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정치공작과 관련한 부천시의회 행보를 비판한다.
부천시민사회단체협의회 전 공동대표 황인오
1. 6대 부천시의회에 대한 총평
인상비평
지난 화요일(7월 16일) 필자의 페이스 북 담벼락에 올린 부천시의회의 국정원 사태 관련 결의안 발의에 대한 글에 해당 결의안 발의에 참가한 두 시의원이 자신들의 의견을 폭풍 답글로 표명했다. 결의안 발의에 비판하는 내 글에 대한 해명과 반박인데 여기에 같이 답글로 대응하기엔 적절치 않아서 내 의견을 다시 정리해 본다. 두 의원 및 두 의원과 비슷한 의견을 가진 분들이 참고하면 좋겠다.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0912225787&ref=tn_tnmn:참조)
일단 제 6대 부천시의회에 대한 총평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006년~ 2010년간 활동한 5대 시의회에 비해 6대 시의회의 활동은 질적으로 현저히 낮은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필자의 의견만이 아니라 의회를 지켜 본 많은 이들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의회 속기록을 일일이 분석하여 언급하기는 어렵고 인상(印象)비평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좋겠다. 6대 시의회가 지난 의회에 비해 유독 잦은 파행과 정쟁으로 얼룩진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부천시의회 내에서 직접 이해관계를 갖는 주요 행위자는 다수당인 민주당과 소수당인 새누리당, 진보정당 등이 있고 시 집행부가 있다. 진보정당은 또 2:1로 나뉘긴 하지만 한때 같은 교섭단체를 구성했던 점을 고려하여 일단 한 묶음으로 분류하는 것을 양해하기 바란다. 6대 시의회가 잦은 파행과 정쟁으로 얼룩진 과정에서 이들 행위 당사자 중 누구에게 더 큰 책임이 있을까.
목소리만 큰 소수당
필자의 견해로는 첫째 별로 유능하지 못한 소수당, 특히 제 2당인 새누리당에 있다고 본다. 5대 시의회에서 소수당이었던 민주당의 정책비판 능력과 문제제기 능력, 집행부에 대한 강력한 대응력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이해가 갈리는 사안에 대해 논리적으로 대응하여 이해를 조정하기보다 걸핏하면 물리력을 동원하여 생활정치의 장이 되어야 할 기초자치단체의회를 치열한 정쟁의 시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느 나라건 국회를 비롯한 각급 의회가 제 역할을 하는 데에는 소수당, 즉 집행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유능한 야당의 활동이 주도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부천시의회 제 2당인 새누리당에 그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20년이나 시의원 활동을 하고 있는 새누리당의 최다선 의원 두 명은 당내 초선의원들의 의정활동을 효과적으로 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막말 파문을 일으키는 강경일변도의 초선의원들에게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리멸렬한 다수당
두 번째가 다수당인 민주당과 집행부이다. 결국 소수당의 행태는 다수당의 행태에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과거 소수당이었던 다수당이 현재의 소수당을 어떻게 대하거나 이끄는가에 따라 의회의 행보가 대체로 방향 지워지는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민주당이 6대 시의회 개원 초기부터 소수당을 제대로 이끌었는지 살펴보면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민주당의 경우 다수당이긴 하지만 과반수를 넘기지 못하고 캐스팅보트를 쥔 제3, 4당의 불안한 협력을 얻어야 하는 처지에서 마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듯한 행보를 보임으로서 제 2당인 새누리당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킨 측면이 다분하다고 본다.
테러위협이 일상화된 현재의 상황은 좀 달라졌겠지만 영국의 스코틀란드 야드(Scotland Yard), 즉 런던 경시청 소속 경찰관들은 뛰지 않기로 유명했다. 경찰관이 뛰면 시민들이 불안해하기 때문에 긴급구조의 상황이 아닌 한 뛰지 않는다는 것이다. 5대 시의회를 주도했던 민주당 의원들과 집행부는 다수당이 되면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에서 소수당이 된 진영을 선도하지 못한 것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어른과 아이가 싸우면 누구 잘못이겠는가. 경우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힘 있는 쪽의 잘못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5대 의회에서는 나름대로 일사불란하게 소속의원들이 잘 결집하여 다수당과 집행부를 효과적으로 견제했던 데 민주당이 6대에 들어서는 당내 결집도가 현저히 떨어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추울 때는 서로의 체온이 필요해서 붙어 있다가 날이 더워서 흩어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지만 의회와 민주당이 정글은 아니지 않는가.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서는 고락을 함께 하던 이들이 막상 천하가 손에 쥐어 지자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분열하는 것으로 비유하면 좀 지나친 것일까.
