 본다’고 표현했고요. 여기서 마음에 대해 한 번 짚고 가고자 합니다. 첫 회에서 진화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 박사가 마음은 뇌의 작용이라고 한 것처럼, 과학자들의 견해는 뇌 안에서 인간의 인식이 작동한다는 것인가요?

가자니가= 마음은 뇌로 일어났다고 하죠. 그리고 뇌는 온몸으로부터 오는 입력들을 받고, 또 환경 속에서 조합된 정보도 받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뇌의 작용이기도 하고 온몸의 작용이기도 하죠. 뇌는 우리가 마음이라고 여기는 그런 감각을 생산해요.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우리들이 접근하는 방식은 뇌와 마음의 구조라는 건데요. 뇌의 어느 부분이 특정 활동에 더욱 관여한다는 점을 발견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뇌 전체가 분산된 모듈이라고 봅니다.

안= 모듈이 무엇인가요?
가자니가= 우리 뇌 속에는 수백억개의 뉴런이 특별화된 국소회로로 연결되어 특정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국소회로를 모듈이라고 하죠. 예를 들어 어떤 단어를 들었을 때 반응하는 부분이 있고, 어떤 부분은 단어를 말할 때 반응하고, 또 모두가 동시에 이뤄지기도 하고요. 우리들은 그 연결을 발견하고 정체를 확인하고자 애쓰는데요. 지금의 과제는 어떻게 이들이 실제로 정신적 상태를 생산하도록 상호작용하는지 밝히는 데 있습니다.

안= 마음과 뇌의 관계를 좀 더 설명한다면요?

가자니가= 우리의 생각, 사랑의 개념, 미움, 여러 종류의 인식들, 환상, 뇌는 이 모든 것을 작동하고 전달합니다. 저는 이를 계층형 구조(혹은 계층형 건축)로 보고자 해요. 이 말은 보통 컴퓨터 세상에서 사용됩니다. 컴퓨터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죠?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이 두 가지의 상호작용으로 당신이 사용하는 파워포인트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컴퓨터 주회로 구간은 소프트웨어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고 소프트웨어도 컴퓨터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둘은 함께 놓을 때 뭔가를 생산해요. 마음과 뇌도 같습니다. 그 기능을 생성하도록 서로 작용하면서 일하죠.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 기능이 이뤄지는 과정을 밝히려고 과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있답니다.

안= 컴퓨터의 소프트웨어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은 환경이나 교육 등 후천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과의 소통으로 이해되는데요. 그렇다면 뇌 역시 살아가면서 변화한다는 거네요. 아이를 키우면서 접하는 정보에 의하면 5세까지의 지적발달이 이후 살아가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기능을 완성시키고, 10대 후반에 인성이 완성되기에 그 시기 동안 역사관이나 세계관 형성에 도움이 되도록 교육해야 한답니다. 어느 한 시기에 뇌 발달이 완성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가자니가= 평생을 통해 진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죠.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자유를 얼마나 증가시키는지는 지속적인 교육에 달려있어요. 더 많은 자유를 갖고자 하는 것은 더 많은 기회를 갖겠다는 의지이죠. 세상에는 기회와 선택을 바라보는 많은 방식들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적절한 것을 찾는 주체는 바로 우리입니다. 결국 인간은 결정을 내리는 장치들이죠.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 하고요. 그 생각을 이끄는 것이 바로 ‘앎’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나은 지식과 정보로 더 나은 결정을 하고 더 행복을 얻어야겠죠. 하지만 결정을 내리는 문제는 책임을 지는 것과는 또 다른 질문이에요.

안= 스스로 생각하며 정보를 수용해 결정을 내리면, 그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한다는 뜻인가요?

가자니가= 아니요. 책임은 문화가 지는 겁니다. 당신의 행위와 선택에 나도 책임을 지고 싶다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니까요. 자, 당신이 이 세상에 사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칩시다. 거기서 당신이 져야 하는 책임은 무엇일까요?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규칙을 만들어야 해요. 여기 70억명이 산다고 하면 매우 복잡해지는 거죠. 사회적인 여러 층위 속에 얽혀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의 두뇌 속에서 책임을 구하지 않는 거예요.

