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풍경

먹방 시대

소한마리-화절령- 2016. 9. 30. 15:14
먹방 시대
강 명 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시절이 수상하니 오늘은 한가한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세종대의 인물인 이사철(李思哲, 1405-1456)은 벼슬이 이조판서에 좌의정까지 올랐으니 출세의 끝까지 간 사람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양반 덩치가 아주 커서 먹는 양도 많았다고 한다. 서거정(徐居正)이 쓴 『필원잡기(筆苑雜記)』를 보면 그의 한 끼는 큰 그릇에 밥을 가득 담고, 거기에 닭 두 마리, 술 한 병이었다고 한다. 밥과 술이야 좀 많이 먹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닭 두 마리는 과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 하루에 닭 여섯 마리를 먹는다는 것이 아닌가.

문헌에 기록된 폭식가, 드문 사례였기에

   이사철은 등에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다. 의원이 찾아와 불고기와 독한 술을 먹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하자, 이 양반 하는 말이 재미있다. “먹지 않고 살아 있는 것보다, 차라리 먹고 죽는 게 나을 것이야!” 그러고는 평소처럼 먹고 마셨는데 다행히 병이 나았다. 사람들은 “부귀를 누리는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도 여느 사람과 다른 법이로구나!” 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사철과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홍일동(洪逸童, ?-1464)은 원래 명문가 출신인 데다 호조참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 역시 대식가로 혁혁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역시 『필원잡기』에 의하면 진관사(眞寬寺)에 놀러갔을 때 어떤 이로부터 음식을 대접받았는데, 떡 한 그릇, 국수 세 사발, 밥 세 그릇, 두부국수 9그릇이었다. 이렇게 먹고 산에서 내려오니 또 대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주는 대로 찐 닭 2마리, 생선국 3그릇, 생선회 1쟁반, 술 40여 잔을 먹고 마셨다. 사람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세조가 소문을 듣고 홍일동을 불러 정말 그렇게 먹었느냐고 물었다. 홍일동이 사실이라고 하자, 세조는 ‘장사(壯士)’라고 칭찬해 주었다. 많이 먹고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홍일동이 유일할 것이다. 다만 홍일동은 평상시에는 미숫가루와 전국 술(물을 타지 않은 술)만 먹고 마셨고 밥은 먹지 않았다. 그는 뒷날 홍주에서 술을 엄청 마시고 죽었는데, 사람들은 배가 터져서 죽은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을 것이다.

   오늘 왜 이리 객쩍은 이야기를 하느냐고? 최근 저녁에 티브이 채널을 돌렸더니 여기도 저기도 모두 먹고, 요리하고, 음식점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대놓고 폭식을 찬양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먹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또 가끔 미식을 찾아 먹는 것은 삶의 기쁨이기도 하다. 하지만 범람하는 ‘먹방’을 보면, 이제 보통의 사람은 먹는 것 외에 달리 기쁨을 찾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넘치는 먹방, 옆 채널엔 살빼기 아우성

   조선시대에 폭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사철이나 홍일동 같은 극소수 양반에 지나지 않았다. 아주 드문 예이기에 문헌에 남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매일 먹을 것을 권한다. 싸고 맛있는 곳이라면서, 또는 제대로 된 식당이라면서, 또는 희귀한 음식이라면서, 또는 요리하는 현장을 보여준다면서, 어떤 경우 호들갑을 떨면서, 어떤 경우 점잖게 둘러앉아 음식과 요리에 관한 약간 전문적인 지식을 제공하면서, 오직 먹을 것을 권한다. 하지만 먹방 옆의 채널은 살이 인류의 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 빼는 방법을 알려주고 살 빼는 도구를 사라고 목청을 높인다. 먹는 것과 빼는 것은 우리 신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신체가 이미 식품산업, 요식업, 피트니스산업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음을 절감하게 된다.

   지진이 나서 땅이 흔들리고 핵발전소 옆에 사는 수많은 사람이 불안으로 잠을 이룰 수 없는데,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문제가 날마다 터져 나오는데, 그저 티브이는 연속극을 내보내고 먹방은 그칠 줄 모르니, 대한민국의 방송만 보면 참으로 태평성대가 따로 없다. 그만들 하시라, 먹방으로 일러주지 않아도 먹을 것 챙겨 먹고 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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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 휴머니스트, 2016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휴머니스트, 2015
〈이 외로운 사람들아〉, 천년의상상, 2015
〈홍대용과 1766년〉, 한국고전번역원, 2014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천년의상상, 2014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 휴머니스트, 2012
〈조선풍속사 1,2,3〉, 푸른역사, 2010
〈열녀의 탄생〉, 돌베개, 2009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