캐스팅보트와 기회주의
마지막으로 진보정당으로 분류되는 세 명의 의원이다. 대체로 캐스팅보트를 쥐었다고는 하지만 의회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제 1, 2당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가 아닌 한 평소에는 존재감을 드러내기 어려운 게 제3당이나 제 4당이다. 유일한 무기인 캐스팅보트를 활용하여 1, 2당의 갈등관계를 비집고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이들 진보정당 소속 의원들은 종종 자신들의 정체성과 어긋나는 형태로 좀더 적대적이랄 수 있는 정당에 힘을 실어 준 바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의 행보를 기대하는 시민들의 실망을 빚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정치적이건 아니건 사람의 의사표시에는 적극적인 것도 있지만 소극적인 부작위도 명백한 의사표시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첨언하자면 첫째와 두 번째는 순위가 바뀌어도 상관없다. 양 당사자의 책임을 굳이 계량하자면 관점에 따라 그 차이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의회의 결의안 채택에 관한 의견
각급 의회의 결의안 채택 과정
먼저 국회를 비롯한 각급 의회가 법안이나 예산안이 아닌 결의안을 채택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정치, 또는 권력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데 대한 답변은 정치학 교재마다 다를 것이나 대체로 ‘가치(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한계를 확장해 가는 구성원들의 욕망, 욕구에 비해 언제나 제한되어 있는 유형, 무형의 가치(자원)을 권위적(합법적)으로 배분하는 권한을 갖기 위해 각급 의회와 정부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회에서 법안이나 예산을 둘러 싼 다툼은 필연적이다. 한정된 가치(자원) 배분의 추(錘)를 자신들 쪽으로 기울게 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것이 선거이고 의회 내에서의 정치행위이다. 과거에는 이를 위해 물리력을 동원하여 좀더 폭력적으로 대립하고 다투었다면 이를 일정한 제도 안에서 비폭력적으로 다투는 장이 주로 각급 의회인 것이다.
따라서 의회가 이같이 가치 배분의 추를 자신들 쪽으로 기울게 하기 위해 법안(조례안)이나 예산안을 놓고 표 계산을 하고 때로는 단상을 점거하는 등 제한적인 물리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가능하면 대립하는 진영이 대화와 협상으로 이해를 조정하는 것이 좋겠지만 때로는 격렬하게 부딪히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런 다툼을 제대로 못해서 지지를 잃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각종 결의안은 좀 다르다. 국회든 어디든 구체적인 가치 배분을 둘러 싼 다툼이 아니라 그때그때 대체로 여론의 공감대가 이루어진 사안에 대해 의회의 총의를 표명하는 상징성을 지닌 결의안은 의회 내에 대립하는 정당 간에 협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드시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아도 상대진영의 반대가 소극적이어서 일종의 묵시적 동의라도 이끌어 낸 상태에서 채택하는 것이다. 국회는 물론 부천시의회가 그동안 채택한 결의안이나 성명의 경우를 보라.
채택은 하지 않아도 발의하는 것까지 문제 삼을 수는 없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요건을 갖추어 발의하면 절차에 따라 상정해서 표결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긴 하다. 그런데 의회 활동이 매번 그렇게 기계적으로 표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그러면 모든 사안이 의회 다수당의 의지대로 결정되어도 좋단 말인가.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새누리당이 국회법 절차에 따라 무슨 법안이든 발의하고 상정하면 야당인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은 기계적으로 토론과 표결에 참여하면 다 되는 것인가.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일당지배의 의회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떤 사안이든 형태는 일당 지배의 의회일지라도 내부의 찬반 의견이 갈리는 것이 당연하고 이를 조정한 뒤에 마지막으로 표결을 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 아니겠는가.