안= 선생의 책 <뇌로부터의 자유> 번역자가 후기를 썼습니다. ‘히틀러의 뇌를 연구하면 홀로코스트를 막을 수 있을까?’라는 제목입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가자니가= 재밌는 제목이네요. 글쎄요. 만약 우리가 히틀러의 뇌를 가졌고 그 뇌가 갖는 인식 패턴과 활동 패턴을 가질 수 있다면, 같은 행동을 할까요? 사람들은 같은 뇌를 가졌다 하더라도 세상에 대해 다른 행동 반응을 보일 겁니다. 어머니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고 여러 가지가 다르니까요. 홀로코스트는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을 겁니다. 아주 유명한 뇌과학자가가 있어요. 그녀는 가재를 연구했는데 가재라면 작은 신경세포까지 속속들이 알죠. 전기를 보내 활성 패턴을 보며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패턴이 2만가지가 넘는다는 거예요. 가재가 그렇습니다. 뇌에 관한 최근의 시각은 이래요. 큰 그림은 유전자가 그리되 그림을 이루는 세부 부분의 특정 연결은 활동에 좌우된다고요. 후천적 요인과 경험에 따라서도 형성된다는 겁니다. 선천적 요소와 후천적 요소 모두 중요합니다.

안= 뇌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산발적으로 접하면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를 ‘뇌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바꿔야 되나 했는데, 뇌 탓이 아닌 거네요(웃음).

가자니가= 절대요. 동의하지 않아요.

안= 그런데요. 진화심리학자들은 많은 것이 아주 오래전에 프로그래밍되었다고 하잖아요. 남성의 성욕은 여성과는 달리 억제되기 어렵다며 여성의 협조를 대놓고 강조합니다. 얼마 전 한국의 진화심리학자가 ‘왜 성을 사고파는가’에 대한 진화심리학적인 근거를 칼럼으로 썼습니다. ‘성매매는 먼 과거의 진화적 환경에서 남녀가 자원과 성을 맞바꿨던 행동에서 유래했다’고요. 물론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히틀러와 똑같은 뇌를 가졌다면 홀로코스트 등과 같은 행동을 보일까. 마이클 가자니가는 “뇌 활동은 선천적 유전자뿐 아니라 경험 등 후천적 요인에 의해서도 형성된다. 따라서 다른 행동 반응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가자니가= 위험한 주제를 꺼냈군요. 저는 이런 주제는 결국 우리 사회의 모든 규범들이 왜 존재하는지 그 의미를 묻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사회적인 규범, 그리고 ‘왜 우리는 합리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가?’ 말이죠. 진화론적 관점으로 본다면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더 성적인 활동을 원하는 것은 사실이죠.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에요. 호르몬 시스템이 더 빨리 반응한다는 기계적인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명화된 문화 속에 살고 있죠. 규범이 마련되어 있고요. 우리 연구소에도 매우 유명한 진화심리학자가 있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당신의 전두엽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행동들을 억제하는가?’라는 문제라고요. 우리는 모두 어떤 시점에서 뭔가를 하고자 느낍니다. 또 고려해야 하는 사회적인 이슈들도 함께 있고요. 우리는 21세기 시민들입니다. 인간의 본능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요. 앎의 결과로서 어떻게 그것을 다뤄야 할까요? 우리들이 해온 실수의 결과물들을 계속 그대로 해나가야 할까요?

안= 인간이기에 사회적인 마음으로 소통한다는 점을 강조하시는데요. 요즘 들어 분노조절 장애로 인한 개인들의 충돌이 언론에 자주 등장합니다. 경쟁이 심해지는 사회 속에서 서로를 협력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적대시하기에 짜증이 심해지는데요. 과연 협업이 인간의 본능일까요?

