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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 민관협치 ‘싹’이 보인다

소한마리-화절령- 2010. 8. 6. 15:37

[커버스토리]지자체 민관협치 ‘싹’이 보인다

2010 08/03위클리경향 886호

지자체 민관협치는 투표를 통해 정치인들에게 위임한 권한을 주권자인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민선 5기

지방자치에서는 이런 사례가 늘어날 전망이다. 주민과 함께하는 행정에 대한 고민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참여형 민주적 지방정부가 이 땅에도 싹을 틔우고 있다.



지난 6월 21일 삼성테스코 홈플러스로 한 통의 공문이 날아들었다. 발신자는 노원구. “지역 유통업체와 상생협력을 고려해 입점 계획을 철회해 주길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홈플러스는 노원구 상계 6, 7동에 기업형 슈퍼마켓(SSM)인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입점을 추진하고 있다. 공문은 “(입점을 강행할 경우) 영세상인 보호를 위해 이미 입점 중인 SSM에 대해 가능한 행정규제 수단을 엄격하게 적용할 예정”이라는 사실도 알렸다. 삼성테스코는 며칠 뒤 노원구에 ‘입점 유보 불가’ 의사를 알렸다.

민관협치는 진정한 지방자치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사진은 지난 1월 ‘2010 서울시민매니페스토 전달식’에 참석한 시민사회단체 인사와 정치인들이 ‘참다운 지방 자치 구현’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 |우철훈 기자


‘가능한 수단을 엄격하게 적용할 예정’이라던 노원구의 ‘경고’는 빈말이 아니었다. 단속이라는 칼을 빼들었다. 노원구는 7월 5~12일 관내 10개 SSM에 대한 합동점검을 벌였다.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중계점과 GS슈퍼 상계중앙점은 유통기간이 초과한 제품을 판매한 것으로 밝혀졌다. 롯데슈퍼 수락점은 한우 개체식별번호를 표시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기업형 슈퍼마켓 입점 반대 ‘구청의 조력’
규정을 위반한 SSM 매장들은 구로부터 영업정지 처분이나 과태료 부과 등 제재를 받게 됐다. 그러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입점을 강제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다. 김중근 노원구 소상공인지원팀장은 “유통산업발전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구가 SSM 입점을 막을 수 있는 법적 수단이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구의 의지는 강하다. 김 팀장은 “지역상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대기업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구의 입장은 지난 6·2 지방선거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 것이다. 이 지역 상인들과 시민단체는 올해 2월부터 ‘상계 6동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입점 반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SSM 반대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이노근 구청장은 비대위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았다. 이성노 비대위 대표는 “구청장을 만나려고 구로 찾아갔지만 구 직원들을 동원해 바리케이드를 쳤다”고 말했다.


구청장이 바뀌기 전인 3월에도 노원구는 홈플러스 측에 입점을 유보해 달라는 공문을 보낸 적이 있다. 김 팀장이 전화통화에서 “전임 구청장 시절이나 지금이나 구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아니다”라고 말한 이유다. 비대위에 참여하고 있는 김희선 노원마들주민회 사무국장의 생각은 다르다. “구청장 면담 요청이 수차례 거부당했다. 그때 보낸 ‘입점 유보 요청’ 팩스에 진정성이 있었다면 그럴 이유가 있었겠는가. 현 구청장은 당선자 신분일 때 우리와 면담했다. 그 뒤로 구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 지역 시민사회단체는 지난해 12월에도 민노당, 진보신당 등과 연대해 롯데슈퍼의 상계 2동 입점을 막아낸 전력이 있다. 당시에는 구의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지방선거 이후 구가 적극적인 조력자로 돌아선 것이다.


단순히 야당 정치인이 새 단체장으로 뽑혔기 때문에 생긴 변화일까. 5월 16일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등 야 4당과 시민사회단체는 선거를 앞두고 선거연합 합의문을 작성했다. 합의문은 “영세소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해 대형마트와 SSM 규제 방안을 마련한다”고 명시했다. 김태선 노원유권자연대 집행위원장은 “SSM 입점 저지는 노원구 현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선거 전부터 SSM 반대와 관련해 연대해 온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야당이 선거연대를 계기로 SSM 문제를 선거 공약 사항으로 만들었고, 김성환 당시 후보가 이를 수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합의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지방자치 행정에 대한 주민 참여를 보장한 대목이다. 야4당과 시민사회단체는 “시민참여형으로 민주적 지방정부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시민참여형 구정 운영과 정책 조정에 필요한 사항을 협의하기 위해 구청장 직속 정책협의회를 구성”한다는 데 합의했다. 구정 운영의 기본 방향을 지방자치 행정에 주민과 시민단체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민관협치(로컬 거버넌스)로 설정한 것이다. SSM에 대한 노원구의 극적인 입장 변화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앞으로 노원구의 정책 운용에서 주민 의사가 이전보다 폭넓게 반영될 것임을 시사한다.


