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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권력의 폭력에 맞서 ‘사회투쟁- 부르디외

소한마리-화절령- 2012. 4. 22. 14:10

자본과 권력의 폭력에 맞서 ‘사회투쟁’

성일권 | 대안연구공동체 운영위원·동국대 교수

 

 

 

ㆍ부르디외 (1930 ~ 2002)

‘1% 대 99%’, ‘분노하라!’, ‘참여하라!’,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2011년은 경제위기에 따른 구조조정 속에 지구촌 곳곳마다 시위대들의 절망과 분노의 목소리로 가득한 한해로 기록될 만하며, 아직도 그 여파는 계속되고 있다. 혹자는 젊은이들의 거센 분노가 체제순응을 거부한 68혁명과 닮아있다고 성급한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분노와 참여는 이내 식어버리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자본주의 진영은 더욱 교묘하고 은밀한 헤게모니전략을 구사한다. 그 많은 지식인들은 간 데 없고, 거리엔 절망과 낙담의 한숨소리만 들려온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폐암으로 사망한 지 10년. 우리가 그를 다시 호명하는 이유는 고인을 추념하기보다는 ‘현존하는 지식인들’을 못미더워하는 서글픈 현실 탓일 게다. 신자유주의의 야만성에 부르디외가 그토록 분노했지만, 현실은 오히려 더 암담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지식인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전의 부르디외는 노동자들이나 소외된 자들, 억압받은 자들의 시위에 맨 앞줄에서 투쟁을 벌였다. 부르디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위대한 사회학자이자 비판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꼽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 이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홀대와 지식인의 사회참여에 대한 인색한 평가 탓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사실, 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면서, 동시에 프랑스를 넘어선 세계적인 지식인이었다. 부르디외는 사르트르, 바르트, 푸코, 데리다와 함께 프랑스 사상의 보루였으며, 사회철학이 독일의 하버마스와 영국의 기든스에 의해 양분된 상황에서 가장 프랑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의 문제를 개입시킴으로써 사회학의 지평을 넓힌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아비투스(Habitus)와 장(Champ), 문화자본과 상징적 폭력. 부르디외가 생애 내내 수많은 저작활동을 통해 다듬고 체계화한 사상적 개념들은 오늘날에도 프랑스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혼돈과 모순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적절하고 유효하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현대사회의 제도적 모순과 권력지배에 대한 저항정신을 담고 있다. 일찍이 부르디외 스스로도 자신의 학문은 사회투쟁을 위한 도구라고 말했는데, 이런 점에서 종종 사르트르와 비교되기도 한다.

1955년 철학전공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한 그는 50년대 후반 군복무를 대신해 알제리 대학에서 몇 년간 조교로 근무하면서 카빌 마을에서 원시부족사회의 결혼제도와 물물교환제도를 연구하는 민속학적 연구 작업을 통해 자신의 사상적 주요 개념인 아비투스의 정립을 시도했다. 서구 자본주의의 이식에도 불구하고, 알제리 사람들은 왜 자본주의제도의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지 연구하면서 그들의 행동이 엄격한 합리성과 계산을 근거로 행해지기보다는 일정한 기억과 습관, 그리고 사회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의 아비투스 개념은 당시의 학계를 지배한 사상적 갈래, 즉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추종하지 않고, 이 두 가지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함으로써 현대사회의 모순과 병리를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개인의 행동이 사르트르의 말대로 주관적 의지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과거로부터 누적된 사회적 관행이 영향을 주고 있으며, 또 레비스트로스의 주장대로 개인행동이 일정한 규칙성을 갖지만, 그러한 규칙성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사회적 관행도 결국 권력과 같은 강제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이다.

1964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로 부임한 그는 동료들과 제자들을 규합하여, 그들과 함께 유럽사회연구센터를 만들어 <사회학연구>를 발간하며 다양한 문화 연구를 수행했다. 현대 자본주의의 불합리성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볼탄스키, 그리뇽, 파스롱, 베르데-르루 등이 그의 대표적 연구 동료들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상속자>(1964), <재생산>(1970) 등의 저서를 통해 프랑스 사회의 계급적 위계질서가 철폐되지 않고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기본적인 원인이 바로 학교교육제도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특히 마르크시즘적 전통에서 교육제도를 비판한 <재생산>은 미국에서 먼저 번역되어 미국 쪽에선 그를 교육학자로 간주하기도 했다. 5월 혁명 당시, 학생운동세력은 부르디외의 주장을 근거로 소르본 등 상층부 대학의 서열을 혁파하고, 모든 대학을 동등한 공립학교제도로 바꾸어 정부가 직접 재정문제를 담당케 하는 새로운 교육제도를 관철하기에 이른다. 이 무렵 부르디외는 <중간계급의 예술>, <상징재화의 시장>, <예술의 규칙> 등 다양한 문화영역의 연구서들을 출간했다. 부르디외 연구자인 홍성민 교수(<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에 따르면 그의 문제의식은 사람들이 대단히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생각하는 문화 활동, 즉 사진 찍기나 박물관 가기 따위의 일정한 취향이 사회계급을 유지시키며, 궁극적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인정하게 만드는 사회적 기제로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문화적 선택의 차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우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술이나 문화작품에 대한 해석 가능성은 사회 내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 길들여져 강요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1979) 출간을 통해 본격적으로 프랑스 사회를 대상으로 문화분석을 수행하면서 계급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정립하려 노력했다. 부르디외는 노동자들이나 민중계급이 자신들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는 중간계급론을 통해 유권자들의 투표권 행사가 왜곡되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중간계급이 사회적 상층부로 상승하고자 하는 욕망과 자신의 문화적 특성을 지니지 못한 정체성 상실 속에서 어떻게 그들의 정치적 가치관을 보수적으로 드러내는지 해석했다.

