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어법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가장 최근엔 에티오피아의 마라토너 릴레사가 자국 정부의 인권탄압을 폭로한 ‘X퍼포먼스’를 보여준 직후였다. 그는 리우올림픽
마라톤에서 2등으로 골인하며 두 팔을 치켜 올려 X자를 만든 뒤 시상대에서도 같은 동작을 연출했다. 경기장을 찾은 관중과 전 세계 수억 명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이 장면을 지켜봤다. 스물여섯 흑인청년이 허공에 쓴 이 상징적 기표記表는 그 배경이 알려지면서 순식간에 지구촌 곳곳에
국가테러의 잔인한 실상을 고발했다. 그의 돌발적 행위는 마치 인권침해의 현장에 나타난 인권활동가의 ‘긴급행동’처럼 보였다. 충격적이면서
신선했다.
릴레사는 경기 뒤 “내가 귀국하면 죽거나 감옥에 갈 것”이라며, 귀국 거부 의사를 밝혀 사실상 망명을 선언했다. 학살의
현장인 오로미아는 릴레사의 고향으로 에티오피아 인구의 3분의 1인 3천2백만 명이 살고 있는 곳이다. 올 들어 이 지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자 정부가 무력진압에 나서 1천여 명이 희생됐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이 압도적 비극 앞에서 SOS를 보낸 릴레사에게 반칙을
했다고 비난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설적이지만 인권유린과 폭력 중단을 촉구한 릴레사의 메시지는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올림픽의 이상과 양립하지 않는다. 자연법 차원에서도 도덕적 우위에 있다. 세계가 불화하는 한 제2, 제3의 릴레사를 막을 길은 없다. 기실 모든
폭력과 불평등을 멈추라고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평화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올림픽 이상의 실현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실정법
차원에서 보면 릴레사는 정치적 표현을 금지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규칙을 명백히 위반했다. IOC는 그동안 올림픽 출전선수들의 정치적 행동을
강력하게 처벌해왔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남자육상 200m에서 금, 동을 딴 미국의 흑인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흑인탄압을 고발하는
퍼포먼스를 벌이자 메달을 박탈하고 영구제명을 해버렸다. 당시 그들은 운동화를 벗은 채 검은 양말에 검은 스카프를 맨 뒤 검은 장갑을 끼고
시상대에 올랐다. 메달을 목에 건 뒤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흘러나오자 두 선수는 고개를 숙인 채 검은 주먹을 높이 쳐들었다. IOC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들의 행동에 동참한 호주의 은메달리스트 피티 노먼의 선수 자격마저 박탈했다.
다행히 IOC는 릴레사에 대해
경고를 하는 선에서 그쳤다. 메달 박탈과 제명 같은 살벌했던 징계를 내린 과거와 많이 달랐다. 이는 이해관계가 심상치 않은 문제의 경우
미봉하면서 넘어간 IOC의 현실영합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만약 이번에 메달 박탈 같은 조처가 나왔다면, 그간 강자에 너그럽고 약자에 가혹했던
IOC의 정치적 중립성의 잣대를 놓고 논쟁이 뒤따랐을 것이다.
국제스포츠 최고기구로서 IOC는 도덕적 권위를 세우는데 실패했다.
또 상업주의와 손잡으면서 너무 쉽게 아마추어리즘을 포기해 자본의 스포츠 지배를 허용해 버렸다. 패권국가 중심의 국제정치 논리가 올림픽에 개입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그때마다 강자의 정치논리에 휘둘려 스스로 정치적 중립을 훼손했다. 지난 1백20년의 올림픽은 강대국들의 놀이터였다. 심지어
미국과 소련은 자국 중심의 패권적 국제정치 질서에 올림픽 회원국들을 한 줄로 세웠다. 미국은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하자 서방진영
67개 국가에 ‘연판장’을 돌려 강제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출전을 금지시켰다. 구소련 또한 4년 뒤 LA올림픽 때 쿠바를 제외한 11개
동구권 국가들을 꼬드겨 똑같은 방법으로 보복했다.
반면 약소국이나 스포츠 후진국에 대해서는 신규 경기종목 채택에서부터 재정지원에
이르기까지 불공정하기 짝이 없었다. 공정성의 상징이어야 할 IOC가 강자의 왜곡된 질서를 추종하면서 그 체제 아래서 상업적 이익을 취하는 글로벌
영리조직으로 변신했다. IOC의 사내기업이라 할 마케팅 회사 ISL에 일감몰아주기로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 상징적 사례이다. IOC가 릴레사처럼
물의를 빚은 선수에게 추상같이 책임을 물으려면 자신의 과거사에 대한 성찰을 통해 도덕재무장을 해야 한다. 적극적 동의과정을 거친 리더십만이 또
다른 릴레사에 대한 대응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근대올림픽을 기초한 쿠베르탱은 “스포츠는 평화를 위해서도 혹은 전쟁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정치와 상업주의의 해악을 일찌감치 내다본 탁견이다. 쿠베르탱의 후예를 자처하는 IOC 지도자와 올림픽
가족들이라면 두고두고 새겨야 할 경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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