가자니가=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이에요. 협력하는 동물인 거죠. 똑똑한 동물인 침팬지라 해도 100마리를 한 제트 비행기에 태워 태평양을 건너갈 수는 없습니다. 비행기 속이 난리도 아닐 겁니다. 의자에 앉아 규범을 따르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인간 100명은 같이 날아가요. 서로 협조적이니까. 상식적인 목적이라는 걸 공유합니다. 지금의 경제시스템 속에서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사회과학 분야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갖죠. 오늘날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사회가 공동으로 해결책을 모색할 때 풀 수 있다고요. 개인적인 해결이 아니에요. 그리고 며칠 전에 이타심에 대한 연구 논문을 읽었습니다. 이타심은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위대한 응답인데요. 우리들 뇌의 움직임을 통해서도 당신이 얼마나 이타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가족에게 신장을 기증한 사람들과 생면부지 타인에게 기증한 사람들을 그룹지어 뇌 패턴을 연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아픈 여동생에게 ‘내 신장 하나 가져’라고 했어요. 이도 꽤 이타적이죠. 그런데 지금 이웃이 당신네 현관문을 두드리며 ‘나 신장 필요해요’라고 한다면요. 저는 ‘어! 좀 생각해 볼게요’라고 할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두 사람의 뇌를 살펴보면 서로 다릅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장기를 공짜로 준 사람의 뇌 속에 그 내용을 조정하는 회로가 훨씬 더 많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죠.

안= 이미 우리 뇌가 소통과 협력으로 자리잡혀 있다는 거군요. 뒤늦은 질문인데요. 왜 우리가 뇌에 대해서 알아야 할까요?

가자니가= 뇌를 알아가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거라고 봐요.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각자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가 커질수록 덜 공격적이 되겠죠. 제가 2002년에 윤리위원회 대표를 지냈고 <뇌는 윤리적인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때 주제를 정하고 많은 토론을 이끌었는데 줄기세포, 자유의지, 기억 강화약품 등 우리 생활에서 논의돼야 할 의제들은 다 꺼내놓았어요. 물론 뇌과학자 없이도 대화를 나눌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뇌과학자가 있다면 탁자 위로 보다 다른 관점의 정보들이 올라오는 거죠. 사리를 분별하는 사람들이라면 풍부한 정보 속에서 보다 깊이 사안에 접근해 들어가게 됩니다.

안= 보다 사려깊은 선택을 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봅니다. 끝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갈등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언을 주신다면요?

가자니가= 그냥 제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저는 자기 생각이 분명한 사람들과 여럿 어울려 있는 것을 즐깁니다. 왜냐하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계속 자극을 받게 되니까요. 그래서 항상 다른 입장에 있는 스태프와 회의를 하죠. 아주 많은 친구들이 세상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반대예요. 그런 똑똑한 이들이 늘 제 주변에 있으면 좋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그런 곳에는 있지 마세요. 이는 인생에서 기만당하거나 스스로를 기만하는 함정이 됩니다. 우리는 남의 생각을 알아야 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제가 평생 동안 추구해온 방식이에요. 그 속에서 학제 간 연구를 해왔고 다른 학문과 교류하는 글쓰기를 해왔습니다. 제 책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얻은 성과입니다. 누구라도 각자의 방에 우연히 들어오도록 놔두면 안됩니다. 우리가 함께 논쟁하며 이해를 넓혀갈 수 있는 이들을 허락해야 합니다. 종교와 신념이 달라도 토론할 수 있다면 그곳에는 ‘집단주의적 적대감’이 자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는 작더라도 함께하는 그룹을 또 일궈내야겠죠.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한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실린 연구 내용을 읽게 되었다. ‘가구 소득과 어린이들의 뇌 크기가 뚜렷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보고이다. 결국 가난할수록 평생 동안 이어질 중요한 뇌 발달이 유년기에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이다. 인지발달, 학습능력을 좌우하는 가능성이 부모의 소득에 따라 일찌감치 문이 닫힌다. ‘빈부의 차이가 커질수록 그 사회는 우울에 빠진다’고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말했다. 우울한 부모의 마음이 그대로 아이들의 마음으로 녹아내린다.

마이클 가자니가와의 대화를 마치고 든 생각은 ‘시대의 마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럼, 내일을 살아갈 아이들의 미래는 어떤 마음속에 있을까? 그 미래의 마음들이 가질 안녕과 불안 역시 지금 우리가 선택하는 곳에 놓일 것이다. 과연 오늘을 사는 마음들은 무엇을 책임지려 하는지…. 숨 고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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