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를 주목하라
2009년 12월 31일 기준으로 경기도 고양시에는 93만8784명이 덕양구와 일산동구, 일산서구에 나뉘어 산다. 1989년 4월 일산신도시 건설계획이 발표되면서 신도시 건설이 시작된 이래 1990년 당시 24만명이던 인구는 10년 만에 80만명으로 불어났다. 고양시는 1992년에 시로 승격했다. 시로서 역사는 짧지만 지금 고양시는 한국 지방자치단체 민관협치 모델의 성공 여부와 발전 방향을 가름하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무지개연대는 고양시 민관협치의 중심축이다. 사진은 지난 1월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열린 무지개연대 창립식. |무지개연대 제공
고양시에서는 지난 6·2 지방선거 당시 중앙 차원에서는 실패한 야5당 연대가 이뤄졌다. 연대의 힘은 강력했다. 단일 후보로 출마한 최성 민주당 후보는 54.4%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광역 및 기초의원 선거에서도 압승했다. 8석이 걸린 도의원 선거에서 모두 이겼고, 기초의원에서도 30석 가운데 17석을 확보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이 60%의 득표율을 올린 것에 비교하면 도드라진 성공이다.
고양시를 민관협치의 시금석이라고 평가하게 만드는 힘은 이처럼 성공적인 야권 연대를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고양 무지개연대의 존재다. 올해 1월 30일 이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시민사회 연대기구 형태로 출범한 무지개연대는 지방선거 야당 승리의 일등공신일 뿐만 아니라 물밑에서 속도를 내고 있는 고양시 민관협치 모델 수립 과정에서도 방향타와 엔진 구실을 동시에 하고 있다.
고양시 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해 용산 참사를 계기로 야당과 공동행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그해 3월 시민사회단체 및 각 정당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고양지역시민사회연석회의 발족을 시작으로 일제고사, 4대강 사업, 경기교육감 선거 등 지역 관련 현안에서 호흡을 맞췄다.
6·2 지방선거에 대비한 대응전략을 짜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9월. 두 차례 토론회를 열어 의견을 조율했다. 11월에는 ‘1062위원회’라는 이름의 지방선거 공동준비 기구를 발족하고 기본계획을 짰다. 그러나 시민사회와 정당이 공동선거준비 기구를 꾸리는 것은 현행법에 저촉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방향을 바꿨다. 시민사회 조직은 무지개연대라는 이름으로 뭉쳤고, 무지개연대를 중심으로 각 정당과의 협력 틀이 구축됐다.
지방선거 야당 승리의 일등공신
무지개연대는 정책부터 만들었다. 정당과 시민단체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댄 끝에 올해 3월 발표한 ‘고양시정 10대 개혁의제 100대 정책공약 제안’이 그것이다. 개발보다는 사람에 투자하고 풀뿌리 주민자치가 생동하는 도시를 만든다는 것을 정책 기조로 내걸었다. 100대 정책공약에는 교육, 문화, 복지 등 시민 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개선 과제를 제시했다. 무엇보다 민관협치를 시정 운영의 기본 방향으로 내세웠다. ‘고양시 거버넌스 이사회, 동별 자치위원회, 분야별 정책협의회를 운영해 민관협력·민민협력의 자치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단체장 중심 행정이 아니라 주민 중심 자치 행정을 지향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6·2 지방선거에서 시장과 의원으로 출마해 당선한 야권 단일 후보들은 이처럼 오랜 기간 정당과 시민단체가 세심하게 공조해 만든 정책을 공약으로 이행하기로 약속한 이들이다. 우리 정치의 미래가 민관협치에 있다고 보는 이들이 고양시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해용 민주노동당 정책위 연구원은 “고양시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이 크다”면서 “시민사회단체가 주도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시민 참여의 범위와 역할이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다. 고양이 로컬 거버넌스의 사례로 가장 적절하다”고 평가했다.
지난 1월 고양시 지역 5개 야당이 모여 정당협의체 모임을 갖고 있다. |무지개연대 제공
민선 5기 지자체가 출범한 지 불과 한 달 남짓한 시점이지만 고양시 거버넌스와 관련한 내용은 이미 상당히 구체적인 수준으로 진전되고 있다. 최성 고양시장은 당선 직후 야5당 및 시민사회단체 대표들과 워크숍을 열고 민관협치 방향을 논의했다. 이후 고양시는 인수위원회와 자문위원회를 중심으로 민관협치를 위한 구체적인 틀을 꾸준히 가다듬어 왔다. 이춘열 무지개연대 집행위원장은 “이르면 8월 중순 이전에 최종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김현미 민주당 지역위원장, 최영희 민노당 지역위원장과 함께 고양시 야권 연대의 중심축 구실을 했다.
