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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받아라, 그것이 관계요 곧 존재다- 레비 스트로스

소한마리-화절령- 2012. 4. 22. 14:06

주고 받아라, 그것이 관계요 곧 존재다

유충현 | 대안연구공동체 연구위원
  •  ㆍ레비 스트로스 (1908 ~ 2009)

    봄이 왔다. 결혼의 계절이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청첩장을 보며 축의금을 되갚아야 하는 생각에 잠시 한숨도 쉬어본다. 어쩔 수 없다. 먼지 앉은 방명록을 다시 뒤적여 보는 수밖에. 받았으면 돌려줘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사소한 돈 몇 푼에 사람 잃는 것은 순간이다. 인간관계, 사실 별거 없다. 할 도리만 지켜도 떨어져 나가진 않는다. 서두부터 왜 이런 객쩍은 소릴 하는가. 레비스트로스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레비스트로스는 무엇보다 ‘관계’ 속의 인간을 강조했다. 그런데 관계가 가능하려면 교환이 선행되어야 한다. 관계를 맺고 나서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이 없다면 아직 관계 맺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인간은 교환하면서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왔다. 왜 그랬을까? 생존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자족적인 공동체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모든 공동체가 그렇지는 않았기에 나누지 않으면 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족의 안정과 부족 간 공존을 위해 언어와 물건이 교환되었겠지만 무엇보다 여성의 교환이 중요했다. 딸이나 누이를 해치러 오는 부족은 없었을 테니까. 내 여자를 남에게 내어주고 남에게서 결혼할 여자를 얻는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다. 이것이 근친혼 금지의 규칙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근친혼 금지는 과잉과 무절제를 경계하기 위함이다. 유전자 풀(pool)의 문제 같은 생물학적 이유는 접어두자. 어차피 당시의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을 테니까. 근친혼 금지 규칙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에서 분리되어 문화를 이루고 살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규칙이 사후적 필요성에 따라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 사유의 속성에 따른 귀결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항 대립을 사고할 수밖에 없는데 근친혼 금지는 여기서 자연과 문화라는 두 항을 중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양쪽의 속성을 모두 가진 양가적이며 모순적 항이라는 것이다.

    이제 대립의 문제를 설명해보자. 구조주의에서 대립(차이 혹은 변별성)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이다. 구조라는 것을 간단히 정의하면 ‘차이나는(대립적) 관계들의 총합’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선대의 인류학은 표층적 차이만을 부각시켰고 결과적으로 식민주의 지배 담론으로 포섭되었다. 이항 대립적 사유방식은 문명인들에게는 메울 수 없는 간극으로서의 ‘분절’(articulation: 여기서는 언어학적으로 나누고 자른다는 의미) 개념으로 발전하여 폭압적 인식론이 되었다. 반면 야생인들 역시 이항 대립을 사유의 도구로 삼았지만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매개와 중재의 기호들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현실에서의 해소할 수 없는 모순을 상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발전시킨 것이 바로 신화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가 조화로운 자연에서 분리되면서 건강함을 잃고 불균형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변형군(變形群)을 분석해보면 절제를 상실한 인간관계(근친상간, 부친살해, 형제간 반목, 배반의 줄거리)의 극한 대립은 결국 모든 모순을 떠안고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희생양을 통해 봉합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반면 야생의 사유는 중용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양 극단 간의 끝없는 변증법적 투쟁이 아니다. 따라서 야생인들의 사회는 역사에서 벗어나 변화 없는 정적인 사회가 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축구 경기다. 문명인들은 우열을 가르기 위해 축구를 하지만 야생인들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축구를 한다. 이것은 하나의 의례다. 히다차(Hidatsa) 족이 매 사냥에서 피 흘리는 미끼로 유인해 맨손으로 피를 보지 않고 매를 잡는 것은 먼 공간 사이를 매개한다는 의미 외에도 이미 미끼 사냥을 위해 피를 보았으므로 더 이상의 피를 보고 싶지 않은 절제의 철학이 담겨있다. 야생인은 매개 기능을 중요시하는데 그 이유는 세상이 결코 양 극단의 상태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서양의 형이상학은 순수함만을 추구하다보니 모호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고는 했다. <날 것과 익힌 것>에 나오는 보로로족의 기원 신화들도 오이디푸스 신화와 마찬가지로 근친상간과 존속 살해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질병이 삶과 죽음을, 장신구가 각기 자연과 문화를 매개하는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불의 기원 신화는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소유한 표범에게서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불과 실타래, 고기)을 빼앗아 오는 이야기인데 맹수와 인간은 서로 접근하기 어려운 대립 관계여서 표범의 아내로서 인디언 여성이 매개 역할을 수행한다. 신화에서 아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애초에 상정된 비대칭성(표범은 모든 것을 소유했고 인간도 잡아먹는 반면, 인간은 소유한 것이 없고 표범을 잡아먹지도 못한다)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얻고 나면 전도된 형태(인간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표범은 모든 것을 상실한 상태)로 비대칭성이 복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야생인들의 신화 속에 내재하는 치밀한 논리구조를 보여준다. 각 신화에서 설명할 수 없이 물음표로 남겨둔 신화소(mytheme: 신화를 이루는 구성단위)들은 추후 다른 신화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맞물리면서 여러 신화들의 치환과 변형을 증명해준다. 고장 난 라디오에서 부품을 떼어내서 컴퓨터 수리에 사용하는 전파상 아저씨(브리콜뢰르)처럼 신화란 이런 저런 이야기들에서 재료를 취해서 자기 부족의 문맥에 맞추어 변형시키며 또 다른 이야기들과 접목되고는 했다. 따라서 신화들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면 이치에 맞지 않고 엉뚱한 얘기처럼 보이지만 심층의 논리 구조를 보아야 한다. 담배 연기가 야생 돼지와 연관되고, 야생 돼지를 굽기 위해서 표범에게서 불을 얻어야 하고, 표범의 시체를 태워 담배를 얻을 수 있다는 신화에서 의미 부여가 지연된 신화소들 덕분에 완성된 원환을 이룰 수 있었다. 자체가 완결된 고리였다면 이러한 신화들의 연쇄 고리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취사용 불과 담배(야생인들에게 담배는 음식이다)에 대한 얘기로 왔으니 요리 얘기로 넘어가자.