다만 경우가 다를 수는 있다. 시급하고 중대한 사안이지만 압도적인 다수당과 집행권력의 강압에 의해 중요한 가치가 왜곡될 현저한 위험이 있는 경우 여론을 일으키기 위해 소수당 결의안을 발의하고 상정, 표결을 위해 싸움을 걸어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를 강압으로 좌절시키는 다수당과 집행부의 횡포를 드러내기 위한 전술로서 법안이건 결의안이건 발의하고 싸울 수는 있을 것이다.
국정원 사태 결의안 발의 과정
논란이 된 국정원 사태 관련 결의안의 발의 과정에 대해 필자가 오해 또는 오인하고 있다고 보아 두 의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전에 민주당과 진보정당 의원들의 서명을 모두 받았으니 준비는 잘 한 것 아니냐고. 우선 지난 5월 의회에서 전통시장 보호 관련 조례안을 둘러 싼 논란에서도 보듯이 법안에 서명한 의원들이 표결에서는 반대하거나 부작위로 훼방하는 경우는 왕왕 있는 일이다. 국회 출신인 시의원이 알다시피 좋은 법안에 서명하면 다 되는 일이라면 역대 국회가 이 모양이겠는가. 형식적 의사소통만으로 준비를 다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대로 이해할 일이지만 실제 결과로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있어 홀로 고독하게 진리를 부르짖는 일은 언론과 의회도 없던 구약시대 예언자의 몫이다.
100만에 가까운 도시의 살림을 다루는 정치인, 시민의 대표인 의원들이 할 일은 기본적으로 시정에 관련된 일이다. 예외적이고 시급한 경우가 아니면 ‘지방의원’이 의회 밖에서 어떤 의사표시를 하건 자유겠지만 ‘부천시의회’에서 시국문제를 다루려면 그만한 과정과 역량을 갖추고 할 일이다. 어휘 하나하나를 시비할 생각은 없으나 국정원 사태에 관해 ‘모든’ 시민이 분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기엔 ‘다수’의 시민들이 공분하고 있지만 그 ‘다수’ 시민들의 분노와 관심의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2008년 쇠고기 파동이나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만큼은 아니다. 이를 더 많은 다수의 시민들이 함께 하도록 노력할 일이나 상황에 맞게 수위를 조절하면서 대응해야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지 아무 데서나 아무 때나 어떻게든 싸움을 벌이는 게 능사는 아니지 않는가.
덧붙이자면 4차례에 걸쳐 부천시 옴부즈만 임명 동의안이 부결된 것과 문화재단 대표이사 해임동의안이 통과된 것이 표결 결과가 말해주듯이 새누리당 탓만은 아니지 않는가. 나를 적대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상대가 있는 정치공간에서 이를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일은 정치적 역량의 문제이다. 힘으로 제압하지도 못하면서.
갈등과 대립의 최소화
내가 하는 일이 옳고 정당하다는 확신을 갖지 않으면 이 치열한 정치공간에서 무엇을 존립근거로 삼을 것인가. 아마도 적나라한 이익추구에 매몰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진영의 도덕적 정당성을 믿고 내세우는 것은 필요한 일이나 상대도 마찬가지 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엔 상대진영의 정당성 주장은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진리를 파지(把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전제에서 대립과 갈등에 임할 때 어떤 지점에서 해소의 실마리가 잡힐 것 아닐까.
어떤 사회에서든 갈등과 대립은 피할 수 없고 엄연히 존재하는 대립과 갈등을 은폐하는 것은 문제해결을 가로막는 일이다. 필자는 근본적으로 비폭력주의자가 아니다. 달리 어쩔 수 없이 물리력에 호소해야 한다면 단호하게 불퇴전의 의지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대립은 최소화해야 하고 최소화된 갈등과 대립도 비적대적으로 해소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줄로 생각한다. 필자의 시국관에 유감을 표하는 데 그건 견해가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부천 지역사회에서 필자만큼 현장투쟁을 거치고 모진 고문과 감옥살이한 이가 없을 것이라는 말로 납득하지 않을 줄 안다. 모진 고문과 감옥살이에도 불구하고 변절하는 이들도 있는 만큼 그게 내 신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참고는 해주면 좋겠다.
2013,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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