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절령통신

2솔디면 살 수 있는 知識

소한마리-화절령- 2008. 2. 26. 12:11
진즈부르크『치즈와 구더기』서평

                   

 

                                2솔디면 살 수 있는 知識


 기독교가 지배하는 전근대시대 유럽을 떠올리면 봉건영주를 주군으로 모시고 충성과 의리를 다하는 멋진 기사도 정신과 같은 비교적 긍정적인 영상과 함께 마르틴루터의 종교개혁과 프랑스 大革命의 역사적 대격변을 초래한 敎會 등 지배층의 부패와 횡포의 부정적 영상이 동시에 떠오른다.

 

  비교적 긍정적 영상에 속하는 기사도나 유럽의 김삿갓이라 할 프랑소와 비용 같은 풍류 시인의 낭만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다지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기 쉽다. 충성과 의리로 채색된 기사도 역시 몇몇 각색과 윤색을 거친 예외를 제외하면 오히려 음모와 배신으로 점철된 추악한 내용으로 채워야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전근대 유럽을 부정적 인상으로 대하게 하는 교회와 세속 권력의 부패와 횡포는 우리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악취를 풍기고 잔혹한 피비린내를 풍기기가 일쑤라고 한다.

 

 '미시史'분야의 대가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역사가 진즈부르크의 대표적 저술인『치즈와 구더기』는 메노키오라는 이탈리아 어느 작은 마을의 방앗간 주인이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文字를 해독하게 됨에 따라 그때까지 이탈리아와 유럽을 全一的으로 지배하던 기독교회의 교의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신념을 갖게 되고, 그 때문에 종교재판법정에 서게 되어 마침내 이단으로 몰려 火刑에 처하게 되는 과정을 추리소설을 쓰는 듯 추적하여 그려낸 저작이다. 

 

 저자의 기술을 따라 읽다보면 주인공 메노키오가 갖게 된 이단적 신념이 어느 날 갑자기 생소한 관념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메노키오가 가진 소박한 유물론적 관념이란 중세 1천년의 교회가 민중에게 배급, 강요한 유일신론을 뿌리부터 부인하는 유럽민중의 고유한 사유체계였다는 것, 유럽 민중은 이러한 고대적 사유체계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일상의 삶에서 은연중, 그러나 확실한 형태로 보존, 전수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한 관념을 메노키오는 비교적 체계적, 조직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려는 욕구를 차마 이기지 못하고 발설하다가 교회의 날카로운 촉수에 걸려들어 희생을 당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주로 매 시대의 주류를 이루는 王朝나 교회권력 등 지배계급과 그 언저리를 중심으로 한 큰 줄기를 짚어내려 오는 것이었다. 해당시대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단역들의 모습은 역사라는 품위있고 고상한 학문의 령역에는 끼일 수 없는 것이다. 어쩌다 운이 좋은 경우라면 소설이나 희곡과 같은 문학의 영역에서 걸러진다고 생각해 온 것이다. 영국자본주의의 도약적 발흥을 위해 거쳐야 했던 2차 엔클로우저 운동으로 파탄(破綻)을 강제 당하고 고통을 겪는 英國 하층 농민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토마스 하디의『테스』가 발표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근래에 각광받는 이른바 '미시사'라는 것은 이와 같이 문학 등의 손을 빌려야 겨우 존재증명을 할 수 있었던 政治와 전쟁과 교회 등 주류가 아닌 역사적 구성원들을 당당한 歷史 주체의 一員으로  부분적 복권이나마 가능케 하는 비교적 성공적인 시도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微視史' 라는 것은 종래의 고상한 主流에서 벗어나 에두아르드 푹스의『풍속의 역사』와 같이 퀴퀴한 냄새를 풍기던 도회지의 뒷골목이나 상것들의 음란한 이불 속을 들추어보는 이른바 역사의 음지를 본격적으로 다루려는 경향이 진화를 거듭한 것이리라.  진즈부르크의 진술처럼 '다루는 대상의 크기와 규모만이 아니라 특정대상(보통 지나치기 쉬운 비본질적이라 여기기 쉬운 대상)을 현미경적 관점분석으로' 이동해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진즈부르크의 力作『치즈와 구더기』읽으면서 얻는 유익함은 메노키오라는 주인공을 통해 기독교 1천년의 유럽지배를 통해서도 끝내 민중들의 오랜 유물론적 세계와 역사에 대한 통찰적 지혜를 무너뜨리지 못한 것을 곳곳에서 발견한다는데 있다.『마르텡 게르(마틴 기어)의 귀향』이라는 영화에서도 아직 기독교 사제들이 유럽 농민들의 일상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중층의 억압구조 틈바구니에서도 개체성을 확보, 해방을 이룩하려는 민중, 농민, 여성들의 거칠고 투박하지만 간교하기까지 한 지혜가 엿보인다. 이것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민중문화, 또는 민중문학이라고 부르던 것들의 본질과 성격을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지배계층의 취사선택에 따라 배급된 '민중을 위한' 문화가 아닌 '민중에 의한', '민중의' 문화의 정체에 주목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1천년의 반복적인 교리 주입과 강요에도 불구하고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기듯 인간의 기원이나 사물의 시원에 관해 민중이 고수해 온 유물론적 세계관이야말로 이 책의 주인공 메노키오의 생기발랄하게 자유로이 구사하는 언어의 원천인 것이다. 양식화되고 생기를 잃은 지배층의 점잖고 고상한 척하는 문화에 비해, 문화란 기본적으로 이러한 민중문화, 즉 메노키오들의 일견 조잡해 보이는 언어들을 복원, 조합해낸 데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요컨대 이러한 민중문화에 파이프라인을 꽂지 않고는 어떤 문화도 그 생명 유지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유럽 일천년을 지배한 기독교가 그토록 잔혹한 종교재판과 탄압을 일삼은 가운데서도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할 때 세계를 그냥 만든 것이 아니라 천지가 될 일종의 씨앗을 만든 데 지나지 않다는 믿음. 제 아무리 전지전능한 하느님도 완벽한 無에서 우주아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일정한 조건을 바탕으로 세계를 창조했을 것이라는 基督敎 교의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유몰론적 신념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얼마나 통쾌, 유쾌한 일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무지한 농민들의 생각이 아니더라도 하느님이라도 도대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수많은 만물을 창조했을 것이라고 쉽게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하느님이 성서를 만들었다는 주장은 우리를 현혹시키기 위한 하나의 사기극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그는 자신을 드러내 보여야 할 것입니다' 라는 메노키오의 파천황(破天荒)적 발언을 들으면서 지방법정의 심문관들조차 내심으로는 일정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고상함으로 가장하였지만 단조롭고 생기잃은 지배층의 기록문화의 무미건조로부터 '역사가 자신에게 허용한 언어를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구사하여' 민중의 분방하고 거친 몸짓과 침을 튀기는 고함으로 버무려진 구전문화를 분리시키는 중요한 역사적 도약을 이룩한 메노키오들로부터 후대의 文士들이 진 부채는 그 가액을 계량하기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민중이 세계와 역사를 통찰하는 지혜가 '2 솔디만 주면 살 수 있는 지식을 독점하려는' 사제와 선비들의 부도덕한 행태에 의해 은폐되고 도용 당해왔다는 것까지 염두에 둔다면 부채의 절대액은 천문학적 숫자를 동원해야 할 것이다. 