요리는 자연이 문화로 변형되는 보편적 수단이다. 그리고 음식의 종류는 사회적 분별의 상징으로 이용되기에 적절한 예이다. 요리 삼각형에서도 날 것은 매개 요소다. 음식 재료로서의 날 것은 그 자체가 자연적 요소이지만 대개 길들여진 동물이거나 경작된 식물임을 감안하면 그것은 문화적 요소를 함께 갖기 때문이다. 익힌 것은 용기가 필요하므로 문화적 변형이며 썩은 것은 자연적 변형이다. 따라서 요리 삼각형도 인간 문화 속에서 내면화한 변형/정상, 문화/자연의 대립을 상징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구운 음식이 삶은 음식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다고 주장한다. 샤브샤브처럼 삶은 음식은 내용물을 보존하는 측면이 강하고, 굽는 것은 파괴와 상실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자는 경제성(서민적)을 나타내고 후자는 낭비성(귀족적)을 나타낸다. 우리의 경우 백년 가객인 사위를 접대하는 중요한 음식으로서의 영계백숙과 배달용 바비큐 치킨을 생각하면 이것이 과연 보편적 현상이냐는 물음이 절로 든다. 그러나 이러한 딴죽걸기는 레비스트로스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현상적 다양성은 여러 가지 가능한 조합 중에 선택한 파롤(변형)에 불과하니까.

이제 요약하자. 피부색은 달라도 피는 모두 붉다. 문자와 역사를 앞세워 우열을 가르는 것이 치졸하다는 얘기다. <슬픈 열대>에서 항해 중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보면 문명 세계의 사람들 역시 환경 앞에서 무력하며 아귀다툼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사르트르가 주체들의 추악한 욕망을 외부로 투사하여 “타자, 그것은 지옥”이라 언명하는데 비해 레비스트로스는 이성만을 좇느라 이항 대립의 늪에 빠져버린 “우리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라며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를 더 알고 싶다면

레비스트로스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마르셀 모스와 로만 야콥슨을 반드시 경유해야 한다. 뒤르켐의 조카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상률 역, 한길사)은 원시 사회들에서 선물 교환이 갖는 가치에 대한 체계적인 비교 연구서다. 경쟁적 증여로서의 포틀래치는 상대방에게는 답례의 의무를 지우는 부채이지만 레비스트로스는 한정 교환에서 일반 교환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증여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돌려받는 교환의 원환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로만 야콥슨이 없었더라면 과연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영향도 절대적이다. 야콥슨은 논문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에서 실어증 환자를 인접성(환유) 장애와 유사성(은유) 장애로 나누고 이것을 다시 조합과 선택의 쌍으로 묶어 설명한다. 레비스트로스의 토템과 신화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은유와 환유의 인류학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위 논문을 포함한 11개의 논문을 묶어 편집한 <일반 언어학 이론>(권재일 역, 민음사)이 번역되어 있다. 편히 읽을 만한 것으로 나카자와 신이치의 <신화, 인류 최고(最古)의 철학>은 레비스트로스의 신화 분석 방법을 동아시아와 유라시아에 널리 퍼져있는 각종 신화 민담에 적용하고 있다. 특히 신데렐라 이야기의 여러 변형군들을 분석하면서 서구의 판본이 갖는 가시성의 욕망과 인디안이 패러디한 비가시성을 대조하면서 본질과 실재에 접근하는 야생의 사유에 심원함을 드러내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