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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안시성, 조선의 양만춘

소한마리-화절령- 2016. 11. 18. 07:36
고구려의 안시성, 조선의 양만춘
노 관 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구려와 수의 전쟁, 그리고 고구려와 당의 전쟁처럼 극적인 전쟁사도 없을 것이다. 서기 612년 고구려에 침입한 수나라 양제의 대군을 패주시킨 고구려의 명장이 고구려의 재상 을지문덕이라면 서기 645년 고구려에 침입한 당나라 태종의 강군을 패주시킨 고구려의 명장은 안시성 성주였다.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오늘날 양만춘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이 정확한 이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 중기에 편찬된 『삼국사기』도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통감』도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확인하지 못했다. 김부식은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끝내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삼국사기』 사론에 토로하였다. 사실 당나라 태종은 당나라를 실질적으로 일으킨 군주였고 ‘정관의 치’라는 이름이 있을 정도로 그가 다스린 당나라는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러한 당나라 태종에게 군사적 패배를 안기고 고구려 원정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한중 양국의 문헌에서 찾지 못한 김부식의 안타까움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양만춘의 이름이 알려진 건 조선중기 때

  우리나라에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일이었던 것 같다. 중국에 사행을 떠났던 조선 사신이 북경에 가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 중국의 장수와 문인이 조선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이 사실이 퍼져 나갔다.

  중국에서 명대에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활약한 일대기를 소설 형식으로 각색한 웅종곡의 『당서지전통속연의』, 곧 『당서연의』가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당나라 태종의 고구려 원정을 말하면서 당시 안시성을 지키던 고구려 장수를 양만춘과 그 부하인 추정국, 이좌승 등으로 기록하였다. 이 책의 영향으로 안시성 성주가 양만춘이라는 지식이 널리 퍼졌고, 후일 송준길 같은 조선 학자는 경연에서 조선 현종에게 직접 안시성 성주가 양만춘임을 확인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명대 중국의 소설에서 나온 고구려의 장군 이름이 조선 사회에 널리 퍼진 결과 양만춘이 당나라 태종을 격퇴시킨 안시성 성주로 간주되었고, 아직 이 소설을 알 수 없었던 『삼국사기』나 『동국통감』에서 안시성 성주 이름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한국과 중국의 정사에서 전혀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고구려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끊임없이 양만춘이라고 기억된 데에는 조선시대 해마다 빠짐없이 계속된 중국 사행의 힘이 컸다. 압록강을 건너기 전 의주에서 중국의 수도 북경에 이르기까지의 사행길은 압록강을 건넌 후 명나라 또는 청나라의 영토를 지나가는 여정이었지만, 이 여정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의 영토를 지나가는 코스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조선의 사신은 중국 사행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옛날 유적들을 보며 끊임없이 지나간 역사를 회고하였고, 당나라 태종을 격퇴한 고구려 안시성이 사행길의 유적들 중에서 어디에 해당하는가를 살펴 보았다. 상당수 조선 사신은 요동의 봉황성을 안시성이라 생각하고 이곳에서 역사의 상념에 젖었고, 안시성 성주의 이름 양만춘을 떠올렸다.

  그 결과 조선 초기만 해도 고구려 안시성을 평안도에 있다고 생각했던 지식이 수정되어 요동에 서려 있는 고구려의 역사적 현장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후기 병자호란과 명나라의 멸망을 겪으면서 조선 지식인이 추구했던 북벌의 역사의식으로 고구려를 다시 인식하면서 고구려의 역사적 현장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져갔다. 이것이 안시성 성주 양만춘에 대한 기억을 이끌어왔던 근본적 힘이었다.

군사강국 계승한 조선은 왜 문약해졌나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계없이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백만 대군을 물리친 군사 강국이었다는 이미지는 오래 지속되었다. 조선 성종 때 최부가 바다를 표류하다 명나라에 도착해 현지 중국 지식인과 필담을 나누었는데, 중국 지식인의 큰 관심사의 하나는 최부의 나라가 어떤 장기가 있었기에 수당 군대를 물리쳤느냐는 물음이었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을 지켜본 명나라 지식인의 의문점은 강성한 고구려를 계승한 조선이 어째서 문약해졌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고구려는 조선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모델로 기능하는 측면이 있었다. 안시성 성주의 승리는 그 미래를 비추어 주는 오래된 거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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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노관범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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