공약을 본래 의미 그대로 공공의 약속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노원구와 야4당 및 시민사회단체는 민·관 거버넌스를 추진할 사무국의 인원과 직제에 대해 구체적인 안을 놓고 협의하고 있다. 사무국은 앞으로 구청과 시민사회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의결기구와 심의기구 주민에 개방해야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지역 상인과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입점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노원 마들주민회 제공

민선 5기 지방자치에서는 이런 사례가 늘어날 전망이다. 지난 선거에서 광역지자체 3곳과 기초지자체 28곳에서 공동정부 구성에 관한 원칙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물론 공동정부 구성이 지자체 민관협치 시대를 여는 전제 조건은 아니다. 생활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을 맡고 있는 정상호 명지대 교수는 “공동정부가 민관협치는 아니다. 지자체 수준의 민관협치, 달리 말해 로컬 거버넌스의 본질은 주민참여”라고 못박았다. “주민 참여를 통한 민관협치를 구현하려면 지자체 행정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 의결기구와 심의기구를 주민들에게 개방해야 한다. 도시계획심의위원회·인사위원회·인사심의위원회 등 핵심적인 권한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하고, 지자체 예산 계획 수립이나 집행 과정에서도 주민 의사가 반영되는 수준까지 가야 한다.” 정 교수는 “다만 공동지방정부라는 초유의 실험이 민관협치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측면은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지자체의 로컬 거버넌스를 연구해 온 정보연 도봉시민회 대표는 “참여정부에서도 각종 위원회 등을 통한 거버넌스 시도는 있었지만 중앙정치 차원에 국한돼 있었다”면서 “특정 정당이 단체장과 지방의회를 장악하다시피 한 민선 4기 때와는 달리 민선 5기의 경우 여러 정당이 지자체에 진입하면서 주민과 함께하는 행정에 대한 고민이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같은 고민은 정당 중심 대의제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과도 맞물려 있는 것으로,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하려는 시민들의 욕구 상승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덧붙였다.


단순히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수준이 아니라 주민들이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한다는 건 어떤 뜻일까. 한국 지방자치의 민관협치는 겨우 시작이다. 


주민 참여의 꽃이라 불리는 주민참여예산제나 주민참여기본조례가 참여정부 시기에 일부 지자체에서 시행된 적은 있지만 형식적 차원에 머물렀다. 지자체 수준의 민관협치가 본격적으로 시도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렇다 할 모델을 찾기가 어렵다. 정 대표는 미국 로체스터 시를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았다.


로체스터 시는 1970년대 이후 핵심 산업이던 해운업과 철강업이 무너지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인구와 세수가 함께 줄었다. 이 지역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1994년 선출직 시장이 된 윌리엄 존슨은 시민 참여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정책 운영의 주도권을 민간으로 대폭 이양했다. 시민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핵심 기구는 섹터위원회. 시는 인구 20만명의 도시를 10개 섹터로 나누고 시민이 주도하는 섹터위원회를 구성했다. 섹터위원회는 6개월에 걸쳐 도시를 되살리기 위한 섹터별 도시재생계획을 입안했다. 시는 예산을 지원하고 사업 시행은 섹터위원회가 주도했다. 빈민층 자녀들을 위한 자율형 공립학교, 수십 개의 소공원, 주민 참여 축제 등이 생겨났다. 섹터위원회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회적 기업인 ‘지역개발조합’을 만들어 스스로 고용과 수익을 창출했다. 2000년 이후 10년 동안 시민이 만든 1600여 개 도시재생계획 가운데 77%가 달성됐다. 여기에 소요된 예산의 70%는 주민들이 스스로 마련했다. 시민의 손으로 도시를 살려낸 것이다.


지자체 민관협치는 투표를 통해 정치인들에게 위임한 권한을 주권자인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정 대표는 “선거 때만 주인이 될 수 있던 시민들은 민관협치를 통해 진짜 시민이 될 수 있다.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공공 영역에 참여함으로써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