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가능성의 예술, 상상력의 정치 | ||||||
[황인오 칼럼]상상력 결여의 정치가 비극을 낳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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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오(전 부천시민연합 공동대표)
'서부전선 이상 없다.' 『포탄에 맞는 것도 우연이듯 내가 살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연이다.(중략) 어떤 군인이든 온갖 우연을 통해서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리고 군인이면 모두 이런 우연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두개골이 없어도 살아 있는 사람을 본다. 우리는 두 다리가 다 날아간 병사가 달리는 것을 본다. 두 다리가 절단되었는데도 비트적거리며 인근의 구덩이로 들어가는 자도 있고, 두 무릎이 박살 난 어떤 상병은 2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두 손으로 기어서 몸을 이끌고 온 경우도 있다. 어떤 병사는 흘러내리는 창자를 두 손으로 움켜잡은 채 응급치료소까지 온 경우도 있다. 우리는 입과 아래턱, 얼굴이 없는 사람을 본 적도 있다. 또한 우리는 과다출혈로 죽지 않으려고 이빨로 팔의 정맥을 두 시간 동안이나 꽉 물고 있던 병사를 발견하기도 한다. 어김없이 해는 떠오르고, 밤은 찾아오며, 유탄(榴彈)은 쉭쉭 소리를 내고, 사람들은 죽어간다.......』
<개선문>의 작가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한 대목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전장(戰場)의 참혹함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작품이다. 소설의 화자(話者)이자 주인공인 파울도 종전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전사했다. 파울이 사망한 것을 제외하면 평범하고 조용한 하루였다. 그날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사령부에 띄운 보고는 "서부전선 이상 없음. 보고할 사항 없음."이었다. 홍성원의 <남과 북>에서도 정전 협정이 종결할 무렵 비슷한 상황이 그려지고 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이명준이 인도양에 뛰어들어 한 줌의 포말(泡沫)로 사라진 것처럼 청년병사의 죽음 따위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이 작품은 레마르크가 18살의 나이로 제 1차 대전에 직접 참전한 체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전쟁의 참극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실감나게 묘사한 빼어난 작품이다.
8월 1일은 99년 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날이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대공이 세르비아의 한 청년의 총탄에 숨진 뒤 물경 900만의 인명을 앗아간 전쟁의 서막이었다. 그런데 사라예보의 총성이 울리고도 실제 전쟁이 발발한 것은 한 달이 더 지나고서였다.
한 달이 지난 8월 1일 독일군이 룩셈부르크를 침공하고 이튿날 8월 2일 벨기에 국경을 넘으면서 1차 대전이 전개된 것이다. 한 달여 기간 동안 당사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국인 독일, 그리고 상대진영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은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사태의 처리를 놓고 탐색하며 서로의 의중을 살피며 교착국면을 이어갔다. 이는 다시 말하면 전쟁을 회피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연구하고 출간한 미국의 산타바바라 대학교수 요하임 르마크(Joachim Remak)는 1차 대전의 전쟁 책임 문제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그 어떠한 국가도 1914년 당시 의식적으로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한 국가는 없었다. 1914년 여름에 있어서 미리 계산되었고 결정되었던 세계대전의 결의라는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사라예보 사건 이후 열강들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며 또한 타당했던, 일련의 조치와 대응조치를 거듭함으로써 다시는 협상 테이블로 되돌아 올 수 없는 상태로 한 단계 한 단계씩, 또 한 걸음 한 걸음씩, 때로는 무의식 상태에서, 또 그 결과를 거의 예견하지 못한 채 빠져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문제는 관련 당사국의 정치가들이 하나같이 국내 여론을 주도하며 상대국의 의중을 읽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며 사태를 책임 있게 이끌어 평화의 이니셔티브를 행사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상황에 이끌리고 양은 냄비처럼 들끓는 부박(浮薄)한 여론에 영합하며 눈앞의 정치적 이익에 골몰한 까닭에 대국적으로 상황을 관리하고 고도의 정치적 판단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었다는 말이다. 물론 1차 대전의 발발 원인으로 꼽는 요인은 여러 가지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산업혁명 이후 발달한 각종의 무기와 운송수단을 비롯한 전쟁수단의 발달이 전쟁을 야기했다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상상력 결여의 정치가 비극을 낳는다. 그러나 대전 중인 1916년 프란츠 카프카가 그의 친구에게 한 말처럼 근본적으로 "이 전쟁은 다른 무엇보다 상상력의 엄청난 결여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을 회피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통해 관련 당사국들이 서로 원하는 것을 얻고 점진적으로 상호 이익을 증진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던 때가 이 시기였다. 결국 이 전쟁으로 지키고자 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했고, 독일의 호헨촐레른 왕조도 패망했다. 제정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멸망하고, 오스만 터키 제국 역시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졌다.