 

 마치 최첨단 의학의 발달에 따라 환자의 환부를 날카로운 칼로 해부하듯 컴퓨터에 의한 단층 촬영법을 구사하는 듯 메노키오를 둘러싼 이단 심문과정을 촘촘히 분석하는 진즈부르크의 記述을 따라 가보면 인체의 살(肉)은 흙(土)에, 혈액은 물(水), 체온은 불(火)에 해당한다는 유럽 농민들의 인식을 만나는데 결국 땅에 의지하는 농민으로서는 洋의 東西를 막론하고 五行論과 같은 소박한 유물론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어떤 문화적 동질성을 발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그토록 강조하며 배급한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교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지않는 이슬람의 천국관에 더 가깝고 현세적 심판과 고대 서양의 이상세계에 대한 원형, 코케인的 천국, 즉 과자와 빵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꿈꾸는 땀흘려 일하는 고통을 경험한 일하는 사람들의 천국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천국일 밀레니움에 대한 강열한 열망을 잠시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진즈부르크의 記述을 따라 메노키오들의 소박하지만 강열한 민중적 세계관을 살펴보면 아무리 중세 천년을 지배한 기독교의 억압 속에서도 자신들의 고유한 사유체계를 고스란히 간직하며 후대에까지 계승시켰다는 사실, 지젤이나 오딘과 같은 고대 지배계급의 건국, 영웅신화만이 아니라 민중들이 꿈도 고스란히 간직하여 종교재판과 같은 극악한 폭압으로 유럽을 全一的으로 금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속깊은 내심까지는 결코 제압할 수 없었다는 것을 발견할 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보면 불과 한 세대도 안되는 짧은 세월 동안 인류에게 유전인자처럼 내재한 '사유재산을 배타적으로 所有하려는 강력한 무의식적 욕구'를 文化革命으로 청산할 것을 기대하고 실행하려한 毛澤東 시절의 중국공산당이나 크메르루즈의 모험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더 효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상사회를 지향하려는 인류의 오랜 꿈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 이 책을 읽다보면 찰스 디킨슨의 영국자본주의 이행기의 이면을 생생하게 묘사한 일련의 작품들도 떠올려지고, 움베르토 에코의『장미의 이름』과 같은 치밀한 논리구조를 따라 살인 등 사건의 미로를 헤쳐나가는 탐정소설을 연상케 한다. 디킨슨의 경우 작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악취 풍기는 영국자본주의의 하수구를 샅샅이 뒤져내어 그 시궁창에서 득실대는 구더기 떼처럼 성장해 가는 영국 노동계급의 분출하는 에네르기를 노출시켰다. 에코진즈부르크는 유럽 기독교 중세의 음습한 하늘에서도 조금씩 싹을 틔우는 근대적 이성의 힘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여 구소련의 패망 이후 새롭게 등장하려는 中世的 자본주의의 全一的 지배, 세계화에 거역하려는 일체의 이단을 허용치 않으려는 신자유주의적 도그마를 폭로하는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피지배계급이라는 용어대신 종속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데, 지배와 피지배가 어느 정도 은폐되어 혼효된 오늘날에는 어느 정도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251쪽 이하의 '가벼운 보석'이라고 된 몇몇 부분은 보속(補贖)이라는 가톨릭用語의 오기이므로 바로잡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미시사의 有用性을 인정하면서도 진실로 역사학의 사명이 과거에 대해 어떤 제한도 두지 않고 지난 온 인류의 삶을 빠짐없이 그대로 복원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다. 도대체 인류의 삶을 단층촬영기법을 동원하여 분석하고 헤쳐 보면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며 의미부여가 불가능한 것은 얼마나 되겠는가. 역사학적 유용성이 인정되는 미시사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아무리 컴퓨터가 종이책을 대신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종이책의 수요가 쉽사리 줄어들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펄프의 수요증대와 늘어나는 歷史家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현실적 수요가 微視史라는 새로운 分野로 활로를 찾은 역사학계는 넘쳐나는 木材의 수요에 응하려면 이제 얼마나 더 많은 나라들의 삼림이 파괴되는 데 얼마나 유용한 가치로서 응답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