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절령통신

미래세대가 기억하는 사북을 위하여

소한마리-화절령- 2013. 4. 21. 10:19

 

미래세대가 기억하는 사북을 위하여

 

 

황인오(80년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

 

 

무엇이 역사(歷史)인가? 상식적으로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고 그 사건에 관한 기록물을 가리키거나 둘 다 일수도 있다. 그러니까 역사란 과거 어느 시점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사건에 대한 기록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역사에 대한 이해이다. 과연 그런가? 우리가 익히고 배운 역사는 정말 실재했던 과거 어느 시점의 사건을 온전히 담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올시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모든 역사는 이긴 자의 역사다.’라거나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말은 기록된 역사가 가지는 성격과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진술이다. 이를테면 일어난 사건 자체가 아니라 역사를 편찬하고 기록하는 사람 또는 집단의 관점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채택되어 기록되고 전승된 것이 역사라는 말이다. 또 그렇게 채택된 사건도 객관적으로 있었던 그대로 기록되는 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기억의 부정확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기록하는 자의 관점에서 재구성되거나 왜곡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33년 전, 유신독재를 뒷받침하던 가혹한 노동통제의 사슬을 깨트리고 일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되찾기 위해 떨쳐 일어섰던 사북노동항쟁을 기념하는 날이 다시 돌아왔다. 항쟁이 일어난 지 한 달 뒤에 발생한 광주의 끔찍한 피바람에 덥혀서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는 사건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북항쟁이 서울의 봄을 폭발적으로 꽃피우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사실만은 명백하다. 나아가 광주의 5.18항쟁 역시 한 달 전의 사북항쟁이라는 도화선을 빼놓고 말하는 것은 인과관계가 생략된 뜬구름 잡기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언급한 것처럼 특별한 지도부나 사전 계획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노동자들의 항쟁이 80년 이후 이 나라 민주주의가 전진하는 데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 제대로 기록되고 기억될 필요가 있다. 특히 사북노동항쟁은 민주주의가 단순히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는지 여부나 다투는 절차적· 정치적 과정의 문제로만 인식되는 낮은 수준의 논의를 벗어나 모든 구성원의 사회경제적 인권을 보장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다시 말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민주화운동이라면 학생이나 지식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되던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 노동자들도, 아니 노동자와 같은 민중이야 말로 민주화 운동의 핵심동력이며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진 계층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사건이이 바로 사북노동항쟁이다. 문제는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 사북항쟁이 거기에 걸맞은 대접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항쟁 관련자들이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살인적인 고문을 겪고 취업도 금지된 한계상황에 내몰리던 전두환 시절에 비할 수는 없이 상황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조촐하지만 해마다 지역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념식도 열고 그때 고초를 겪었던 인사들을 모시고 소찬이나마 나눌 수 있는 것 자체는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구체적 관련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33년 전 사북항쟁이 지향했던 진짜 가치가 실현되고 있는가이다.

 

 

당시 항쟁이 추구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품위있는 삶을 누릴 권리를 찾자는 것이었다. 임금 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은 가치로운 삶을 위한 기초적인 조건일 뿐 이 세상의 참된 주인인 일하는 사람에 대한 정당한 대접받기를 요구한 것이다.

 

 

33년이 지난 오늘 사북은 현상적으로는 강원랜드의 낙수(落穗)효과를 일부 누리며 별 탈없이 지내는 듯 보인다. 하지만 60년 전통의 사북초등학교가 이전하는 상황이 보여주듯이 당장의 먹고사는 일에 급급하여 어린이들이 꿈을 키우고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30년전에도 사북은 어린이들이 꿈을 가꾸고 키우기 어려운 곳이었다. 나날이 죽음같은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어용노조를 앞세운 독재정권과 기업의 비인간적인 처우에 스스로 자존감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의 삶이 어린이들의 소박한 꿈이나마 가꾸고 키우기 어려웠던  것은 당시를 기억하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오랜 전통을 이어 온 초등학교가 이전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전락한 오늘의 사북 또한 강원랜드가 떨어뜨리는 얼마간의 낙수(落穗)에 어린이들의 미래를 저당잡힌 것이나 다름없다.

 

 

역사는 기억해 주는 자손들에 의해 이어지는 것이다. 자손들이 긍지를 갖고 기억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 눈앞의 먹고사는 일에 소홀히 할 수 없지만 동시에 좀더 먼 미래를 위해 인식을 전환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먹고사는 일도 결국은 자신의 생을 이어 줄 후손들의 가치로운 삶을 위해 있는 일이 아닐까. 80년 사북항쟁과 95년의 3.3사태 역시 본질적으로 당대는 물론 미래세대의 생존과 가치로운 삶을 위해 결연히 일어선 것이라면 오늘의 사북을 좀더 인간다운 도시로 만들기 위한 담대한 도전에 나설 때가 되었다고 본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말했듯이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바위에 굵은 글씨로 새긴다고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미래 세대의 긍지에 찬 기억으로 남을 때 진정한 역사가 되는 것이다. 80년 사북항쟁과 95년 3.3사태가 단지 당사자들의 추억이 아니라면 당면한 생활과 함께 아이들이 꿈을 가꾸고 키우며 살 수 있는 도시로 만들 방법을 모색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