시대를 통찰하는 역사적 상상력과 철학을 바탕으로 현실정치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하며 미래를 향해 공동체를 나아가게 하는 정치의 실종이 900만의 인명 살상을 초래한 것이다. 그뿐 아니다. 전쟁 종료 후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른 전후처리 역시 평화를 공고히 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 전쟁이 낳은 참상의 몇 배나 되는 인류의 재앙으로 등장하는 2차 대전의 불씨를 남겼다. 요컨대 역사를 조망하고 공동체의 먼 장래를 위해 헌신하는 투철한 사명감을 바탕으로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대응하는 정치지도자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이 60년도 넘게 지속된 분단체제를 하루빨리 종식시키고 드넓은 대륙을 뻗어가는 민족의 공동번영을 위한 스케일 큰 디자인은 염두에 두지 않고 눈앞의 정치적 국면을 돌파하는 데에 급급한 이 나라의 현실에서는 너무 동떨어진 얘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개성공단 문제 하나 풀어내지 못하고 격 떨어지는 기 싸움으로 아까운 세월만 보내고 있는 남북 양 당국의 치졸한 모습은 보기 딱하다. 자주 언급하는 말이지만 어른과 아이가 싸우면 누구의 잘 못인가? 힘센 쪽과 약한 쪽이 싸우면 누구의 잘 못인가?
최소 30배 이상 차이나는 경제력을 가진 쪽이 60년이 넘은 적대적 대립을 지속해 온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배짱을 부리는 모습은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상대의 격을 문제 삼는 가벼운 기 싸움에서 우세를 보인 것을 빌미로 상대를 완전히 코너에 몰아넣으려는 남측의 태도는 머지않아 부메랑이 되어 돌아 올 것이다. 생각해 보자. 한반도의 평화 번영, 재통일의 문제가 단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될 것은 아니긴 하다. 하지만 어느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철광석, 석탄, 각종 비철금속 등 지하자원의 경제적 가치는 최소 9.000조 원에서 1경 원(1,000,000,000,000,000원)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 남북관계가 경색된 공간을 중국이 차지하여 세계최대의 노천철광인 무산의 철광석 광산에 중국으로 직통하는 철도가 준공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남북관계만 잘 풀리면 남북 양측에 훨씬 더 유리한 조건으로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을 뻔히 눈 뜨고 뺏기는 형국이다.
정권 안보, 기득권 안보의 수단이 된 분단체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내건 박근혜대통령의 한반도 정책에 약간의 기대를 가진 것도 사실이다. 2002년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을 하고 남북 축구대회를 성사시키는 등 박대통령의 과거 행보를 볼 때 약간의 기대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개성공단 문제와 이른바 NLL 관련 정쟁을 대하는 일련의 태도로 볼 때 기대를 접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이명박 정권에 비해 정치적 레토릭은 잘 활용하는 것일 뿐, 경제민주화를 비롯한 국내 정치 역시 실질적인 알맹이는 빠진 채 재벌 대기업을 비롯한 기득권을 지키고 강화하는 기본 프레임이 달라진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편견인가?
남북관계의 경색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사태로 발전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소한 국지적 분쟁의 가능성이야 늘 있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환경이 과거와는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나 소극적인 현상유지와 '북한 옥조이기'를 통해 북한을 길들이려는 박근혜정권의 시도는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를 스스로 포기하고 주변 강대국의 변수를 강화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다시 말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우리의 발언권을 축소시키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현상적으로 분단체제의 지속을 통해 정치 ․ 경제 ․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을 유지 강화하려는 수구 세력의 이익으로 귀결될 것이다. 한민족 전체의 역사적 비원(悲願)인 화해 공존, 공동번영을 통한 궁극적 재통일이라는 커다란 가치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정치꾼들의 협량한 행태라고 밖에 할 수 없다. 2015년으로 예정된 국군의 전시 작전 통제권 환수를 미국정부에 대해 연기해 달라는 어처구니없는 요청을 한 까닭이기도 하다. 북한의 도발에 대처하기위한 것이 아니라 남한사회의 냉전 구도를 유지하여 개방적인 민주주의가 확산 강화되는 것을 억제하는 것, 한 마디로 기득권 안보를 노린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7월 28일 KBS에서 방영한 4부작 다큐멘터리 'DMZ: DMZ를 바라보는 4가지 시선'에서 최전방 소대장의 정직한 인터뷰에 예비역 장성들과 국방부 장관까지 나서서 큰일이나 난 듯이 난리를 부리는 경박함의 근원인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한 가닥, 또는 몇 가닥의 기대를 놓지는 않겠다. 나름의 정치적 감각으로 시류가 어떻게 바뀌는 가에 따라 태도 바꾸기를 잘 하는 박근혜대통령인 까닭에 국내외 상황의 변화에 따라 또 다른 카드를 내밀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한 비스마르크의 명언에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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