거버넌스를 위한 최상층 기구는 고양시정운영위원회다. 시정운영회는 시장 직속으로 편제해 시정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다. 시정운영위원회에는 민주당 지역위원회 대표 또는 추천인(4명), 야4당 대표 또는 추천인(4명), 시민사회단체 대표 또는 추천인(5명), 시장 추천인(2명)이 들어갈 예정이다. 운영위원회의 틀은 갖춰졌지만 정식 발족일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시정운영위원회 아래로 동별 주민자치위원회가 구성된다. 주민자치위원회는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 현안을 놓고 토론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타운미팅을 통해 주민 참여를 유도한다. 다른 한편으로 시 행정의 분야별로 정책협의회를 구성해 주민들이 시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든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하더라도 주민들의 참여 역량이 약하면 무용지물이다. 민관협치에 대한 주민들의 이해를 돕고 주민 자치 역량을 기르기 위한 수단으로 고려되는 것은 주민자치아카데미다. 구체적인 일정은 나와 있지 않지만 기본적인 운영 계획은 잡혀 있다.
주민자치아카데미는 프로그램별로 30여 명 정원으로 운영된다. 주민자치와 마을 만들기를 주제로 7~8개 프로그램을 3개월 동안 진행한다. 아카데미를 이수한 주민에게는 분야별 타운미팅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우선적으로 부여한다. 타운미팅에서 적극성과 능력을 보인 주민들은 동주민자치위원회에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미 결정된 사항에 거수기 역할만 하는 주민자치위원회의 위상은 크게 변화한다. 사실상 동 단위 자치기구가 된다. 행정 사항 결정과 집행의 방향도 역전된다. 시에서 결정한 사항이 수직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주민자치위원회를 통해 결정된 사항들을 시정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무지개연대는 장기적으로는 시 예산의 일부를 각 동에 배당하고 예산을 주민들이 직접 수립하게 하거나 사업 집행 권한까지 주민자치위원회에 부여하는 수준까지 고려하고 있다.
고양시 거버넌스 상당히 구체적 진전
다른 한편으로 시민감사위와 시민배심제를 도입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시민배심제와 달리 시민감사위의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다. 감사관 지위를 얻으려면 변호사 자격증을 갖춰야 하는 등 자격 제한이 있어 주민 참여를 제약하는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열린 공약 발표회 모습. |무지개연대 제공
문제는 주민 참여의 초기 동력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다. 이 집행위원장은 정당, 시민사회단체, 현재 주민자치위원회 위원들이 초기 동력으로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역 사회 현안에 적극 참여해 온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거버넌스 체제에서도 중요한 참가자가 될 것이라는 점은 당연해 보인다. 현재 주민자치위원회 위원들 또한 주민자치위가 명실상부한 자치기구로 변신하기 전까지 중요한 참가자가 될 것이다. 정당의 경우 거버넌스가 정착되면 주민 자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 될 것이어서 당원들의 참여를 독려할 것으로 보인다.
고양시 민관협치 모델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지역공동체다. 자치는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내기 위한 수단이다. 이 집행위원장은 이를 “적어도 우리 동네에서는 가난 때문에 굶거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말로 표현했다. 이를 위해 주민자치위원회가 초기에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해당 지역 복지 수요를 전수 조사하는 것이다. 빈곤 계층을 상대로 한 샘플 조사 방식으로는 조사를 통해 파악되지 못한 이들을 상대로 한 복지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복지수요 전수 조사를 포함한 지역 복지 관련 기본 방향은 선거 전에 마련한 100대 정책공약에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는 복지도시’라는 이름으로 얼개를 담았다. 예산 차원에서는 복지예산을 가용예산 대비 5%를 확보하고 긴급복지지원 예산을 50% 증액한다. 이를 위해 통합복지서비스센터와 지역거점통합센터를 운영한다. 한편 저소득층 주거 문제 해소를 위해 소형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하고, 재개발 지역 세입자들에게는 순환식 임대주택을 제공한다.
물론 이런 계획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민관협치가 성공하려면 단체장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공무원 협조도 절실하다. 성공적인 민관협치 모델로 평가받은 일본 혁신지자체의 경우 공무원 노조가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의회의 반응도 변수다. 이 지역 시민사회단체의 한 인사는 “여당 의원은 물론 야5당 내에서도 시정운영위가 의회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불만이 있다”고 전했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꿈으로 그친다. 모든 사람이 함께하면 꿈은 현실이 된다. 고양시의 시도가 현실이 될지 꿈으로 그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6·2 지방선거에서 고양시 65만 유권자들은 주민이 자치행정의 주역이 되는 꿈을 선택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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