문화연구자 이동연 교수에 따르면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와 장의 개념은 개인의 행위와 그 행위들이 생성한 사회적 세력관계를 지칭한다(<문화자본의 시대>). 다만 아비투스는 우리가 행위의 담지자로 상정했던 ‘주체’, 혹은 행위적 담지자를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으로 간주했던 ‘주체화 양식’이란 추상적 개념에 비해 구체적인 개인의 감각과 행동을 지시한다. 이와 관련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논의하면서 알튀세가 자주 사용한 ‘주체’라는 말 대신에 거의 ‘개인’이란 개념만을 사용했다. 또한 장이란 개념이 사회적 세력관계들을 지시하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주체와 객체간의) 대립을 미리 상정하는 단순한 양진영의 세력관계가 아닌 아주 다양하게 얽혀있고 구조화되어 있는 세력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장들 간의 관계는 모순/대립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관계, 혹은 장들 간의 위상적 관계가 함께 존재한다. 가령 ‘사회 세력들의 장’은 정치의 장, 경제의 장, 문화의 장과 같은 사회적 심급으로 구조화되는가 하면 지배계급의 장, 피지배계급의 장처럼 계급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아비투스와 장은 같은 맥락이다. 지배적 아비투스를 지니면 지배적 장을 갖게 되는 셈이다.

부르디외는 장의 기구화, 즉 기계화를 우려한다. 기구라는 개념은 가장 위험한 기능주의를 재도입하며 몇 가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계획된 끔찍한 기계와도 같은 것이라는 얘기다. 주목할 만한 점은 학교제도, 정부, 교회, 정당 등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간주한 알튀세와 달리, 그는 이를 시민사회 영역으로서의 장으로 인식하면서도 기계적인 기구로의 전락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전개되는 지배와 피지배의 불평등한 관계가 개인의 무의식적인 아비투스를 매개로 성립되고, 상징적 폭력이 동원되고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불평등을 노동의 잉여가치가 불평등하게 배분되는 ‘착취’로 인식했다면, 베버는 시장관계에서 상징적 재화, 이를테면 명예나 위신 등을 통해 발휘되는 계층적 위계질서인 ‘지배’의 개념으로 이 문제를 포착했다. 부르디외의 상징적 폭력은 착취와 지배라는 이중적 문제의식을 동시에 담아내는 개념으로, 그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층적 위계를 규정하는 신분적 질서는 학력이나 가정의 배경으로부터 유래하며, 이것은 나아가 경제적 잉여의 왜곡된 배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신분질서의 착취와 논리가 개인의 무의식적인 아비투스를 통해 발휘된다는 점이다.

또한 부르디외는 뛰어난 사회학자였던 만큼이나 탁월한 언론인으로서 왕성한 미디어 운동을 통해 현실참여에 나섰다.

국제적 지식인운동단체인 ‘행동의 이유(Raisons d’agir)’ 결성(1995), 미디어비평단체(ACRIMED) 창립(1996) 등을 주도하며 각종 시위에서 노동자 편에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고발했다. 자본과 권력의 폭력 앞에서 우리가 한없이 왜소해진 지금, ‘실천적 지식인’ 부르디외가 더욱 그리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부르디외를 더 알고 싶다면

국내에선 부르디외가 뒤늦게 알려진 탓에 30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중 상당수가 아직도 소개되지 않았지만, 중요한 저작들은 대부분 번역 출간되었다. 그의 독창적인 사상 개념 탓에 그의 저서들이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어서, 처음엔 얇은 것부터 한권씩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강의에 대한 강의>, <텔레비전에 대하여>, <남성지배>의 순으로 읽다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의 대표작인 <재생산>, <자본주의와 아비투스>, <혼돈을 일으키는 사회과학>, <파스칼적 명상>, <세계의 비참> 등에 도전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부르디외의 입문서들도 몇 권 나와있는데, <부르디외 사회학입문>, <문화와 권력-부르디외 사회학의 이해>, <세계사상: 부르디외와 그 사회학의 세계> 등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